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76화>
신라호텔 레스토랑, 서빙 직원이 테이블에 놓인 식기를 치우며 말했다.
“디저트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김철수와 강화영, 천문석과 류세연.
네 사람은 식사에 와인까지 한잔했다.
포만감과 약간의 취기.
대화에 공백이 생기고 분위기가 늘어졌다.
‘지금이다!’
마음의 결심을 한 김철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영씨. 잠시 제가 드릴 말이 있는데.”
류세연은 천문석의 팔을 슬쩍 건들며 말했다.
“우리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오자.”
분위기를 읽은 천문석은 바로 류세연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두 분 편히 말씀 나누세요.”
천문석과 류세연이 룸 밖으로 나가고, 테이블에는 김철수와 강화영 두 사람만 남았다.
“할 말이 뭔데요?”
강화영이 은근한 기대를 담아 묻는 순간.
김철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겨우 둘만 남았다.
드디어 이 해프닝을 끝낼 수 있다!
김철수는 바로 입을 열었다.
“저…….”
“네.”
그러나 웃고 있는 강화영을 보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톡-
이 순간 김철수의 손에 수줍게 와 닿는 손.
강화영이 손가락을 하나 뻗어 김철수의 손등에 올리고 수줍게 웃었다.
“철수 씨?”
“…….”
김철수는 고심했다.
뭐라고 말해야 원만하고 좋게, 가능한 상처를 주지 않고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 일은 원만하고 좋게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호 그룹 김호천 회장님의 지시를 받아 천호 유통의 이은혜 사모님이 거짓말을 했을 때부터 이 일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이 거짓말에 자신도 참여하거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사실을 밝히고 발을 빼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할 선택은 이미 정해졌다.
지금은 직설적으로 사실을 밝히는 게 이번 일의 두 피해자 자신과 강화영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김철수는 심호흡하고 말했다.
“저 사실 양자입니다.”
“네?”
강화영이 얼빠진 얼굴로 반문할 때, 김철수는 정확히 사실을 밝혔다.
“천호 유통 김 사장님은 제 친부가 아니십니다. 전 어렸을 때 천호 그룹에 들어온 양자입니다.”
“……사업을 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천호 그룹과는 상관이 없는 사업입니다. 아니 사업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직원 10명도 안 되는 작은 헌터업 사무실을 운영 중입니다.”
“저 그럼……?”
당황한 강화영이 무언가 물으려다가 멈칫 김철수의 눈치를 봤다.
김철수는 강화영이 하려던 질문이 짐작이 갔다.
묻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되는 민감한 질문들.
그러나 강화영은 이번 일의 피해자.
김철수는 강화영이 차마 묻지 못한 민감한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했다.
“서자 아닙니다.”
“천호 그룹과 저는 혈연으로 전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보육원에서 양자로 들어왔고 호적에도 올랐었지만.”
“사실상 5년 전에 파양됐고, 지금은 호적도 모두 정리한 상태입니다.”
“이은혜 천호 유통 사모님은 어제 오후에 몇 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제겐 천호 그룹의 지분 도 없고, 나중에 법정 상속분을 주장할 여지도 전혀 없습니다.”
“…….”
강화영이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을 때.
김철수는 잠시 주저하다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이은혜 사모님께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천호 그룹에 제자리는 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김철수가 일어나서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순간.
강화영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철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자신이 속인 것은 아니지만, 눈앞의 강화영 입장에서는 자신도 천호 그룹과 공범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물벼락이 쏟아지고 따귀가 날아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때 생각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
‘응……?’
슬쩍 고개를 드니 당장이라도 터질 듯 눈물이 글썽글썽한 강화영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왜 울려고 그래!’
김철수는 당황했다.
물벼락, 커피벼락, 따귀!
예상했던 그 무엇과도 달랐다.
20대 중반.
완벽한 맞선 복장을 차려입은 강화영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아이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으아, 으아아-
“어떻게…… 세연이 보기에 창피해서 어떻게 해……!”
이 순간 김철수는 다급히 외쳤다.
“잠시만! 울지 마세요!”
“……?”
강화영이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순간, 김철수는 입에서 나오는 데로 외쳤다.
“사실 지금 제일 불쌍한 건 접니다!”
“네?”
“울어야 할 건 저라고요!”
김철수의 외침을 듣는 순간, 울먹이던 강화영이 분통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감쪽같이 속여놓고는!?”
“네? 아니 솔직히 제가 감쪽같지는 않았는데…….”
‘아차, 이게 아니지!’
김철수는 재빨리 본래 논지로 돌아와 외쳤다.
