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338화>
최설은 방금 전 일을 떠올렸다.
정신없이 서류 작업을 하던 중 문득 무언가 얼굴 아래로 흐르는 걸 느꼈다.
흠칫 놀란 순간.
툭, 투둑-
서류에 떨어지는 핏방울!
재빨리 코피를 막고 며칠 동안 계속된 서류 작업에 피곤한 몸을 일으켰을 때 사무실 풍경이 새삼스레 눈에 밟혔다.
“…….”
주위에 가득한 비품과 잡동사니, 성채 빌딩 안에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 엉망인 사무실!
이 사무실을 볼때마다 몇 번이나 속은 게 아닌지 의심했었다.
그때마다 엠마와 게릭, 클릭스, 폴리머 4명의 선배는 이야기했다.
김철수 사장님은 재금 그룹의 비밀 실세고, 천문석 부사장은 헌터 업계 최상층부에 엄청난 인맥을 지닌 사장의 최측근이라고!
그러면서 해 준 믿기지 않는 이야기.
암살검 한경석!
대인전 세계 랭커인 암살검이 천문석 부사장의 친구라고 했다!
처음에는 경악하면서도 납득했으나.
곧 이상한 게 하나둘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됐다.
-아무리 위장을 위해서라지만, 사무실 안에까지 비품과 잡동사니를 쌓아둘 필요가 있을까?
-큰 이익이 남지 않는 헌터업 관련 핸들링 의뢰를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가 한다고?
게다가 방금 처리하던 서류, 천문석 부사장이 신동대문에서 수행했던 의뢰도 말이 안 됐다.
고블린 마비독 수집 의뢰!
헌터 업계 최상부에 엄청난 인맥을 지닌, 암살검 한경석의 친구가 초짜 헌터나 하는 고블린 마비독 수집을 했다고!?
이건 오크 잡는데 철벽 이태성이 탱커를 서고, 나이트 아머가 딜러로 동원됐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말이 안 됐다.
그래서 방금 전 코피를 쏟은 최설은 결론을 내렸었다.
‘천문석. 그 사기꾼놈에게 속았다!’
최설은 참을 수 없는 짜증에 당장 상해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사무실을 나서려 했다.
이때 벌컥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최설 앞에 서 있었다.
너무나 낯익고 유명한 얼굴이!
“……!”
경악한 최설은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했다.
맞았다!
그 사람이다!
수없이 영상으로 봤던 그 사람!
하얀 번개, 추이린!
재금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
1세대 헌터이자 탑클래스의 마력 각성자!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최설이라고 합니다!”
최설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추이린은 사무실을 쓱 돌아보며 물었다.
“못 보던 얼굴이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지? 모두 퇴근했나?”
“지금 차례대로 여름 휴가를 돌리는 중이라. 김철수 사장님. 천문석 부사장님, 엠마, 게릭 사원은 휴가 중이고, 클릭스, 폴리머는 퇴근했습니다.”
“음…….”
추이린은 잠시 고심했다.
재금 그룹과 W.S. 인더스트리, 두 초거대기업이 조만간 만난다.
그때가 ‘오너의 정체‘를 파악할 최적의 기회였다.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이렇게 자리를 비우다니!
‘다른 녀석들을 움직여 볼까?’
문득 다른 헌터들이 생각났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처음 이 계획을 시작한 계기가 천문석과 김철수 둘이 ‘이세계 배송 경주‘에 참여했을 때 일어난 특이사항 때문이다.
대어를 낚으려면 마땅히 미끼도 커야 하는 법!
어차피 시간은 충분했다.
추이린은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달래며 최설에게 명함을 건넸다.
“천문석이나 김철수가 돌아오면 바로 전해 줘. 내가 찾아왔다고,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말이지.”
“네! 알겠습니다!”
최설은 바짝 긴장한 신병처럼 대답했다.
