<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389화>
평평한 암반 위에 세워진 기둥과 지붕뿐인 건물이 보였다.
건물의 기둥에는 마력 스캐너 설치됐고,
스캐너 너머 암반에는 지하로 이어지는 너비 수십 미터의 돌계단이 있었다.
돌계단으로 지게를 짊어진 수백 명의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고 있었다.
이 돌계단이 부산 던전 입구였다!
출입 통제가 철저한 광화문 게이트와 달리 부산 던전은 출입 통제가 느슨했다.
팔에 마력 스탬프를 찍고 마력 스캐너만 통과하면 바로 던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1, 2층은 몬스터 정리가 끝났고, 부산 던전 자체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보다 원자재를 캐고 나르는 일반인 출입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통제가 느슨했다.
"부사장님. 장비는 안에서 착용하나요?"
최설의 물음에 천문석은 던전 입구 주위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공공 탈의실]
"저기서 헌터 장비 착용하고, 여기서 모이자."
"네. 부사장님!"
천문석과 최설은 공공 탈의실에 들어가 장비를 착용했다.
쿵-
천문석은 묵직한 배낭을 내려놓고 헌터용 장비가 담긴 안전상자를 열었다.
강화 전투복에 방검방탄복, 안전장갑과 안전화, 헌터용 헬멧을 착용하고,
봉인된 무장 상자에서 꺼낸 리볼버 안전장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히든 포켓에 넣었다.
그리고 다목적 무장 벨트를 허리에 차고.
딸깍, 딸깍-
왼쪽 벨트 고리에는 오리온 길드 최후식 이사가 빌려준 강화 해머와 단검을 결속.
철컥, 철컥-
오른쪽 벨트 고리에는 구급낭과 잡낭을 고정하고 확인했다.
구급낭에는 라이센스 포션과 붕대, 지혈제와 진통제 같은 약이.
잡낭 안에는 부산 던전 지도와 던전 나침반, 5층 형제 헌터 술집 명함, 헌터용 수표, 신분증, 현금과 작은 마석 몇 개.
그리고 낯익은 동전이 하나 들어있었다.
신동대문 지하터널에서 얻은 검은 동전.
거대 괴수, 마신의 강림체, 카지노 나이트.
제주도에서 겪은 연이은 난장판으로 깨진 마안, 괴수 코어는 잃어버렸는데도 검은 동전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핑-
천문석은 검은 동전을 공중으로 튕기고 빙글빙글 회전하는 순간.
팟-
히든 포켓에서 번개같이 뽑아낸 리볼버를 정면으로 겨눴다.
핑그르르르-
미동도 없는 리볼버 총신 위, 검은 동전이 회전한다.
이 순간 리볼버를 잡은 손에서 시작된 전율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느슨하게 풀렸던 감각이 바짝 조여들고 칼날 위를 걷는 무인의 기세가 살아난다.
부산 던전이 고등학생 수학 여행지이자 생활 헌터가 주로 활동하는 곳이라고 해도 던전은 던전!
던전에서 방심하다 훅 가는 건 순간이다.
팟, 탁-
감각을 되살린 천문석은 리볼버를 히든 포켓에 넣고 떨어지는 검은 동전을 낚아챘다.
그리고 안전상자와 무장 상자를 접어 배낭에 넣고 공공 탈의실에서 나왔다.
최설은 이미 장비 착용을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 끝났어? 바로 들어갈까?"
"네! 준비 끝났습니다!"
천문석과 최설 두 사람은 손목에 마력 스탬프를 찍고 마력 스캐너를 통과했다.
그리고 바로 던전 1층을 향해 돌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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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개의 계단을 걸어 내려온 던전 1층은 거대한 광장이었다.
바닥에는 평평한 판석이 깔려있고,
내려온 계단을 제외한 주위는 시야를 가리는 벽 없이 탁 트여 있었다.
이 탁 트인 공간 곳곳에 불이 밝혀진 마력 가로등이 솟아 있고,
이 가로등에는 영문과 숫자가 적힌 패널이 걸려 있었다.
[1A-1], [1A-2], [1A-3]···.
[1B-1], [1B-2], [1B-3]···.
지게를 짊어진 생활 헌터, 무장한 헌터들이 힐끗 패널을 보고 이동할 때.
수학여행 온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여러분, 여기 가로등의 패널 보이시죠?"
“가로등이 있는 바닥에도 같은 패널이 있는데.”
"앞의 '1A, 1B, 1C'는 층수와 구역 구분이고, 뒤의 '1, 2, 3'은 경로 표시에요."
"숫자는 던전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지고, 던전 밖으로 나올수록 낮아져요."
"즉, A 구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A-1, 2, 3번 패널을 따라가면 되고. 반대로 입구로 나오기 위해서는 A-3, 2, 1번 패널로 이동하면 돼요."
"모두 아시겠죠?"
....
학생들이 일제히 대답할 때,
천문석은 잡낭에서 부산 던전 지도책을 꺼내 경로를 확인했다.
7층에 있는 배송지까지 가는 최단 경로는 2층 F 구역을 거쳐 내려가는 거다.
