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336화>
불과 하루 전에 거대 괴수가 나타났는데도 제주 국제공항은 붐비고 있었다.
관광객 사이에 평소에는 보기 힘들었던 보안업체 직원, 고등급 헌터, 외국인들이 잔뜩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붐비는 제주 국제공항에 김포발 비행기가 도착했다.
일등석과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이 내리고,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이 게이트에서 나왔다.
이 승객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요란한 검은색 하와이얀 셔츠에 반바지, 삼선 슬리퍼.
한쪽 어깨에 배낭을 메고 싸구려 선글라스를 쓴 청년.
이태성이었다.
탁, 탁, 탁-
이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공항에 울려 퍼졌다.
인이어 통신기를 낀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
겉모습만으로도 보안업체 직원임을 알아볼 수 있는 남녀가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빠르게 훑었다.
이때 한 직원의 시선이 이태성의 몸에 머물렀다가 바로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대화 소리.
“3번 게이트 승객들 모두 확인했습니다.”
“2번 게이트는?”
“……방금 비즈니스 클래스까지 확인이 끝났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코노미 클래스도 확인하도록 할까요?”
“됐다. 타겟이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고 움직일 리 없다. 다음 비행기에 집중한다.”
보안업체 직원들이 일제히 다음 비행기 탑승객이 내리는 게이트를 향해 움직였다.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고등급 헌터.
절박한 얼굴의 외국인들.
기대감 어린 얼굴로 사진기를 든 기자까지.
수많은 사람이 다음 비행기가 내리는 게이트로 달려갔다.
그리고 이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빛바랜 사진이 들려 있었다.
이태성은 사진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봤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으로 추적이 불가능한 보안 사진.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 사진이다!
자신의 사진을 들고 공항을 달리는 사람들.
이태성은 이들의 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안업체 직원들은 의뢰를 받아 움직이는 걸 테고.
고등급 헌터는 어떻게든 친분을 쌓아 보려 기웃거리는 거다.
절박한 얼굴의 외국인들은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사람들.
사진기를 든 기자들은 어떻게든 사진을 찍어 대박을 내려는 생각이겠지.
이태성의 현재 사진도 아닌 고등학교 사진이 찍힌 졸업 앨범의 역경매 가격이 10억 원대!
현재 이태성의 사진을 찍는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터지는 거다.
이태성은 이들이 들고 있는 졸업 앨범 사진을 보며 탄식했다.
“하, 시바. 어떻게 된 게 저 사진은 없앨 수가 없네! 그때 사진을 찍지 않는 건데!”
졸업 앨범이 나오는 족족 사들이고,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를 동원해 추적, 매입하거나 폐기 처분했는데…….
얼마 전부터 어떤 미친놈이 졸업 앨범 사진을 복사해서 팔기 시작했다!
동그란 뿔테 안경.
삐쭉 삐죽 솟은 머리카락.
얼굴 반을 덮은 눈그늘과 졸린 눈.
보는 순간 게임 폐인이란 걸 알 수 있는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도대체 어떤 새끼지?’
이태성은 보안업체 직원들과 헌터, 외국인들과 기자, 관광객 사이를 성큼성큼 걸으며 용의자를 생각했다.
한국에서 자신에게 대놓고 이런 짓을 할 놈은 거의 없었다.
용의자는 1세대 헌터들.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뿐이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곰 같은 육체, 고슴도치같이 뾰족한 수염.
철거 용역처럼 오함마를 무기로 쓰는 녀석.
강철해머, 장철.
동갑내기 친구이자, 오래전 레이드 경쟁 상대였던 그놈!
그러나 장철은 기계치였다.
게임이나 간신히 할 뿐, 추적이 불가능한 보안 사진 같은 걸 생각해 낼 놈이 아니다.
게다가 장철이 자신의 사진을 팔 리도 없었다.
장철의 동생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엄청난 부자고 사적 제재에 거리낌이 없지만,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하, 시바- 도대체 어떤 새끼지?”
어느새 공항 밖으로 나온 이태성이 답답함에 혼잣말을 할 때.
