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74화>
“안녕하세요. 최 여사님.”
“다시 만나 반갑네요. 이 여사님.”
김철수의 어머니 이은혜와 강화영의 어머니 최현미는 간단한 인사 후 각자의 자녀를 소개했다.
“이쪽이 제 장남 김철수예요. 얘가 아버지랑 똑같아요. 사업에 바빠서 이런 자리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요. 미리 사과드릴게요.”
“아니에요. 이 여사님. 20대에 벌써 창업에 성공해 자기 사업을 운영하려면. 다른 곳에 눈 돌릴 틈이 없었을 거예요.”
강화영의 어머니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딸을 소개했다.
“이쪽이 제 딸 강화영이에요. 유학을 다녀와서 지금은 석철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어요.”
“석철 미술관이면, 재금 재단의 미술관 아닌가요?”
깜짝 놀란 김철수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화영의 어머니.
“네 그곳 맞아요. 세계 각국에서 대금 대신 받은 문화재를 보관하는 곳이죠.”
“그럼 혹시 재금 재단과도 친분이……?”
김철수의 어머니가 앞으로 몸을 숙이며 은밀히 묻자,
강화영의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단 이사님을 몇 번 만나 뵌 적이 있어요.”
“그렇군요!”
재금 재단의 이사면 어지간한 그룹 총수 이상의 힘을 지녔다.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던 김철수의 어머니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애 사무실이 있는 빌딩이 그 미술관에서 가깝네요.”
“네? 그럼 사무실이 광화문에 있다는 건가요? 혹시 성채 빌딩에?”
김철수의 어머니는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김철수를 봤다.
“네 맞아요. 그 성채 빌딩 이름이 아마 재금 빌딩이라고 했지?”
“…….”
김철수가 뭐라 답할지 고심할 때,
호들갑스러운 반응이 돌아왔다.
“재금 빌딩이면 설마! 그 재금 그룹인가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는 상대측 어머니,
그 옆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맞선 상대 강화영.
김철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사실 이름만 재금 빌딩입니다.’
‘거기에 제 사무실이 있긴 한데 창고 겸용입니다.’
‘재금 그룹과 관계된 건 배송 경주 한 번 했던 게 다입니다.’
‘그리고 그 배송 경주는 국민대 뽀미한테 졌습니다.’
……
이 이야기를 듣게 되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문득 궁금해졌으나,
가능한 한 좋게 이 자리를 마무리 지으려는 김철수는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5년 전 사모님이 됐다가 어제 제주 공항에 서 다시 만났을 때는 어머니가 된 ‘이은혜‘사모님.
맞선 상대 ‘강화영‘과 그 어머니 ‘최현미‘여사.
여기에 자신까지 넷 모두 각자의 입장이 있었다.
게이트 전쟁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라나고,
남들보다 빠르게 사회에 나온 김철수는 모든 일을 가능한 원만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한과 원망은 유효기간이 긴 감정이었으니까.
그래서 김철수는 이은혜 사모님과 최현미 여사,
두 사람이 서로의 집안과 인맥을 견주는 걸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이 또한 재벌가의 맞선에서는 필요한 단계였다.
이미 둘 다 어느 정도 뒷조사는 했겠지만, 뒷조사로 드러나지 않는 인맥과 힘을 은연중 보여 주고 서로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인하는 건 필수였으니까.
이 자리를 좋게 마무리하려면 좀 더 인내하고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두 어머니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우리는 이만 일어나죠.”
“네. 그게 좋겠네요. 이제 젊은 남녀가 대화를 나눠야죠.”
“화영아. 제주도는 네가 잘 아니까. 좋은 장소로 모셔.”
강화영의 어머니가 말하자,
김철수의 어머니도 웃으며 말했다.
“철수야. 정말 참한 아가씨네. 실례되는 행동하지 말고 잘 에스코트해야 한다?”
뼈가 담긴 말을 들은 김철수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이며 내심 생각했다.
‘걱정 마세요. 사모님! 아주 깔끔하게 차이겠습니다! 흐흐흐-‘
곧 두 사람이 테이블에서 떠나가고,
예약석에는 김철수와 강화영 두 사람만 남았다.