쿵-
그리고 추이린이 나간 사무실, 홀로 남은 최설은 손에 잡힌 명함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재금 연구소]
[추이린, 수석 연구원]
명함을 보는 순간 최설의 가슴속에 쌓였던 의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재금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이 직접 찾아왔다!
수석 연구원이면 연구소장 바로 밑!
재금 그룹 내에서도 이사급이다!
김철수 사장님은 진짜로 재금 그룹의 비밀 실세였다!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
어지간한 국가의 힘을 능가하는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재금 그룹의 실세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니!
최설은 깨달았다.
사기꾼에게 낚인 게 아니라 엄청난 기회를 손에 넣은 거다!
이때 문득 보이는 벽에 붙어 있는 우수사원 사진들.
그동안 어이없어했던 ‘우수사원‘이란 호칭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김철수 사장님이 직접 사진을 붙이고 우수사원이란 명칭까지 만들었다.
작은 헌터업 사무실의 사장이 아닌,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가 말이다!
이제야 4명의 선배 헌터들이 우수사원 표창과 대리 승진에 왜 그렇게 목을 맸는지 이해가 됐다.
키즈카페는 핑계일 뿐!
진짜 목적은 사장과 부사장 두 사람에게 잘 보이는 거였다!
이 순간 최설의 눈이 빛났다.
김철수 사장.
천문석 부사장.
두 사람의 신임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두 사람과 꽌시(關係)를 맺는다는 것이다.
헌터 군벌과 국가안전부.
패권국인 미국조차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의 사람과!
최설은 결심했다.
우수사원을 넘어, 대리 승진까지 반드시 내가 해낸다!
짐을 싸서 상해로 돌아가려던 최설은 더 이상 없었다.
엠마와 게릭, 클릭스와 폴리머.
대리 승진에 목을 매는 4명의 직원과 마찬가지로 눈에서 열망이 이글거리는 최설이 있었다.
이때 최설은 문득 창밖을 봤다.
창문 너머에는 노을에 물든 광화문 게이트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문득 노을과 바다, 모래와 바람을 너무나 좋아했던 친구가 생각났다.
진교은.
여리여리한 외모, 사근사근한 목소리.
가늘고 긴 손가락, 반달을 그리는 눈썹과 선한 눈을 가진.
사기 도박꾼!
평생 거짓말 한 번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외모와 달리.
진교은은 능숙한 말솜씨로 순식간에 사람을 홀리고, 신기에 달한 도박 솜씨로 앗 하는 사이에 털어먹는다.
진교은은 누군가의 호감을 사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무서운 건 진교은은 언제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호감을 산다는 것!
교은이 걔만 여기 있었으면 순식간에 호감을 살 수 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진교은에게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몇 달 전 신동대문으로 출발하면서다.
‘지금이라도 전화해 볼까!?’
문득 생각한 최설은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고 나중에!
완전한 신임을 받은 후에 연락한다!
자신이 먼저 김철수와 천문석 두 사람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
최설은 머리를 질끈 묶고 서류 더미를 책상 위에 착착 쌓았다.
삼합회 상해 지단의 비서였을 때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새로운 거래처를 뚫는다!
이렇게 최설이 광화문 사무실에서 의욕이 폭발했을 때, 같은 시각 제주도의 천문석은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설의 친구, 진교은이 준비한 ‘카지노 나이트’에 가기 위해서.
* * *
“철수 형. 진짜 안 갈 겁니까? 1000$라니까요! 천 달러!”
천문석이 카드를 흔들며 외치자 김철수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가고 싶은데…… 선약이 있어.”
“철수 형이 제주도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너도 아는 사람이야.”
김철수는 거실 방향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세연이 사촌…….”
김철수가 힘없이 말하는 순간.
천문석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류세연의 사촌 언니 강화영, 철수 형과 어제 맞선을 본 사람이다!
두 사람의 연애사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천문석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김철수의 어깨를 툭 쳤다.
