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273화 (274/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73화>

하얗게 질린 류세연의 얼굴이라니!

이 녀석이 어지간한 일로 얼굴색이 이렇게 변할 리가 없었다!

천문석은 직감했다.

‘맞선 상대가 진짜 재벌이구나!’

“진짜 재벌이 나타난 거냐?”

“그것도 네가 얼굴을 아는 재벌!?”

“천하의 류세연이 내기에서 졌다고?!”

크하하하-

천문석이 신나게 웃을 때, 류세연이 얼빠진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이게 어디서……!”

즉각 류세연을 응징하려던 천문석은 뒤이어 들려온 말에 굳어 버렸다.

“저 사람…… 철수 오빠 아냐?”

“철수 형?”

그러나 놀람도 잠시 천문석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자신의 주위 사람 중에 호텔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을 한 명 고른다면 철수 형이다.

천문석은 라운지 입구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야, 철수 형은 이런데 절대 안 와. 그 형 자판기 커피값 300원 아깝다고. 보온병에 커피믹스 타가지고 다니던 사람이야.”

“…….”

“그리고 그 커피믹스도 용역 사무소나 학과 사무실에서 받아 온 거고. 철수 형은 2만 5천원짜리 커피 메뉴판을 보는 순간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할 사람…….”

“저기를 봐…….”

피식피식 웃으며 몸을 돌리던 천문석.

그러나 류세연이 가리킨 입구를 보는 순간 말이 뚝 끊기고 웃음이 단숨에 사라졌다.

“……!”

그리고 천문석도 류세연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30대 부잣집 귀부인으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라운지 입구에 나타난 남자.

검은 정장에 하얀 와이셔츠, 넥타이.

회사원 같은 옷차림.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카락과 약간은 긴장한 듯한 얼굴.

겉으로는 말라보이지만, 목과 손목, 일자로 뻗은 어깨에서는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이 느껴졌다.

우아하게 걸어오는 귀부인 뒤를 어색하게 따라 걷는 남자.

호텔이 너무나 어색해 보이는 이 남자를 천문석은 한눈에 알아봤다.

2일 전 재금 빌딩 13층 사무실에서 만났던 김철수 사장님.

철수 형이 나타났다!

*   *   *

“……철수 형? 철수 형이 왜 여기서 나와!?”

천문석이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재빨리 입을 가리는 손.

류세연은 다급히 말했다.

“쉿! 오빠 들켜!”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 등받이 아래로 몸을 낮췄다.

그리고 어색해 보이는 김철수를 주시했다!

아직 모른다!

철수 형이 세연이 사촌 언니와 맞선을 보는 재벌 3세일 가능성보다는.

우연히 제주도에 왔다가 처음 보는 귀부인의 길 안내를 해 주게 됐을 가능성이 더 컸다!

이때 귀부인이 멈춰 서더니 직원에게 무언가 묻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철수 형은 이제 뒤로 돌아서 라운지 밖으로 나가고…….

“…….”

호텔 직원이 귀부인과 철수 형을 한 테이블로 안내했다.

창가에 있는 테이블, 예약석이다!

예약 팻말이 치워지고, 귀부인이 앉고 뒤이어 철수 형이 앉았다.

두 사람은 마치 맞선의 남자 측처럼 나란히 앉았다!!

천문석의 머릿속에서 폭풍이 몰아쳤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철수 형이 물가가 미친 수준인 성수기 휴양지 ‘제주도’에 와서, ‘커피값이 2만 5천원’인 신라호텔 ‘스카이라운지’에, ‘부잣집 귀부인’과 함께 나타나 ‘예약석’에 앉았다!

-휴양지 제주도.

-커피값 2만 5천원.

-신라호텔 스카이라운지.

-부잣집 귀부인.

-예약석.

하나같이 철수 형과는 이어지지 않는 단어 들이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설마, 맞선 장소가 이곳이 아닌건가?

강화영이 사촌 동생을 놀리려고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천문석이 충격에 휩싸여 무수한 가능성을 떠올릴 때.

다시 한번 류세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저기 입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보였다.

류세연의 사촌 언니!

