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69화>
아주 어렸던 어느 날.
류세연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24시간 의도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저장되는 정보들.
스치듯 본 것이라도 떠올리는 순간 실제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마치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은 엄청난 기억력.
류세연은 어떤 책이든 한번 보면 외우고, 다시 되새기면 의미를 이해하고 그 속의 뜻까지 알 수 있었다.
책뿐 아니라 사람도 그랬다.
류세연은 보는 순간 그 사람을 분석하고, 분석이 끝나는 순간 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류세연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천재를 넘어서는 천재였다.
그러나 정도를 넘는 천재성, 비범함은 사람을 외롭게 한다.
천재성, 비범함을 보인 이가 어린아이.
부모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라면 그 외로움은 몇 배나 커진다.
영재학교에 다니면서도 몇 번이나 월반했던 류세연.
비범한 아이 중에서도 비범했던 류세연은 언제나 혼자서 책을 읽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잠들었다.
지식이 쌓여갈수록 생각은 끝없이 뻗어 나가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머릿속에 쌓이는 지식이 커질 수록, 마음속 텅 빈 공간도 커졌다.
‘텅 빈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류세연은 수많은 책을 읽고 지식을 쌓아서 마음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과 실제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그 무엇을 해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공허함 많이 느껴졌다.
‘원래 이런 건가?’
류세연이 어느 날 문득 생각했을 때.
천문석, 옥탑방 오빠가 나타났다.
별로 똑똑해 보이지 않던 옥탑방 오빠.
그러나 옥탑방 오빠는 류세연에게 너무나 많은 걸 가르쳐 주고 보여 줬다.
-난간 틈에 핀 꽃이 얼마나 예쁜지.
-늦은 밤에 먹는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한여름에 쏟아지는 소나기 속을 달리는 상쾌함을.
-해가 떠오르는 순간 세상이 깨어나는 모습을.
그리고 너무나 소중한 것을 전해 줬다.
크게 웃고 우는 법.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비범함을 숨기자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졌지만.
류세연은 마침내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문득 류세연은 고개를 돌려 할머니와 작은아버지가 있는 방을 봤다.
류세연은 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직접 눈으로 보듯 알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는 열심히 설득하고, 할머니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젓고 계실 거다.
작은아버지는 오늘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거다.
하지만 결국 할머니는 작은아버지에게 얼마간의 땅을 다시 한 번 넘길 거다.
서울에 있는 건물과 땅을 넘겼듯이 말이다.
냉정하고 단호해 보이는 할머니의 가슴속에는 깊은 정이 있었으니까.
작은아버지는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큰 손해를 볼 테지만, 때로 손해를 봐야 알게 되는 것들도 있었다,
류세연은 문득 생각했다.
보통이라면 이 손해를 크게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할머니가 가진 땅을 하나도 물려받지 못해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자신에게 ‘돈‘은 언제라도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일 뿐이었다.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진정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은.
누구도 살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로 흔하거나.
아무리 큰돈을 가져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따뜻한 태양과 시원한 바람.
난간 위에서 하품하는 고양이.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밭.
목욕 후에 마시는 바나나 우유.
창을 깨끗하게 닦았을 때의 후련함.
꺼진 등을 갈았을 때 보여 주는 환한 미소.
……
류세연은 문득 미소 지었다.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할머니에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을 받았다.
류세연의 시선이 고뇌하는 얼굴로 앉아 있는 한 사람에게 향했다.
사촌 언니의 끝없이 이어지는 자랑을 들으며.
‘뭐지? 내가 왜 여기서 처음 보는 사람의 맞선 상대 자랑을 듣고 있어야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
너무나 소중한 선물, 오래전 할머니가 한 약속.
그 약속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
‘후흐흣-.’
류세연은 가슴속에서 터질 듯 차오르는 웃음을 간신히 삼키며 사촌 언니를 봤다.
강화영.