김철수는 바로 자기소개를 다시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철수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강화영이에요. 듣던 그대로시네요.”
강화영은 입가를 가리고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호감이 가득 담긴 미소와 시선이 김철수에게 향했다.
자신이 강화영 이름 석 자만 듣고 다급하게 나온 것에 비해,
상대방은 자신에 대해 MSG가 가득 쳐진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역시 재벌가 사모님!
어떻게 홀렸는지 처음 만나는 맞선 상대의 호감도가 최고치에 달해 있었다.
‘사모님. 도대체 구라를 얼마나 치신 겁니까?’
김철수는 어이없는 감정을 숨기고 강화영을 다시금 살폈다.
공들여 세팅한 올림머리,
청초한 화장, 진주 귀걸이, 모노톤 투피스.
값비싼 브랜드의 옷과 장신구.
강화영은 작은 장신구 하나까지 부티가 났다.
그에 반해 자신은…….
“철수 씨는 듣던 대로 소탈하시네요?”
이때 다시금 들려오는 사근사근한 목소리.
강화영은 호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
김철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 네 감사합니다.”
“저에 대해서 뭐 궁금하신 거 없으세요?”
김철수는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선뜻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
이 순간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난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다음 단추를 제대로 끼운다고 해도 결국 모두 풀고 다시 끼워야 한다.
자신을 재벌 3세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아무리 많은 이야기를 나눠봐야 허사였다.
이인혜 사모님이 공항에서 직접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의외였지만,
5년 만에 만나 맞선 자리에 나온 것만으로도 할 도리는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철수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놓이지 않은 빈 테이블.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는 강화영.
사람이 거의 없는 호텔 스카이라운지 게다가 지금 이곳에는 둘만 있다.
잘됐다.
지금 모든 사실을 밝히고 오늘의 해프닝을 끝내는 거다.
“저…….”
김철수가 마침내 결심하고 입을 여는 순간.
“앗! 음료라도 시킬까요?”
누구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살피던 강화영이 김철수의 의도를 오해하고 말했다.
“아뇨. 먼저 꼭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이때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강화영.
강화영은 테이블로 몸을 숙이며 말했다.
“저 죄송한데. 친척 동생이 저기 있네요. 잠시 인사 좀 해도 괜찮을까요?”
“네? 친척이요?”
“네. 원래 서울에 사는 앤데. 며칠 전에 제주도에 내려왔거든요. 그 애를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만나네요.”
강화영은 김철수의 등 뒤에 시선을 두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김철수가 별생각 없이 말하는 순간.
강화영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어머 우연이다. 어떻게 여기서 만나니? 세연아.”
세연?
너무나 익숙한 이름에 김철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봤다.
모자를 눌러썼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연, 그 류세연이다!
그리고 류세연 옆에는 절대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있었다.
천문석!!
‘네가 여기 왜 있어!?’
김철수가 경악하는 순간.
“화영 언니!”
류세연이 한달음에 달려와 강화영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문석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깍듯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존경하는! 김철수 사장님! 여기서 만나다니! 이런 우연이! 영광입니다! 사장님!”
“……뭐?”
김철수는 당황했다.
존경, 영광, 사장님!?
뭐야, 얘가 왜 이래!?
* * *
“두 사람 혹시 아는 사이세요?”
강화영이 묻는 순간.
천문석은 재빨리 강화영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하며 대답했다.
“철수형은 제 친형이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제가 아주아주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친형……? 존경이라고?”
김철수는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했다!
평소 무슨 일이건 덤덤하던 천문석이 마치 충성맹세라도 하듯 외치고!
삼겹살을 사줬을 때도 보이지 않던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온갖 알바를 같이하며 겪은 천문석은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뭐야? 이 녀석 왜 이래!?’
김철수가 다시 한번 의문을 품을 때,
강화영이 어쩐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문석 씨와 철수 씨가…… 형제 같은 사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일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제가 김철수 사무실의 부사장입니다!”
순간 강화영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아, 철수 씨의 부하 직원이셨군요!”