단정한 모노톤 투피스에 진주 귀걸이.

깔끔한 올림머리와 청초한 맞선 화장을 한 강화영!

류세연의 사촌 언니 강화영이 어머니와 함께 입구에 나타났다!

“설마. 설마! 설마!!”

천문석이 자신도 모르게 말하는 순간.

류세연이 입으로 효과음을 넣으며 연극배우처럼 외쳤다.

두드드드드드-

“과연! 강화영은 김철수가 있는 테이블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두둥-

“오빠! 엄청 흥미진진하지 않아!?”

류세연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가린 채 신나게 말했다.

‘류세연 이 어이없는 녀석!’

그러나 류세연 말대로였다. 시선을 돌리지 못할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장생불사의 약을 찾아 땅끝으로 떠난 서복.

황금의 나라를 찾아 남미로 온 프란시스코 피사로.

젊음의 샘을 찾아 카리브해를 헤맨 후안 폰세 데 레온.

……

이들도 그러했을까?!

마음속 뻘쭘함, 민망함, 황당함은 단숨에 날아가 버리고, 그 빈 자리를 흥미와 호기심이 채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마음속 흥미와 호기심이 폭발하듯 커지고 있었다.

당연했다.

지금 저기 저곳, 예약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경영학과 화석.

키즈카페 점장(전).

수많은 알바 현장의 전우.

그리고 지금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김철수 사무실의 사장님, 철수 형이었으니까!

이때 입구에 나타난 강화영과 어머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연! 강화영은 예약석으로 움직일 것인가?!’

천문석은 내력을 끌어올려 강화영과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앞서 걷는 어머니의 한걸음 뒤.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부끄러운지 살짝 시선을 내리고 조심조심 걷는 강화영.

강화영은 드라마에서 나온듯한 부잣집 아가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앞서 걷는 강화영 어머니의 시선이 주위를 훑다가 멈추는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반가움 가득한 미소가 피어난다.

그 반가운 미소가 향한 곳은 창가의 예약석, 철수 형 옆에 앉은 귀부인!

귀부인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들어가볍게 흔들고.

이 순간 어머니와 강화영은 창가의 테이블, 귀부인과 철수 형이 앉은 예약석으로 직선으로 걸어갔다.

둑! 둑! 둑!

카페트를 밟는 너무나 작은 발걸음 소리!

그러나 이 작은 발걸음 소리가 극도로 집중한 천문석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쿵, 쿵, 쿵, 쿵-

강화영과 김철수가 점점 가까워질 수록, 천문석의 심장도 터질 듯 크게 두근거렸다.

“오빠! 어떡해! 화영 언니! 맞선 상대가 진짜 철수 오빤가 봐! 철수 오빠가 재벌 3세였던 거야?! 캬, 캬캬-.”

몸을 숨긴 류세연은 천문석의 몸을 마구 두들기며 너무나 좋아했다.

그러나 천문석은 미동도 하지 않고 두 집안 사람이 만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때 작은어머니와 강화영이 동시에 멈췄다!

“……!”

귀부인과 철수 형이 앉은 테이블 앞이었다!

‘정말로? 진짜로? 철수 형과 강화영 둘이 맞선을 보는 건가?!’

아니 아직이다!

내가 아는 철수 형, 그 운 없는 철수 형이라면 처음 오는 호텔 라운지라서 뭔가 잘못됐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가볍게 일어나 미소 짓는 귀부인과 엉거주춤 일어나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 철수 형.

그리고 마주 미소 짓는 어머니와 살포시 미소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강화영.

이때 고개를 숙인 강화영이 입에서 이름이 튀어나왔다.

“김철수 씨?”

“……!”

천문석은 깨달았다.

빼박이다!

더는 볼 필요도 없다!

강화영의 맞선 상대는 김철수, 철수 형이었다.

이 순간 천문석의 머릿속에서 어제저녁 강화영에게 들은 맞선 상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대 경영학과 4학년 휴학.

-자기 사업을 시작한 경영자.

-천호 유통 사장의 장남.

-천호 그룹 회장의 손자.

-젊은 재벌 3세.

이 모든 게 가리키는 것은 자신도 아는 사람이었다.