화려한 걸 좋아하는 허영기 있는 얄미운 언니.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얄밉던 사촌 언니가 어째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류세연은 말했다.
“와! 정말 대단한데!?”
“그렇지!”
말하는 중에도 힐끔힐끔 류세연을 신경 쓰던 강화영이 자랑스레 웃는 순간.
류세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난 재벌 3세보다 집에서 노는 사람이 더 좋은 것 같아.”
“……노는 사람이 더 좋다고?”
강화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여유시간이 많은 직업이 좋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돈은 내가 벌면 되잖아? 내가 보기에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은?”
“요리 청소 잘하고, 라면을 잘 끓이고, 수전, 도어락 설치 같은 집수리를 잘하는 사람이 좋은 것 같아. 거기에 항상 집에 있으면 더 좋고.”
“…….”
천문석이 문득 느껴지는 오한에 부르르 떠는 순간.
강화영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너 남편이 아니라 일꾼을 구하는 거니? 그런 건 인부를 고용해야지?”
천문석은 이 말에 100% 동의했다.
“얘가 세상 물정 모른다니까. 그럼 어떻게 먹고 살려고 그러니?”
류세연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강화영에게 건넸다.
“돈은 내가 벌면 된다니까? 이렇게 말야.”
“응?”
강화영은 류세연에게 받은 카드를 봤다.
[재금 연구소, 연구원. 류세연.]
강화영은 깜짝 놀랐다.
재금 그룹은 한국에서 재계 순위를 따지는 게 무의미한 초거대기업!
재금 연구소는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 안에서도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모이는 곳이었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류세연이 재금 연구소 연구원이라고!?’
“너? 어떻게 재금 연구소에 들어간 거야!?”
깜짝 놀란 강화영이 외치는 순간, 류세연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뭐. 다니던 학교 날아가고 쉬고 있으니까. 연락 오더라고.”
“논문 봤다고. 류세연 님을 재금 연구소로 꼭 모시고 싶다고 말이지.”
“겸사겸사. 재금 아카데미 들어가는 김에 연구소에서도 일하기로 했어.”
“…….”
스스로 빛나는 사람과 누군가의 후광에 기대려는 사람.
강화영은 갑자기 밀려 오는 자괴감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이때 류세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맞선 진짜야? 언니 이번에도 사기 치는 거 아냐?”
“얘가 무슨 소리를! 내가 언제 사기를 쳤다고 그래!”
“전에 유학 갔다고 사기…….”
강화영은 재빨리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진짜야! 앗 아니 이게 아니라! 확인하면 될 거 아냐!”
“확인? 어떻게?”
강화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일 맞선 장소에 와서 볼래?”
“귀찮은데…… 그냥 언니 말이 맞는 거로 하지, 뭐.”
순간 강화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야, 얘는 왜 갑자기 사촌 언니를 도발해?’
천문석이 의아해할 때, 불똥이 천문석에게 튀었다.
“천문석이라고 했죠!? 세연이 데리고 내일 신라호텔 10층 라운지에 11시까지 꼭 와주세요! 확인시켜 드릴게요!”
“……네?”
강화영은 바로 시선을 돌려 류세연에게 선언했다.
“내일! 진짜 맞선 보는 거 확인시켜 줄게! 둘이 같이 와서 직접 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천문석은 깜짝 놀라 외쳤다.
무슨 맞선 보는 자리에 친척 동생을 데려간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친척도 아닌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곳에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느껴지는 뻘쭘함과 민망한, 황당함에 손발이 오글거렸다!
천문석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외치려다가 깨달았다.
역시 부자들의 사고방식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류세연은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당연히 거절…….
이때 강화영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신에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 소원하나 들어 주기 어때!?”
순간 류세연이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콜!”
“세연아!?”
천문석이 다급히 제지하려 했으나.
탁, 탁-
꾹, 꾹-
쓰윽, 쓰윽-
강화영과 류세연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스치며 외쳤다.
“약속! 도장! 복사!”