천문석은 [1F-1]이라 적힌 패널을 가리키며 앞장서서 걸었다.
"우리는 저 '1F' 패널을 따라서 F 구역으로 이동하면 된다."
"넵. 부사장님."
최설은 여전히 바짝 군기든 모습으로 대답하고 바로 뒤를 따라왔다.
'2주 정도 같이 구를 텐데 편하게 말하라고 할까?'
문득 든 생각에 잠시 고민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신동대문에서 엠마와 일했을 때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엠마도 처음에는 최설처럼 바짝 긴장해 경칭을 사용했다.
하지만 정신없이 몬스터를 사냥하고 도망쳐다니며 구르자,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야, 야!' 거리기 시작했다.
이번 의뢰는 신동대문 때처럼 몬스터 사냥이 주가 아니라 금속 상자 배송이 주된 임무다.
그렇다고 신동대문 때보다 부산 던전이 더 쉽고 편할 거라고 볼 수는 없었다.
부산 던전 1, 2층은 마수와 몬스터를 모두 정리했지만, 3, 4, 5층으로 내려갈수록 나타나는 마수와 몬스터의 수준과 개체 수가 올라간다.
6층은 마치 거름망처럼 위험도가 확 올라가고.
7층, 목적지인 공방 도시가 있는 층은 마수와 몬스터도 문제지만 자연환경이 더 큰 문제였다.
‘우선 5층의 거점 도시까지 최대한 빠르게 내려간다.’
천문석은 머릿속으로 이동 경로를 그리며 힐끗 배낭 아래 묶어둔 조립식 지게를 봤다.
당연히 그냥 빠르게만 내려갈 수는 없었다.
‘흐흐흐-’
내심 웃음을 삼킬 때 최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 던전 1층은 구조가 특이하네요?"
주위를 돌아보며 말하는 최설.
장애물 하나 없이 탁 트인 광장은 수많은 가로등으로 밝혀졌고,
가로등 아래에는 바쁘게 걷는 사냥 헌터와 생활 헌터, 일반인, 학생들이 가득했다.
부산 던전 1층은 던전이라기보다 한밤중 대도시 광장 같은 모습이었다.
천문석은 드럼통을 올린 바퀴 달린 지게를 밀고 있는 생활 헌터를 가리켰다.
"원래 이곳 1층은 벽이 천장까지 솟은 미로였는데, 자원을 쉽게 나르기 위해 그 벽을 모두 철거했어."
"던전에서 그런 게 하는 게 가능한가요?"
"이곳 부산 '던전'은 엄밀히 말하면 던전이 아니거든."
천문석은 [1F-7, 8, 9] 패널을 따라 걸으며 부산 던전에 대해 설명했다.
사실 '던전'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부산 던전은 던전이 아니었다.
처음 부산 던전에서 원자재가 발견되고 그걸 캐내기 시작했을 때는 급박한 상황이라 면밀히 조사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게이트 전쟁이 끝나고 부산 던전을 조사할수록 일반적인 던전과 다르다는 게 밝혀졌다.
‘게이트, 던전, 균열, 마경.’
최초의 게이트가 열린 후 발생한 대표적인 이상 현상들.
이 중 ‘던전’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템'만 가지고 나올 수 있으며,
'던전 보스'를 이기는 것 같은 특정 조건을 만족하거나,
던전을 유지하는 힘, '던전 코어'를 회수하면 클리어가 되고 사라진다.
그러나 부산 던전은 아이템이 아니더라도 광석, 원유, 나무, 흙 등 개인이 '직접 들고' 나올 수 있는 건 뭐든지 가지고 나올 수 있고.
처음 발견된 후 지금까지 보스 같은 ‘클리어 조건’도 ‘던전 코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만 보면 부산 던전은 던전이 아니라 지하 마경인 것 같았다.
던전과 마경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땅을 파보는 것!
던전은 일종의 주머니 차원이라 물리적 위치와 실제 던전의 위치가 같지 않았다.
던전이라는 주머니 차원은 '던전 출입구'를 통해서만 들어가고 나올 수가 있었다.
즉, 땅을 파고 내려가서 던전 1층에 도착하면 ‘마경’,
1층에 도착하지 않고 흙만 나오면 주머니 차원 ‘던전’이었다.
그래서 부산 던전 입구가 있는 암반에서 던전 1층으로 굴착을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굴착해도 던전 1층이 나타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던전 1층에서 지상으로 암반을 뚫어도 금정산 정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렇게 부산 던전이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던전’으로 논쟁은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부산 던전 안에서 3층, 4층 환경이 다른 층이 계속 발견되고.
마침내 '5층'.
던전 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층이 발견되면서 논쟁은 다시 점화됐다.
부산 던전은 '던전'과 '마경', '게이트'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마경’처럼 그 안의 물품을 가지고 나올 수 있고.
‘던전’처럼 출입구 외의 곳으로는 출입할 수 없으며.
‘게이트’처럼 끝없는 자연이 펼쳐진 5층 같은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이 밝혀진 후 부산 던전은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됐다.
"무한의 미궁요?"