“사실 저도 피해자입니다!
“네?”
강화영이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보는 순간.
김철수는 깨달았다.
‘지금이다!’
천문석에게 당했던 것처럼 강화영의 혼을 쏙 빼놔야 했다!
“화영씨 생각해 보세요!”
“……?”
“전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천호 그룹에 입양된 거뿐이에요!”
“철수는 제 원래 이름도 아닙니다!”
“입양해서 이름까지 바꿔놓고는 갑자기 파양했다니까요!”
“5년 전, 호적 정리까지 당한 후에 알아서 혼자서 잘 살았는데.”
“갑자기 며칠 전에 연락 와서 맞선에 나가라고 명령했다니까요!”
“가뜩이나 직원들 월급, 상여, 휴가비 모두 줘서 돈도 없는데!”
“물가가 더럽게 비싼 성수기 제주도행 비행기 표도 제 돈으로 사고!”
“하룻밤 20만원! 우리 집 월세 1/2인 민박집에 머물렀어요!”
“게다가 어제는 흑돼지구이 먹으러 갔는데!”
“웨이팅만 2시간에 너무 비싸서 2인분밖에 못 먹었습니다!”
“아니, 흑돼지 200g 1인분에 89,000원인데!?”
“인간적으로 공기밥 3000원까지 따로 받는 건 아니지 않나요? 이게 말이 되나요!”
처음 시작은 강화영의 혼을 쏙 빼놔서 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말을 쏟아 내다 보니 어째선지 김철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더럽게 비싼 성수기 제주도 물가!
더럽게 치사한 천호 그룹 사람들!
‘젠장, 있는 놈들이 더 하다더니! 뭔 재벌이 이렇게 치사해!’
비행기값, 민박집 숙박비용, 식대 모두 자신이 부담했다!
이은혜 사모님은 오늘 맞선 자리에서의 적극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제 자신과 만났을 때는 이번 일이 잘돼도 그만 안 되도 그만이란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 태도만 봐도 천호 그룹 내부의 복잡한 사정과 이번 일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천호 그룹 김호천 회장의 후손들 간 후계 경쟁이 치열해지며 오래전 파양된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튄 것이다!
‘하! 진짜 철수 아저씨만 아니면! 그냥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연을 끊어 버리는 건데! 이 아저씨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김철수는 내심 분통을 터트리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어느새 울먹임을 그치고 눈을 동그랗게 뜬 당황한 강화영이 보였다.
강화영은 피해자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강화영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것.
그래서 김철수는 다시 한 번 현실을 강조했다.
“이제 잘 아시겠죠? 전 파양된 양자입니다!”
“저…….”
강화영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김철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가 제일 불쌍하고! 제가 제일 슬픈 사람입니다!”
“네?”
“그러니까 제 앞에서 울지 마시고, 화도 저한테 내시면 안 됩니다!”
“…….”
“개인적으로는 천호 그룹에 따지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 사람들 체면을 중시하니까. 강하게 항의하면 받아 낼 게 있을 겁니다!”
“…….”
강화영은 말문이 턱 막힌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하- 이번 위기도 어떻게 잘 넘겼구나!’
김철수가 내심 흡족하게 웃을 때.
후드득-
갑자기 강화영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
‘아니, 이게 뭐야!? 잘 해결됐는데 갑자기 왜 울어!’
“그게 뭐예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여기 나왔는데!”
으아아앙-
강화영은 아이처럼 엉엉 울며 몸을 돌려 달렸다.
그리고 레스토랑 문을 여는 순간.
앗-
꺄아앗-
문에 기대있던 두 사람이 깜짝 놀라 외쳤다.
천문석이 번개같이 몸을 피하고, 류세연이 문 안으로 쓰러졌다.
눈물을 줄줄 쏟아 내던 강화영은 류세연을 보는 순간, 돌처럼 우뚝 굳었다가 곧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으아아아-
강화영은 얼굴을 가리고 문밖으로 달려가 버렸다.
“언니! 잠깐만 언니! 오빠. 여기 좀 부탁해!”
류세연은 천문석의 팔을 툭 치고 강화영을 따라 달렸다.
얄미운 언니지만,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제 방 안에는 이제 천문석과 김철수만 남았다.
“…….”
“…….”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뻘쭘하게 바라봤다.
한참 후 김철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 들었지?”
“네.”
하아-
김철수가 깊은 한숨을 내쉴 때, 천문석은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철수 형은 천호 그룹의 재벌 3세가 아니라 입양됐다가 파양된 양자였다.
.”…….”