“약속! 도장! 복사!”
이런 꼬맹이 같은 녀석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막으면…….
탕-
이때 방문이 거칠게 열리고 얼굴이 달아오른 남자가 나왔다.
“가자 화영아!”
류세연의 작은아버지는 성큼성큼 대청마루를 지나가며 외쳤다.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강화영 세 사람은 순식간에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갔다.
대문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강화영은 류세연을 보며 외쳤다.
“너 약속 잊지 마!”
“당연하지!”
류세연은 의기양양하게 외치고는 천문석을 봤다.
“삼촌! 우리 내일…….”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난 내일 그 호텔에 갈 생각이 전혀 없다.”
류세연은 다급히 손을 들고 외쳤다!
“잠깐! 내 이야기부터 들어 봐!”
“그래. 어디 설득해 봐라.”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류세연을 봤다.
류세연은 이마를 찌푸리고 천문석을 노려봤다.
어린 시절부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의 버릇.
류세연은 한참 동안 천문석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일 같이 가면 엄청 재밌을 거야!”
“응. 안 재밌어. 엄청 민망해.”
“호텔 라운지에서 2만5천 원짜리 커피 사줄게!”
“응. 됐어.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 마실 거야.”
“같이 안 가면! 나 망신당해! 그래도 좋아!?”
“응. 괜찮아. 살다 보면 망신당할 수도 있는 거지 뭐.”
“아, 쫌! 진짜 이럴 거야!?”
“응. 진짜! 이럴 거야!”
카캬카-
마지막 대답이 끝나고 천문석이 신나게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내일 같이 가라.”
“응. 아냐. 같이 안 가…… 어?”
어느새 류세연의 외할머니, 임옥분 여사가 천문석을 보고 있었다.
“여사님 방금?”
천문석이 당황하자, 임옥분 여사는 빙그레 웃으며 선언했다.
“너 내일 같이 안 가면 …… 넘긴다.”
목적어가 빠진 선언이지만, 무엇을 넘길지는 너무나 뻔해서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천문석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여사님. 설마 넘긴다는 게 건물은 아니겠죠.”
“응. 맞아. 건물.”
“하하하- 여사님. 이번에도 농담이시죠?”
“응. 아냐 진짜야.”
자신이 했던 방식 그대로 대답하는 임옥분 여사님.
“…….”
천문석이 뭐라 대답하지 못하자.
임옥분 여사는 말을 덧붙였다.
“너 내일 세연이 따라갔다 오면. 내가 좋은 선물 줄게.”
“선물!? 무슨 선물인데 나도 가면 선물 주는 거야?”
대청마루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특급 헌터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우리 강아지는 내일은 할머니랑 놀자.”
“알바랑 같이 가는 게. 훨씬 더 재밌을 거 같은데?”
임옥분 여사는 특급 헌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
특급 헌터의 눈이 확 커졌다.
“진짜로? 정말로!?”
“당연하지!”
카카캌-
하하하-
특급 헌터와 임옥분 여사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자 류세연이 재빨리 외쳤다.
“뭐야!? 할머니 뭐야? 나도 말해 줘!?”
“안 돼. 이건 우리 강아지랑 나만의 비밀이야.”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특급 헌터 누나한테 말해 줄 거지?”
특급 헌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건 할머니랑 나만의 비밀이야!”
카카캌-
하하하-
“와! 그런 게 어디 있어!?”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웃음이 터지고, 류세연은 분통을 터트렸다.
이때 천문석은 멍한 눈으로 동쪽 마당 너머 넓게 펼쳐진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 지는 산에 펼쳐진 대농장.
여전히 끝내주는 경관이었지만 아까와는 전해지는 감흥이 달랐다.
오늘 육체가 힘들었다면 내일은 정신이 힘들 차례였으니까.
그러나 천문석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 또한 삶의 한 부분.
신동대문에서처럼 난장판에서 정신없이 구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 하하-
천문석은 힘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