반문하는 최설에게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무한의 미궁. 처음에 부산 던전이라고 불러서 대부분 그렇게 부르는데. 게이트 전문가들은 '무한의 미궁' 이라고도 불러. 뭐 사실 이름은 중요한 게 아니지. 그보다 다 왔다."
천문석은 손을 들어 가로등에 붙어 있는 패널을 가리켰다.
[1F-77 / 끝]
끝이라고 적힌 패널이 달린 가로등 옆,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계단과 달리 아무도 내려가지도 올라오지도 않는 계단.
계단에 가까이 다가가니 계단 앞 바닥에 고정된 강철판이 보였다.
[2F-0]
그리고 그 아래 분필로 낙서처럼 적힌 글자 '설원'.
천문석은 던전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말했다.
"여기가 미궁 2층, [2F] 구역으로 이어지는 계단이다. 여기가 공방 도시까지 가는 지름길이야. 내려가자."
"설원이면 랜턴, 방한복 꺼내겠습니다!"
"[2F] 구역은 랜턴, 방한복이 필요 없는 설원이야."
"네?"
반문하는 최설.
천문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내려 가보면 알 거야. 우선 움직이자."
두 사람은 바로 계단을 내려갔고 30분 후 던전 2층 F 구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최설은 랜턴이 필요 없다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계단을 둘러싼 새하얀 설원에서 사물을 분간하기 충분한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달도 없는데···. 눈에서 빛이 뿜어진다고? 이건 대체!?"
최설이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설원 위로 나아가는 순간.
바사삭-
신발 아래에서 무언가 바스러지고 온기가 훅- 올라왔다.
"눈이 따듯하다고!?"
깜짝 놀라 바닥을 확인한 최설은 깨달았다.
바닥에 깔린 건 눈이 아니었다.
"소금?"
문득 고개를 들어 다시금 주위를 보는 순간.
천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F 구역, 설원. 여기 소금 평야야."
쿵, 바스슥-
천문석은 신발로 소금 덩어리를 바스러트리고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이 구역에는 염수(鹽水)가 섞인 지하수가 흐르는데. 그 지하수가 바닥의 열기로 증발하고 빛을 뿜어내는 새하얀 소금만 남은 거야."
"...그래서 랜턴도 방한복도 필요 없군요."
"그렇지. 이곳은 빛을 뿜는 소금이 깔린 소금 평야, 춥지 않은 설원이거든. 그럼 출발하자."
천문석은 앞장서서 소금 평야로 들어갔고 그 뒤를 최설이 따랐다.
흰 눈이 쌓인 설원보다 더 새하얀 소금 평야.
소금 평야에는 마치 형체를 가진 듯한 뿌연 빛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 뿌연 빛의 정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바스슥, 바스슥-
하얀 소금 덩어리가 발걸음에 바스러질 때마다,
뿌옇게 빛나는 불빛이 민들레 씨앗처럼 흩날렸다.
새하얀 소금 평야에 날리는 뿌연 불티와 발을 타고 오르는 은은한 온기.
최설은 지하에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 거대한 소금 평야를 걸으며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사람은 때때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다.
길가에 피어난 들꽃.
조용히 떨어지는 눈.
숲 내음 가득한 바람.
푸른 하늘의 하얀 구름.
최설은 무공 각성자가 되자마자 아버지 옆에서 비서로 일했기에 단 한 번도 헌터 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산 던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게이트 전쟁 당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 앞에 누군가 준비한 듯 나타난 원자재가 가득 쌓인 던전.
부산 던전.
이 던전에 있는 원자재는 ‘인력’으로 나를 수밖에 없기에, 해상 물류가 살아난 지금은 큰 의미가 없다고 경제적인 측면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직접 부산 던전에 들어와 이 거대한 소금 평야를 걷는 순간 머리로 아는 것 이상의 감흥이 느껴졌다.
바스슥, 바스슥-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소금 평야에 울려 퍼지는 발소리는 앞서 걷는 천문석과 자신, 단둘뿐.
단둘이서 이 빛으로 가득한 춥지 않은 설원을 걷고 있으니, 마치 세상의 끝을 걷는 듯 가슴이 울렸다.
'헌터. 어쩌면 이제야 내 천직을 찾은 게 아닐까?'
최설은 미소 띤 얼굴로 소금 평야를 돌아보다가 문득 앞서 걷는 천문석을 봤다.
약점을 잡혀 강제로 일하게 된 김철수 사무실이고,
이번 의뢰도 이해득실을 따져 신임을 얻기 위해 시작했다.
하지만 이 순간 최설은 자신을 고용한 천문석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삼합회 비서로만 일했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거다.
세상은 머리로 아는 것 이상으로 넓고,
이 넓은 세상에는 그만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최설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채 앞서 걷는,
크게 나이 차이 나지 않는 부사장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바스슥, 바스슥-
천문석과 최설은 12시간 동안 2F 구역, 소금 평원을 걸었다.
...
그리고 4일 후,
부산 던전 5층 늪지.
초췌한 얼굴로 달리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야! 쟤들 뭐야!? 늪지 고블린?! 쟤들 왜 저렇게 죽기 살기로 따라와!? 너 이번에는 무슨 짓을 한 거야?!”
거지꼴이 돼서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
최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