“흐흐흐- 철수 형. 혹시 다음 달에 막 그 카드 주고 그런 거 아닙니까?”
“뭐? 무슨 카드…… 아!”
반문하던 김철수는 카드의 의미를 깨닫고 바로 외쳤다.
“야, 그런 거 아냐!”
김철수는 부인했지만, 대학 선배들도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어느 순간 청첩장을 내밀었었다.
철수 형의 연애사를 방해할 수는 없는 법!
천문석은 초대장을 챙겨 방에서 나가며 말했다.
“그럼 전 카지노 갔다 올게요. 대박 쳐서 올 테니까 철수 형 기대하십쇼! 카캬카-.”
“너 그렇게 입고 가려고?”
“네? 뭐가요?”
반팔에 티셔츠 하나 걸친 천문석이 의아해하자, 김철수는 혀를 차며 자신이 입고 왔던 정장을 내밀었다.
“이 정장 입고가. 선상 카지노라며? 드레스 코드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
천문석이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가려 할 때, 김철수는 다시 천문석을 잡고 손을 내밀었다.
“밑에 계단에 꼬맹이 대기 중이다. 창으로 빠져나가. 이거 가져가고.”
김철수의 손에 들려 있는 자동차 열쇠와 카드.
“웬 열쇠랑 카드예요?”
“아까 여사님이 몰래 쥐여 주시더라. 너 전해 주라고. 그런데 카드는 내 생각에는 신중히 써야 할 거 같아.”
“네?”
천문석은 카드를 보는 순간 철수 형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family card]
조금 전과는 반대의 상황.
김철수는 똑같은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천문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문석아. 여사님은 이미 너를 ‘가족‘으로 생각하시나 봐. 또 하나의 가족이 아니라, 진짜 ‘가족‘말야. 흐흐흐-.”
“…….”
천문석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창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소리 없이 마당을 지나 담으로 다가갔다.
이때 마루 계단에서 들려오는 씩씩한 목소리.
“알바! 아직 멀었어!? 왜 이리 오래 걸려! 한국 사람은 빨리빨리 몰라!”
벌써 옷을 갈아입고 감귤을 따고 받은 동전이 가득 담긴 지갑을 들고 있는 특급 헌터.
특급 헌터는 자신도 당연히 카지노에 같이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꼬맹이를 카지노에 데려가다니 안될 말!
천문석은 특급 헌터를 향해 마음속으로 말했다.
‘특급 헌터. 이 1000$는 내가 몇 배로 불려서 가져다주마!’
천문석은 명절날 조카의 세뱃돈으로 가족 화투 승부에 참가하는 삼촌처럼 말하고는, 단숨에 담을 넘어 차를 몰고 카지노로 출발했다!
부으으응-
그리고 한참 후.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특급 헌터는 계단을 올라 2층 방문을 벌컥 열고 알게 됐다.
알바가 혼자 카지노에 갔다!
“으앗! 알바! 알바가 없잖아! 할머니! 엄청 큰일이야!”
특급 헌터는 단숨에 계단을 내려 와 외쳤다.
“할머니! 알바가 혼자 카지노 갔어! 나도 카지노 엄청 가고 싶었는데!”
임옥분 여사는 옷을 다 차려입은 특급 헌터를 번쩍 들고 말했다.
“우리 강아지는 할머니랑 더 재밌는 거 하자.”
“더 재밌는 거?”
“세연아 담요 깔아라.”
“할머니! 이번에는 내가 다 따갈 거야!”
류세연은 대청마루에 담요를 깔면서 눈을 빛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다!
오늘 밤 할머니와의 승부에서 건물을 가져온다!
천문석이 카지노에 대결하러 가는 이때, 류세연과 임옥분 여사, 특급 헌터 세 사람도 마루에 깔린 담요를 가운데 두고 앉았다.
그리고 승부가 시작되는 순간.
휘이이잉-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다람쥐 한 마리가 저택 지붕을 달려 노을 지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휘이이잉-
바람을 타고 단숨에 하늘 높이 날아오른 새끼 다람쥐 니케.
