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383화>
준비를 끝낸 천문석은 바로 광화문 게이트 지역에서 나와 재금 빌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재금 빌딩 13층,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오셨습니까! 부사장님!"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외치는 최설.
최설의 책상 위에는 커다란 캐리어와 장비가 담긴 안전 상자가 놓여 있고, 두 눈에선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폴리머의 작은 목소리.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천문석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뭐지, 최설 이 녀석?
연이은 야근으로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한데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분명 처음 데려올 때는 죽을상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전화 통화할 때도 이상할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
천문석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쭈뼛쭈뼛 일어난 폴리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부사장님. 오셨습니까."
천문석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 폴리머를 향해 말했다.
"네 저 왔습니다. 그런데 최설 사원님은 의욕이 아주 넘치네요···?"
'야, 지금 이게 뭐야? 쟤 왜 저래?'
천문석이 폴리머에게 눈으로 묻는 순간.
최설이 한발 앞으로 나오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천문석 부사장님! 이번 의뢰 제가 꼭 같이 수행하고 싶습니다!"
"네? 의뢰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 의뢰 2주에서 3주 정도 걸릴···."
쿵-
순간 번쩍 들어 바닥에 내려놓는 캐리어.
"장비 준비 끝냈습니다! 한 달이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부족한 장비와 식량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마수나 몬스터와 전투가···."
쿵-
다시 한번 앞에 놓이는 안전 상자.
"강화 전투복, 마력 무구. 장비류 일체의 준비도 끝냈습니다! 말씀만 하시면 바로 마탄과 총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이번에 마탄 총은 크게 필요할 것 같지 않긴 한데···."
천문석은 말끝을 흐리다가 말했다.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죠."
각자의 의자에 앉은 세 사람은 오리온 길드의 비품이 가득한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남는 공간.
회의 테이블로 쓰이는 사장 책상으로 모였다.
천문석은 의뢰서를 책상에 올리며 말했다.
"이번 의뢰 장소는 부산 던전입니다. 혹시 아시나요?"
고개를 갸웃하는 두 사람.
부산 던전, 일명 무한의 미궁은 한국 현대사,
특히 한국 게이트 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던전이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몇 번이나 만들어져 부산 던전은 일반인도 잘 아는 던전이다.
하지만 최설은 중국인이고 폴리머는 남미에서 왔다.
당연히 두 사람은 부산 던전이 어떤 곳인지 몰랐다.
그래서 천문석은 스마트폰에 한국 지도를 띄우고 빈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며 간략히 설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부산에 도착해서 이야기하고···. 이번 의뢰 목적지가 부산 던전 7층입니다. 1층에서 시작해서 7층까지 내려가는데 대략 일주일 정도 걸릴 텐데.”
정삼각형을 그리고 삼각형 안에 수평선을 긋고, 위에서부터 1, 2, 3 숫자를 메기는 천문석.
“이렇게 지상 가장 가까운 곳이 1층이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층수가 올라갑니다.”
천문석은 위 꼭짓점에서 시작해서 수평선을 가로질러 내려가는 선을 그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해가 뜰 때 출발해서 해가 질 때까지, 일주일 동안 걸어야 합니다. 여기 1층에서 7층까지요. 혹시 중간에 몬스터를 만나거나 문제가 생겨서 우회하면 더 걸어야 하고요."
천문석은 폴리머와 최설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여기가 도로가 다 깔린 게 아니라 캐리어는 사용이 힘듭니다. 40kg 배낭 메고 일주일 동안 걸을 수 있으세요?"
"40kg 배낭이요?"
눈을 크게 뜨는 폴리머.
천문석은 배송 물품과 무장 상자가 담긴 배낭 바닥에 장비가 담긴 안전 상자와 조립식 지게를 끈으로 고정했다.
묵직한 배낭.
"한 15kg 정도 되나?"
천문석은 비품이 쌓인 선반에서 5L 세제 통 5개를 꺼내 배낭에 연결했다.
"무게 중심 때문에 더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이게 대충 40kg 정도 될 겁니다. 이거 메고 잠시 걸어 보세요."
폴리머와 최설 모두 각성자,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40kg 배낭을 메고 쉽게 걸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잠시 40kg 배낭을 메고 걷는 것과 배낭을 메고 하루 12시간 이상 일주일 동안 위험한 던전을 내려가는 것은 천지 차이다.