만약 자신이 같은 일을 겪었다면 씨익 한번 웃고 그냥 훌훌 털어 버렸을 것이다.
고아가 되고 양자가 되고, 파양을 당하고, 다시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이용당했다.
하나하나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진 천문석에겐 낯설지 않은 사연이기도 했다.
산속의 버려진 사당에서 어린 동생들과 살던 그 시절.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돌다가 산속 버려진 사당에 모여든 어린아이들 한 명 한 명 모두가 너무나 가슴 아프고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이름조차 없이 석(石), 돌멩이라 불린 자신과 어렸을 때부터 비범했던 이세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신이 아주 크게 아파했다고.
타인의 고통과 슬픔이 아무것도 아닌 것, 견딜만한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누구나 삶은 하나이기에 자신의 삶이 가장 애달프고, 고통스럽고, 아픈 법이다.
“…….”
그래서 천문석은 지금 철수 형에게 뭐라 위로할 수가 없었다.
김철수, 철수 형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해도.
자신은 고아였다가 입양되고 파양된 철수 형 본인이 아니었으니까.
이때 김철수는 문득 고개를 들고 웃었다.
“미안하다. 문석아.”
철수 형의 웃음을 본 천문석은 같은 웃음을 지었다.
김철수 강철 같은 철수 형은, 어느새 모든걸 털어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듯 가볍게 웃고 있었다.
웃음에는 웃음으로, 가벼움에는 마찬가지로 가벼움으로.
천문석은 철수 형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대답했다.
“됐어요. 철수 형. 뭐 그런 거로 사과를 해요.”
“그렇지? 이게 사실 내가 사과할 일은 아니잖아?”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맞아! 이런 경우에는 재벌 3세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사기라니까! 그렇지 않냐?”
천문석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재벌 3세라고 말하는 게 오히려 사기 치는 거죠! 그래도 좀 아쉽네요. 흐흐흐-.”
천문석이 음흉하게 웃는 순간.
김철수는 미소 지었다.
듣지 않아도 눈앞의 천문석, 오랜 알바 동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었다.
“왜? 재벌 3세 꿀을 못 빨아서?”
이심전심.
천문석과 김철수,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흐-
카카카-
똑, 똑, 똑-
이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천문석이 대답하자 조용히 문이 열리고 레스토랑 직원이 나타났다.
“저…… 디저트 내와도 괜찮을까요?”
직원은 방안의 심상치 않은 상황을 눈치챈 듯 조심스레 말했다.
이 순간 천문석과 김철수는 눈이 마주쳤다.
1인당 30만원짜리 호텔 레스토랑 코스 요리의 마지막, 디저트.
디저트가 남아 있었다!
“철수 형. 이건 먹어야겠죠?”
“당연하지! 우리가 음식 남기고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천문석은 씨익 웃으며 당당히 요구했다.
“여기 각자 디저트 2개씩 놔주세요.”
곧 천문석과 김철수 앞에 류세연과 강화영의 몫까지 디저트 2개씩이 놓였다.
수많은 사건·사고와 고난을 헤쳐나온 두 사람에게는 오늘 일 또한 작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
화학 공장 하수관의 슬러지를 깨다가 기절하고.
축제에서 생맥주를 팔다가 상인회를 피해 도망가고.
키즈카페의 악마 같은 꼬맹이들과 놀아줬던 일들과 다를 것 하나 없었다.
몸과 마음.
어디가 힘드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 정도 해프닝은 삶의 매 순간 찾아온다.
그렇기에 천문석과 김철수는 평소처럼 작은 스푼을 들었다.
모든 일은 끝이 좋아야 하는 법!
두 사람은 코스 요리의 마지막, 디저트를 먹으며 이번 해프닝의 마무리를 지었다.
과일이 박혀 있는 푸딩을 먹는 순간 김철수와 천문석은 감탄했다.
“역시, 30만원짜리 코스 요리! 문석아! 이 푸딩 300원짜리랑은 완전 다르지 않냐?”
“가격을 들어서 그런지 10배는 맛있는 기분입니다! 철수 형!”
흐흐흐-
카캬카-
천문석과 김철수는 평소처럼 신나게 웃으며 푸딩 2개씩을 깔끔하게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레스토랑을 나가다가 데스크에서 붙잡혔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손님.”
“네?”
“계산이요?”
천문석과 김철수가 얼빠진 표정으로 묻는 순간, 데스크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분명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여름 특선, 난 코스 4인분에 한정식 요리 추가. 그리고 와인 9잔. 봉사료까지 포함해서…… 1,936,000원입니다.”
“……얼마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