“여기예요!”
먼저 제주도에 도착한 비서가 외쳤다.
비서는 청바지에 운동화와 셔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경차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태성은 익숙하게 경차 조수석 탔고, 비서는 운전석에 앉아 바로 차를 몰았다.
“뭐야 쟤네들은?”
이태성은 멀어지는 공항을 가리키며 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비서는 바로 알아들었다.
입국 게이트 앞에 쫙 깔린 사람들!
공항에 내리자마자 자신이 옷을 갈아입은 이유이기도 했다.
“어디서 샜는지. 길드장님이 제주도로 온다는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길드, 기업, NGO, 난민, 국가…… 여러 곳에서 길드장님의 동선을 확인하려 하고 있습니다. 확인된 목적은…….”
비서는 기억을 되살려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인수 제안, 고용 계약, 부산물 계약, 인도적 지원, 마수 퇴치, 마경 정리 의뢰…….”
이태성은 손을 들어 비서의 말을 끊었다.
“그런 거 말고 평소와 다른 특이 사항은 없어?”
“NGO 단체 중 한 곳에서 특이한 요청을 했습니다. 옐로스톤에 외계인 집단이 미군에 의해 억류 중이라고. 외계인 구조작전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외계인? 게이트가 열린 지 20년이 넘었는데 무슨 외계인이야. 개방형 던전 들어가면 바로 만날 수 있는 게 이계인들인데.”
“개방형 던전은 비밀이잖아요. 그리고 던전이 아니라 차원 이동이란 논란도 있고요.”
“뭐 그렇긴 하지. 하아-.”
이태성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보안 사진 유통하는 범인은 아직 못 찾았고?”
“네. 외부에서 초빙한 사이코메트리 능력자들도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보안팀에선 결제 수단 쪽을 훑고 있는데. 아직 꼬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툭, 툭, 툭-
이태성은 무릎을 손으로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비서는 잠시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시하는 눈이 많아지고, 사진도 돌고 있는데, 계획을 뒤로 미루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태성 길드장은 타겟의 정체를 말해 주지 않았지만, 비서는 이미 타겟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현대 고등학교 임시 교사, 이세영.
이태성 길드장이 수십억을 쓰면서까지 영입하려는 인물이 평범한 고등학교 선생일 리는 없었다.
타겟의 정체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가 맞는다면,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의 후폭풍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나 이태성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 피식 웃었다.
돌아다니는 자신의 사진은 20년 전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실린 사진뿐.
지금 자신의 얼굴을 아는 건 전체 헌터 중에서도 극소수인 1세대 헌터뿐이다.
방금 공항에서처럼 대놓고 다녀도 알아볼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세영도 각성력 남용으로 급격히 노화가 진행되어 얼굴을 알아볼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됐어. 계획대로 진행한다. 언제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어. 그보다 타겟이 탄 크루즈 선은 어디쯤 왔지?”
비서는 태블릿을 이태성에게 건넸다.
“완도항에 정박하지 않고 바로 지나쳤습니다. 오늘 저녁쯤에 제주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장소는 섭외됐나?”
“네. 괜찮은 브로커를 구했습니다. 뒷정리가 깔끔한 거로 유명한 사람인데. 자잘한 일까지 모두 해 주는 조건으로 계약했습니다. 섭외한 호텔은 이곳입니다.”
비서가 태블릿 화면의 아이콘을 터치하자.
해변을 내려다보는 호텔과 해변에 정박한 커다란 유람선이 화면에 나타났다.
“호텔과 카지노 유람선이 합쳐진 카지노 호텔인데…… 마침 오늘 밤에 이 카지노 유람선이 출발 예정입니다.”
“카지노 유람선이라고?”
“네. 이 호텔의 명물인데. 제주도 근해를 돌며 밤새 선상에서 카지노를 즐기고 호텔로 돌아오는 카지노 유람선입니다.”
이태성은 눈을 빛냈다.
“타겟을 그 유람선에 싣자는 말이지?”