게다가 배송 물품이 가벼운 만큼 돌아올 때도 짐의 무게는 크게 줄지 않는다.
의뢰 중간, 혹은 의뢰가 끝나고라도 퍼져 버리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다.
천문석은 폴리머를 보며 고심했다.
처음에는 마력 각성자 폴리머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마력 각성자의 마법은 여러 방면에서 유용했다.
특히 예기치 않은 야영 시 경계 마법을 사용하면 불침번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
엄청난 메리트다!
그런데 배낭을 메고 걷는 모습을 보니 폴리머는 중간에 퍼질 것만 같았다.
그에 반해 무공 각성자 최설은 40kg 배낭을 메고도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걸었다.
게다가 최설의 자세와 움직임을 보니 아직도 여력이 충분하다.
'음. 역시 무공 각성자가 튼튼하긴 하네···. 130kg? 그 정도까지는 거뜬할 것 같은데.'
천문석은 두 사람을 보며 고심했다.
퍼질 우려가 있는 마력 각성자 폴리머.
튼튼하고 막 굴리기 좋은 무공 각성자 최설.
'누굴 데려갈까?'
이때 천문석의 고뇌 어린 시선을 눈치챈 최설이 크게 외쳤다.
"꼭 제가 가고 싶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보필하겠습니다!"
"....?"
천문석은 바로 고개를 돌려 폴리머를 봤다.
뭔가를 기대하는듯한 천문석의 눈빛에 폴리머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눈치를 봤다.
이 순간 천문석의 입이 열렸다.
“이번 의뢰 누구와 갈지! 결정했습니다!”
“....!!”
“....!?”
사무실에 긴장감이 흐르고.
천문석이 천천히 입을 열 때.
“이번에 같이 갈 사람은···.”
쿵, 쿵, 쿵, 쿵-
벽을 타고 들려오는 진동!
"엇, 이게 뭐야?"
천문석이 깜짝 놀라는 순간 최설이 분통을 터트렸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드르륵-
최설은 거칠게 서랍을 열어 검은색 고무망치를 꺼내 들고 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고무망치에 각성력을 담아 미친듯이 벽을 두들겼다.
쾅쾅쾅, 쾅쾅쾅-
벽을 타고 울리던 진동은 곧 잠잠해지고.
콩, 콩-
사과하는듯한 작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이 순간 좀 잘하라고 말하듯 벽을 세게 한번 치는 최설.
콰앙-
단숨에 소음을 제압한 최설이 다시 돌아와 조마조마한 눈으로 천문석을 봤다.
"...."
최설은 어느새 사무실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였다.
이 순간 천문석은 결정했다.
"최설! 사원 당첨!"
"으아앗! 해냈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최설 사원이 이렇게 좋아하니 저도 기쁘네요! 그럼 바로 출발하죠!"
"알겠습니다!"
"우리 화물차는 주차장에 있나요?"
"그 복합 엔진 화물차 제작자에게 정비 때문에 보냈습니다. 다른 화물차를 빌릴까요?"
어차피 부산 던전 안으로는 화물차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조립식 지게와 튼튼한 최설이 있었다.
천문석은 바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KTX를 타고 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최설 사원 바로 출발할 수 있죠?"
최설은 스마트폰을 꺼내며 재빨리 대답했다.
"네! 부사장님! 바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부족한 장비는 부산에 도착해서 준비하면 될 것···."
"앗! 사장님 지금 바로 이동하면! 서울역에서 12시에 출발하는 KTX를 탈 수 있습니다!"
역시 삼합회 비서 출신!
일 처리가 시원시원할 정도로 빠르다!
천문석은 재빨리 배낭과 안전 상자를 메고 일어나며 폴리머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는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사무실을 잘 부탁합니다. 폴리머 사원."
"선배! 저도 출발하겠습니다. 사무실 잘 부탁드려요! 부사장님 헌터용 긴급 콜밴 불렀습니다! 2분 후 빌딩 앞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뛰어야 해요!"
“출발!”
천문석의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은 바로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다다다닥-
순식간에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천문석이 사무실에 들어오고 최설과 함께 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사무실에는 이제 폴리머 혼자만 남았다.
하아-
폴리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들이 김철수 사무실과 엮인 게 이세계 배송 의뢰였다.
이번에 최설이 신나서 달려간 의뢰도 이세계 배송 의뢰였다.