니케는 바다를 건너 이 섬까지 분노와 복수를 노래하며 날아왔다.
그런데 복수를 하기는커녕 폭풍 같은 딱밤을 맞고.
부하 1, 2호 사슴벌레, 풍뎅이보다도 서열이 하락했다.
-……
이제 자신의 밑에 부하는 없었다.
오래전 보육원을 나와 나무뿌리 아래 축축하고 햇볕도 잘 들지 않던 굴에서 살 때처럼 낮은 나무 다람쥐가 됐다.
킥…… -
니케는 힘없이 울며 바람을 타고 목적 없이 제주도의 하늘을 날았다.
이때 문득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
킥, 키키킥-!?
순간 멍한 눈에 빛이 돌아오고, 목소리에 힘이 돌아왔다!
니케의 눈이 재빨리 지상을 훑어 섬뜩한 감각이 느껴지는 곳을 찾았다.
키킥킼-!
‘저기다!’
니케는 날개를 접고 뚝- 떨어져 내렸다.
파아아아앙-
떨어지는 화살처럼 대기를 가르고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니케!
곧 계곡에 걸쳐 있는 넓은 숲이 나타났다.
니케는 단숨에 숲으로 들어가며 날개를 펼쳤다.
파바바밧-
무성한 나뭇잎과 가지를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며 활강!
마침내 니케가 느꼈던 섬뜩한 감각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게 마수!
커다란 바위 옆에 작은 바위로 의태(擬態)한 게 마수가 있었다!
키키킼, 킼킼키킼-!
니케는 신나게 울면서 게 마수의 몸에 탁- 내려앉았다.
그러나 커다란 게 마수는 작은 새끼 다람쥐가 내려앉았다는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킥키키킥-!
‘멍청한 녀석!’
니케는 오늘 하루 쌓인 모든 울분을 담아 게 마수를 물었다!
파아아앙-
게 마수는 단숨에 뒤집혀 폭발하듯 게 거품을 쏟아 내고, 거대한 집게발을 펼친 채 경련했다.
단숨에 무력화된 게 마수!
킥, 키키키킥-
‘통한다! 제대로 통하고 있다!’
번쩍 고개를 든 니케의 두 눈에서 자신감 가득한 황금빛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니케는 단숨에 나무를 타고 올라 펄쩍 뛰었다.
휘이이이잉-
다시 한 번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니케!
니케의 황금빛 줄무늬가 명멸하고, 이 커다란 섬 곳곳에 흩어진 마수와 몬스터들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키키키킼키키키킼-!
‘내 분노의 제물이 되어라!’
온종일 딱밤을 맞은 폭군은 제주도 위를 활강하며 숨어 있는 마수와 몬스터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파아아앙, 탁-
번개같이 활강해, 무는 매 순간!
크아아아아앙-
마수와 몬스터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이 순간 복수의 다람쥐가 된 니케는 분노를 노래하였다!
킥킼키키킼-!
‘다 아파하는데!’
키키키킼킼키-!
‘이렇게 아파하는데!’
키키키키키킼킼-!?
‘왜! 그 이상한 꼬맹이만 안 되는 거야!?’
한라산과 해안의 곳곳으로 스며든 마수와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제주도 곳곳에서 터지고.
마수와 몬스터를 정밀 수색 중이던 064 헌터 부대와 경찰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014 섹터! 게 마수 등장!”
“033 섹터! 어인 몬스터 무리 등장!”
“타격대 바로 출동한다! 시민들이 놀라지 않게 신속하게 처리한다!”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부으으응-
부으으응-
수십 대의 장갑 차량과 트럭, 무장한 헌터 부대 병력과 경찰 타격대가 움직였다.
이렇게 제주도 곳곳에 숨어든 마수와 몬스터가 처리되고 있을 때.
천문석은 카지노 호텔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