김철수, 철수 형!

이때 류세연의 신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어떡해! 철수 오빠가 진짜! 재벌 3세였어! 와, 캬캬캬!”

“……!!”

천문석은 류세연을 응징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머리를 굴렸다.

-강화영은 재벌 3세와 맞선을 본다.

-김철수가 강화영의 맞선 상대다.

-즉 김철수는 재벌 3세다!

재벌 3세!!

철수 형이 재벌 3세였다니!!

자신과 철수 형은.

함께 화학 공장 하수관 속을 기면서 전동공구로 슬러지를 깼고, 함께 생맥주 기계를 매고 축제를 찾아다니며 생맥주를 팔았고, 함께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선로를 날랐다.

그렇게 극한 알바 현장에서 개고생을 함께하며, 다음 생에는 재벌 3세로 태어나 꿀을 빨자고 함께 웃었다.

그런 김철수, 철수 형이 재벌 3세였다니!?

이 순간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키즈카페!’

천문석은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내서 예전에 일했던 키즈카페를 검색했다.

‘설마 그 키즈카페!?’

혹시나 하던 천문석은 검색 결과가 나오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

예전에 키즈카페에서 일할 때, 키즈카페 점장인 철수 형은 몇 번이나 자신에게 점장 자리를 넘기려고 했었다.

철수 형은 비정규직 점장이었고.

그 키즈카페는 점포 수가 100개가 넘는 대형 프랜차이즈의 직영점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철수 형은 자신이 승낙만 하면 언제든 점장을 시켜 줄 수 있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했었다.

그때 자신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러나 지금 검색 결과를 본 순간 과거의 의문이 풀렸다!

자신이 일했던 키즈카페는, 천호 그룹의 지분 투자가 이뤄진 회사였다!

게다가 최고 경영자, CEO의 이름이 의미심장했다.

천호그룹 회장, 김호천.

키즈카페 사장, 김철호.

철수 형의 이름, 김철수!

김호천, 김철호, 김철수.

셋 다 같은 김 씨에 김철호과 김철수는 중간에 ‘철’자가 같다!

혹시 항렬자(行列字)?

너무나 많은 증거가 하나의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철수, 자신이 아는 철수 형은 천호 그룹 김호천 회장의 손자.

진짜 재벌 3세라고!!

“……!”

이 순간 류세연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설마 철수 오빠가 거짓말해서 화난 거야?”

“…….”

류세연이 당황할 정도로 천문석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천문석은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 순간 천문석은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환호하고 있었다.

‘으하하하하하-.’

자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김철수!

알바 알선의 제왕!

적이 없는 사나이!

라면을 기막히게 끓이는 선배!

유비의 심장과 조조의 머리를 가진 상사!

철수 형이 원래부터 비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자신은 예전부터 철수 형이라면 재벌 3 세가 아니라, 전생에 황제였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 순간 천문석의 가슴속에서 웃음이 터질 듯 커졌다!

‘카캬카캬카카카-.’

대형 길드를 마다하고 김철수 사무실에서 일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재벌 3세가 운영하는 김철수 사무실은 처음부터 성공이 예약된 사무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은 성공이 예약된 김철수 사무실의 부사장이자, 지분까지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 철수 형과 농담처럼 말했던 것처럼, 재벌 3세 꿀을 빨게 된 것이다!

천문석은 이 순간 마음속으로 외쳤다.

‘철수 형! 충성, 충성, 충성!’

이때 들려오는 류세연의 목소리.

“오빠! 맞선 시작하나 봐!”

재빨리 시선을 돌리자 보였다.

철수 형이 의자를 빼준 곳에 강화영과 어머니가 앉고 맞선이 시작됐다.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을 끝까지 끌어올려 이 테이블의 모든 것에 집중했다.

이 자리에 정말 오기 싫어했던 천문석은 이미 사라졌다.

천문석은 어느새 류세연과 똑같이 상기된 얼굴, 두근두근한 가슴, 폭발할 듯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맞선 테이블을 주시했다.

당연했다.

저기에 있는 건 생판 모르는 재벌 3세가 아닌,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는 김철수, 철수 형이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