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385화>
재금 그룹 본사 임원실.
박혁 이사는 W. S. 인더스트리의 전용기가 활주로에 착륙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협상 상대 W. S. 인더스트리.
상대측 대표 로롤로 이사가 도착했다.
이제 곧 '보여주기' 위한 협상이 시작되고.
'보여주기' 위한 협상장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을 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은밀한 장소에서 '진짜' 협상을 시작한다.
이게 원래 계획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온 상대측 이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이사들이 뒷골목에서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재금 그룹과 W. S. 인더스트리.
두 초거대기업은 가능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존의 관례를 깼다!
협상이 코앞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심각한 얼굴이 된 박혁 이사는 전화기의 비서실 버튼을 눌렀다.
=이사님. 비서실입니다.
"협상단 실무팀 준비시키고. 장민 대표 연결하게."
곧 장민 대표와 연결되고 피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혁 이사님. 장민입니다.
"장민 대표. 뭔가 변동이 있습니까? W. S. 인더스트리의 이사 3명이 새벽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박혁 이사의 말뜻을 짐작한 장민은 바로 설명했다.
=이사님. 이번에 움직이는 이사들은 재금 그룹과의 협상 때문에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모두 개인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개인 목적이라면?"
=저도 정확한 내용을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로롤로 이사님이 공항에서 나오는 즉시 전화통화를 할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계획은 그대로인가요? 혹시 협상 준비에 시간이 더 필요하신가요?
박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신동대문의 게이트 소멸 사태 공동 조사는 이사회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온 명령.
가능한 한 빠르게 결과를 내야 했다.
"아닙니다. 계획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협상은 10일 후. 협상장으로 준비한 안전 가옥까지 안내할 길잡이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지정한 협상 장소도 변함이 없나요?"
"지정한 협상 장소 변함없습니다."
=그럼 모레 [01:00-11:00]까지 부산 던전 1층 만남의 광장으로 와주세요. 시간을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합니다.
재금 그룹과 W. S. 인더스트리 두 집단의 동선이 겹치지 않게 조정하겠다는 이야기.
"알겠습니다. 장민 대표."
박혁 이사가 전화를 끊는 순간 바로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이사님. 협상단 실무팀. 전원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바로 가지."
임원실을 나와 회의실로 걸어가던 박혁 이사는 문득 복도 창밖을 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거대한 중앙 공원 주위로 빌딩이 가득한 시가지와 재금 아카데미가 있고,
그 너머 까마득한 지상에는 한강과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금 자신이 있는 재금 그룹 본사 건물은 하늘에 떠 있는 섬, 천공의 섬 위에 있었다.
누군가 농담처럼 부른 '전능 옥좌'라는 말이 너무나 어울리는 천공의 섬 위에!
하지만 이 전능 옥좌의 주인, 재금 그룹의 오너는 벌써 몇 년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박혁 이사는 재금 그룹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느끼고 있었다.
전세계급 사고를 몇 번이나 치며, 언터쳐블이 된 재금 그룹.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몇 년째 오너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몇몇 이사들이 조심스레 야심을 드러내고 지분을 확보하고 있었다.
마탄 라이센스.
게이트 안정화 기술.
마석 액화 정제 기술.
최고등급 포션 제조 방법.
....
독보적인 기술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의 경영권에는 일국의 대통령 이상 되는 힘과 권력이 있었다.
이사들이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박혁 이사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야심을 드러낸 이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재금 그룹의 모든 것을 전부 모은다 해도.
'오너' 그 한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걸 극명하게 드러내는 게 창밖에 펼쳐진 거대한 공원과 마천루, 50만명의 사람이 살아가는 이 경이로운 천공의 섬이다.
이제는 모두가 너무나 익숙해져서 천공의 섬이 서울 하늘에 떠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박혁 이사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일본 정부와 계약하여 이 섬을 얻고 공항, 도로, 상하수도, 발전설비 같은 기반 시설 공사와 본사 건물 건설이 끝났을 때 갑자기 본사에서 걸려온 전화.
[오너가 곧 도착하니 섬에서 모든 사람을 내보내라.]
어이없었지만, 재금 그룹에서 오너의 이름으로 장난을 칠 사람은 없었다.
박혁 이사는 연락대로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고 혼자서 오너를 기다렸다.
그리고 상상조차 하지 못한 광경을 보게 됐다.