"...설마 이번에도 난장판이 되지는 않겠지?"
어쩐지 최설의 모습에 엠마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휑한 눈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돌아와 천문석 부사장의 목을 잡고 ‘야, 야!’ 거리던 엠마.
“....”
폴리머는 최설에게 행운을 빌어줬다.
그리고 결심했다.
엠마, 게릭, 클릭스 누구라도 휴가에서 돌아오는 즉시 연차를 모조리 붙여서 초장기 휴가를 가기로!
폴리머는 이 불길한 배송 의뢰가 끝나기 전까지는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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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신동대문에 생긴 지하 터널은 2구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신서울 - 신동대문 구간.
신동대문 - 고블린 평야 구간.
지하터널은 신동대문을 중심으로 신서울과 고블린 평야로 뻗어있었다.
[신서울 – 신동대문 – 고블린 평야]
세 지역은 모두 지하터널로 연결됐고, 지하터널에는 아직도 원리 규명이 안 된 공간 축약 마법까지 걸려있었다.
이제 신서울에서 출발한 차량은 24시간도 걸리지 않아 고블린 평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운송 혁명에 지하터널을 이용하는 헌터, 유통, 물류, 건설 업자의 수는 빠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화물차 한 대가 운송 혁명, 신동대문 지하 터널을 통과해 고블린 평야 북동쪽 병목 지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 화물차는 김철수 사무실의 복합 엔진 화물차였다.
구으으으응-
복합 엔진음과 은폐 마력장이 퍼져나가는 화물차 안,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그 위에 검은 마법사 로브를 걸친 남자가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휘휘, 휘이이이-
마수와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위험한 이세계가 아닌 마치 안전지대에서 드라이버라도 하는 듯한 가벼운 표정.
크아아앙-
들판 곳곳에서 마수의 포효가 울려 퍼지고.
쿵, 쿵, 콰지직-
멀리서 몬스터의 전투 소음이 들려왔다.
남자는 가벼운 표정으로 힐끗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수랑 몬스터도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나처럼 말이지. 에휴- 뭐 이리 사는 게 바쁘냐.”
부르르르-
이때 대시 보드에 놓인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게이트 거점 도시가 아니면 일반적인 무선통신이 불가능한 이세계.
하지만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면을 확인하고 스마트폰을 받았고.
“김과장?”
딸깍-
통화가 연결됐다.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추이린 연구원이 익명 배송업체에 넘긴 물품을 누군가 인수했습니다.
‘드디어!’
내심 환호성을 지른 남자는 재빨리 확인했다.
“혹시 미행하거나 감시하지는 않았겠지?”
=명령하신 대로 그룹 내 다른 직원들은 일절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물품 보관 업체 직원에게 인수 사실만 확인했습니다.
“추이린은 어디로 갔지?”
=서울역 광장에서 공중전화를 사용한 후에 서울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역에서 나오지 않은 거로 봐서는 KTX를 탄 거로 추정됩니다.
남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됐구나!’
이세계 배송 경주에서 추이린 연구원에게 마력 파동 발생장치를 보여준 보람이 있었다!
그때 보여준 마력 파동 발생장치는, 바램을 현실로 구현하는 힘, 하늘 고래의 념(念)을 동력원으로 이용해서 게이트를 열었다.
게이트 안정화를 넘어 게이트를 열 수 있는 마력 파동 발생장치!
그러나 여전히 게이트를 여는 데 필요한 동력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곧 해결된다.
추이린 수석 연구원이 그 ‘물건’을 완성했으니까!
가슴속에서 터질 듯한 희열이 차오른다.
이 시대!
이 순간!
수많은 우연이 겹친,
추이린만이 만들 수 있는 그 ‘물건’!
추이린은 자신이 만든 ‘물건’이 무엇인지,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 ‘물건’의 진가를 알면 미끼로 쓰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테니까!
남자는 힐끗 가슴 부분을 봤다.
재킷 안 포켓에 들어있을 오래된 가죽 수첩.
가죽 수첩에 적힌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원인과 결과, 인과.
수많은 원인이 맞물려 돌아가 마침내 ‘결과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건을 만들어낸 추이린.
-천운의 가호를 받는 헌터.
-W. S. 인더스트리의 이사.
모든 인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수첩에 적힌 장소.
부산 던전, 무한의 미궁으로!
그곳이 ‘결과’가 드러날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