강화영의 미소 띤 얼굴이 김철수, 천문석을 지나 류세연에게 향했다.
“……그랬구나?”
강화영이 어쩐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하자,
류세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별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쳇! 언니가 이겼어. 철수 오빠 정말 괜찮은 사람이니까 잘해 봐.”
“후흐흐흣- 당연하지!”
강화영은 입가를 가리고 너무나 환하게 웃었다.
“저 두 사람 사이가?”
김철수의 질문에 강화영이 류세연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세연이는 고모의 딸. 그러니까 제 사촌 동생이에요.”
김철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류세연과 천문석을 봤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김철수는 깨달았다.
‘모두 봤구나!’
눈치가 귀신 같은 천문석.
머리 회전이 기막힌 류세연.
천문석과 류세연 두 사람이라면.
자신이 이은혜 사모님과 같이 이곳에 나타난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거다.
게다가 류세연과 강화영 둘이 사촌 사이라면 맞선에 관해서도 들었을 거다.
‘천호 그룹 3세와 맞선을 본다고.’
김철수는 다시 천문석을 봤다.
불타는 듯 이글거리는 눈.
이 눈 속에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존경심과 충성심!
김철수는 이제야 천문석이 왜 평소와 다른지 알 수 있었다.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올 때 생각했던 그 상황이다!
‘천문석 이 녀석! 내가 재벌 3세라고 생각하는구나!!’
* * *
김철수는 더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재빨리 사실을 밝히려 했다.
“화영 씨. 제가 당장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가로채는 강화영.
“아는 사이라니. 정말 잘됐네요! 철수 씨. 우리 모두 같이 식사하는 게 어떨까요?”
“네? 뭘 같이 해요?!”
아니, 지금 무슨 소리야?
지금 맞선보고 있는데 식사를 왜 같이해!?
김철수가 당황하자,
천문석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는 이만 갈 테니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김철수는 반색했다.
여기선 먼저 맞선, 강화영에게 사실을 밝히고,
천문석에게는 나중에 따로 사실을 밝히는 게 최선이었다.
지금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사실을 밝히면 서로에게 민망한 상황이 된다.
지금은 어떻게든 찢어지는 게 우선이다.
“그럴래? 아무래도 그게 좋을 듯…….”
김철수가 반색하며 말하는 순간,
강화영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철수 씨. 위에 레스토랑 예약했어요. 마침 점심시간인데 식사라도 하고 보내는 게 어떨까요?”
“…….”
김철수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강화영은 어느새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걸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위에 레스토랑 4인 예약으로 변경 가능해요.”
엄청난 행동력!
김철수가 어, 어! 하고 천문석마저 당황할 때.
어느새 식사 예약 변경이 끝나고 네 사람은 레스토랑 룸에 앉아 있었다.
……
레스토랑 테이블 앞에 앉은 네 사람.
김철수와 강화영.
천문석과 류세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식사자리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김철수와 강화영 두 사람의 맞선 자리였다.
맞선을 보다가 갑자기 2:2 식사라니!?
막장 드라마에 나와도 개연성 없다고 쌍욕을 먹을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다.
당연히 상식적인 김철수와 천문석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서로를 봤다.
‘갑자기 이게 뭐냐?’
‘형.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두 사람이 무언의 대화를 나눌 때,
강화영과 류세연은 메뉴판을 보고 신나게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세연아. 여름이니까. 난(蘭) 코스 어때?”
“거기에 한우 요리 추가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여름 특선, 난(蘭) 코스에 한우 요리. 와인 추가해서. 철수 씨는 어떠세요?”
강화영의 물음에 김철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을 것 같습니다.”
“오빠는 어때?”
류세연의 물음에 천문석도 바로 대답했다.
“난 물어볼 것도 없어. 전부 너랑 같은 거로 시켜.”
이렇게 천문석은 생애 첫 호텔 레스토랑 코스 요리를 먹게 됐다.
철수형의 맞선 자리에서…….
‘와- 재벌들은 원래 이런 건가……?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는데.’
천문석이 내심 어이없어 하고 있을 때,
김철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재벌! 나 같은 보통 사람이랑은 생각하는 게 차원이 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