오너가 이 거대한 섬을 하늘로 띄우던 그 경이로운 광경!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까지.
백여 개에 달하는 게이트에서 쏟아진 마력장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 엄청난 마력장이 그려낸 다차원 적층 마법진!
너무나 아득하여 눈앞에서 보고있어도 조금도 파악할 수 없던 마법진이 섬에 새겨진 순간.
이 거대한 섬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일본을 떠나 서울 상공으로 이동했다!
이게 재금 그룹의 일본 섬 먹튀 사건의 진실이었다.
일본 정부는 재금 그룹의 치밀한 먹튀 계획에 완전히 당했다고 분통을 터트렸지만,
진실은 갑자기 나타난 오너 혼자서 섬을 하늘에 띄우고 서울 상공으로 이동시킨 거였다!
그때 박혁 이사는 오너의 진정한 힘을 깨달았다.
오너의 진정한 힘 앞에서 마탄, 게이트 안정화 장치 같은 세기의 발명품조차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너는 누군가의 말처럼.
전능 옥좌의 마도 황제 그 자체였다!
"하-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계신 거야? 섬을 띄운 후로는 전혀 나타나질 않으시니···."
박혁 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장철.
1세대 헌터이자, 게이트 사태 초기 미친 듯이 서울을 헤매고 다닌 장철은 오너에 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장철은 입이 무거웠다.
그리고 장철이 미친 듯이 서울을 헤매고 다닌 이유, 게이트 사태 때 겪은 일을 아는 박혁은 차마 장철을 강하게 추궁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 아직도 게이트 사태를 재현하는 던전을 찾아다니는 건가···."
박혁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돌려 뒤따르던 비서에게 지시했다.
"장철 헌터.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확인해봐라."
"네? 장철이라면···."
"1세대 헌터. 서울 수복 작전 때 길을 뚫은 강철 해머. 강철 해머 이름이 장철이다."
박혁은 비서에게 지시하고 눈앞에 보이는 회의실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제 이사회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할 때다.
-제주도에서 W. S. 인더스트리의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서울에서 재금 그룹과 W. S. 인더스트리가 공식 협상을 할 때.
-두 초거대기업의 대표는 제삼의 장소에서 만나 진짜 협상을 한다.
협상 의제는 동대문 게이트 소멸 사건.
협상 장소는 부산 던전 7층 거점 도시에 있는 장민 대표의 안전 가옥이었다.
‘협상 장소가 부산 던전이라니!’
박혁은 어쩐지 기분이 복잡했다.
부산 던전은 20년 전 게이트 전쟁이 터졌을 때,
온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간 젊은 박혁이 원유와 철광석을 지게에 실어 나르던 장소였다.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때 당시 사용하던 조립식 지게만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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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기! 3번 활주로에 내렸다!"
카메라를 목에 건 한 기자가 외치는 순간 수십 명의 기자가 동시에 달렸다.
공항을 달리는 기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W. S. 인더스트리의 제주도 투자 계획이 발표된 건 어제!
그런데 오늘 전용기를 탄 대규모 협상단이 한국에 도착했다!
말도 안 되는 일 처리 속도.
이건 그동안 물밑에서 오랜 시간 협상을 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오늘 재금 그룹에서 발표한 내용!
재금 그룹과 W. S. 인더스트리가 힘을 합쳐 공동 연구 조사단을 만든다고 했다.
두 초거대기업의 만남!
특종의 냄새를 맡은 기자들은 전용기에 탄 협상단이 나오는 게이트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이들의 타겟은 협상단 대표 로롤로 이사!
로롤로 이사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한국 주식 시장뿐 아니라 재계, 정치권까지 뒤흔들릴 거다.
이때 다급히 달리는 기자들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구두에 골프 바지, 가벼운 와이셔츠 한 장만 걸친 외국인 남자.
외국인 남자는 짐 하나 없이 게이트를 통과해 공항을 가로지르더니 인천공항 주차장에 주차된 경차에 탔다.
순간 조수석에서 대기 중이던 로롤로 가문의 집사가 몸을 돌려 스마트폰을 건넸다.
"가주님. 보안 전화기입니다. 장민 대표에게 재금 그룹 박혁 이사가 연락을 기다린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다른 이사들 문제입니다. 3번에 박혁 이사 번호 저장돼 있습니다."
“하, 성질 급한 놈들 때문에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겠네.”
로롤로는 박혁에게 전화를 걸면서 지시했다.