“네. 이미 브로커에게 계획을 말해 뒀습니다. 타겟은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오늘 밤 그 카지노 유람선을 타게 될 겁니다.”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 바다 위 유람선에 있다면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리라!
기대 이상의 장소를 섭외했다!
“잘했어! 바로 호텔로 가지.”
오늘은 긴 밤이 될 것이다. 미리 든든히 먹고 잠을 자고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했다.
좌석을 뒤로 밀고 몸을 기울이던 이태성은 문득 든 생각에 물었다.
“이 호텔 이름이 뭐라고?”
비서는 태블릿 위쪽 홍보 영상을 터치했다.
[…… 제주 삼합 카지노 호텔! 카지노 유람선에서의 환상적인 밤! ‘카지노 나이트’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합 카지노 호텔입니다. 카지노 유람선이 제주도 근해를 도는 이 파티를 ‘카지노 나이트’라고 한다네요.”
“삼합 카지노 호텔. 카지노 나이트.”
이태성은 눈을 빛냈다.
이곳이 오늘 밤의 승부처였다!
* * *
이얍, 얍얍얍!
쓱쓱, 쓱쓱쓱-
특급 헌터의 기합이 울려 퍼지고 양손이 엄청난 속도로 원을 그렸다.
이와 동시에 등에 퍼져 나가는 화하면서도 싸한 감각!
“으아아- 시원하다!”
마루에 엎드린 천문석이 탄성을 터트리자, 양손에 물파스를 든 특급 헌터가 외쳤다!
“알바!? 이제 괜찮아!? 할머니가 왜 알바 등짝을 때렸을까!? 물썰매 타기 엄청 재밌었는데!? 이상하잖아! 내가 가서 할머니한테 다시 잘 설명하고 올까?”
“…….”
천문석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특급 헌터는 범행 사실과 누가 주범인지를 모두 자백해놓고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러나 특급 헌터는 임옥분 여사님의 등짝 스매시를 몸으로 막으려던 의리 있는 꼬맹이었다.
그래서 천문석은 외쳤다.
“여기에 배신자가 있기 때문이지!”
“뭐!? 배신자가 있다고!?”
특급 헌터가 깜짝 놀란 순간.
천문석의 분노가 담긴 손가락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류세연!
“설마! 세연! 세연 누나가 배신자였어!?”
특급 헌터가 양손에 든 물파스를 흔들며 경악할 때, 류세연이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대답했다.
“오해야! 나도 중간에 할머니 만날 줄 몰랐다니까!? 원래 내 계획은 그냥 수로로 가서 이거 쏘는 거였어!”
류세연이 내민 손에는 폭죽이 들려 있었다.
“와, 와! 와!”
엎드린 천문석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연신 탄식했고.
탄식이 터질 때마다 류세연의 어깨는 축축 늘어졌다.
“미안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야, 그 폭죽에 뭐라고 쓰여 있어!?”
“뭐……?”
류세연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특급 헌터가 재빨리 폭죽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1세트 5천원…….”
“아니, 그거 말고 옆에.”
“사람에게 쏘지 마세요. 이거?”
탕-
순간 천문석은 마루를 때리며 외쳤다.
“맞아 그거! 이런 어이없는 녀석! 위험하게 사람에게 폭죽을 쏘려고 했다니!”
“……지금 뭐라고?”
“앗! 맞아! 폭죽은 사람한테 쏘면 안 돼!”
류세연이 어이없어하고, 특급 헌터가 깜짝 놀랄 때.
천문석은 특급 헌터에게 지시했다.
“특급 헌터! 빨리 할머니한테 가서 보고해!”
“할머니!”
양손에 물파스를 든 채로 번개같이 주방으로 달려가는 특급 헌터!
“어, 어어! 어어어!?”
돌발 상황에 말문이 막힌 류세연이 엎드린 천문석과 달려가는 특급 헌터를 손가락질하는 순간.
쿵-
주방에서 요리 중이던 임옥분 여사가 마루에 등장했다.
쿵, 쿵, 쿵-
그리고 말없이 류세연에게 걸어왔다.
“……할머니?”
류세연이 당황한 얼굴을 들자, 임옥분 여사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