“우선 출발해라.”
경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할 때 통화가 연결됐고 로롤로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새벽에 들어온 저희 측 이사들. 협상과는 무관합니다. 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박혁 이사의 도움을 주겠다는 제안.
하지만 이건 극비리에 진행해야 하는 일이다.
로롤로는 박혁 이사의 제안을 바로 거절했다.
"아닙니다. 그냥 모른 척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네. 협상은 그대로 진행될 겁니다. 이번 일은 다음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로롤로가 전화를 끊는 순간 집사는 태블릿을 건네며 말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활동 중인 로롤로 가문의 분들이 호텔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로롤로 가문은 프랑스에서 역사가 오래된 가문, 그런 만큼 가문의 구성원도 많았고 각계각층에 가문의 사람이 진출해 있었다.
헌터, 기업인, 정치인, 예술인······.
태블릿에는 100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의 이름과 사진이 있었다.
"어, 왜 수가 이렇게 불었어? 처음 보는 사람이 왜 이리 많아?! 가주도 모르는 가문 사람이 뭐 이렇게 막 늘어나! 그리고 얘네들 일 안 해? 평일 낮인데 어떻게 다 호텔에 모여있어?"
로롤로 가주가 어이없어하자,
집사는 내심 웃음을 삼키며 태블릿 화면을 살짝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나타나는 수많은 아이 사진들!
"로롤로라는 이름을 붙이신 분들 모두 자제분들을 대동하고 오셨습니다."
로롤로는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깨달았다.
쇠락을 거듭하던 로롤로 가의 직계.
그러나 당대의 가주 '루이 코스틴 로롤로'가 각성자가 되고,
초거대기업 W. S. 인더스트리의 이사가 되면서 로롤로 직계 가문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다른 방계 가문의 재산과 영향력을 모두 모아도.
로롤로 가문의 가주, 루이 코스틴이 가진 재산과 영향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압도적인 격차가 벌어지는 순간 모든 게 변했다.
‘로롤로’란 이름을 떼어 버렸던 방계 가문의 사람들.
너무 멀어져 이제는 남이나 다름없던 사람들.
그리고 전혀 연결될 거리가 없는 생판 남까지.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로롤로’란 이름을 붙이고 귀찮을 정도로 로롤로 가주를 찾아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이들이 노리는 것은 너무나 뻔했다.
당대의 가주, 루이 코스틴 로롤로는 후손이 없다고 알려진 상황.
이들은 루이의 엄청난 재산과 영향력을 노리고 있었다.
"하, 이놈들! 내가 이놈들 꼴 보기 싫어서라도 기를 쓰고 200년은 더 산다!"
이때 집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오히려 잘된 것 아닐까요? 로롤로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으니···."
"....!"
로롤로는 집사의 말을 바로 알아챘다.
귀찮은 놈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혹시나 뒤에 따라붙을 놈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전용기를 타지 않고 환승해서 저가 항공기를 타고 몰래 입국한 이유!
귀여운 손녀를 보러 바로 갈 수 있는 거다!
로롤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집사에게 물었다.
"우리 귀여운 앙투안은 지금 뭐 하고 있지?"
집사는 바로 태블릿에 영상을 띄웠다.
화려한 금발 머리카락을 땋아 올린 어린 여자아이가 어쩐지 기운 없는 모습으로 어린이 기차를 타고 있었다.
"지금 항상 가는 키즈 카페에서 어린이 기차를 타고 있습니다."
"우리 앙투안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제주도에 놀러 가서 그렇습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라고? 설마 남자친구?!"
깜짝 놀라는 로롤로 가주.
집사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기록된 영상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남자친구라기에는 좀···.”
로롤로 가주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태블릿에 저장된 영상 목록을 살폈다.
미국의 세계패권을 상징하는 W. S. 인더스트리.
회사를 노리는 이들에게 손녀 앙투안이 노출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했기에 태블릿에 쌓인 보지 못한 영상이 수백 개가 훌쩍 넘었다.
로롤로 가주는 미소 띤 얼굴로 영상을 재생하며 한국에 온 진정한 목적을 말했다.
"그럼 바로 키즈 카페로 가지."
"알겠습니다. 가주님."
로롤로 가주를 태운 경차가 속도를 올렸다.
루이 코스틴 로롤로 가주의 손녀,
앙투안 코스틴 로롤로가 있는 키즈 카페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