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68화>
“하- 아깝네…….”
임옥분 여사의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천문석은 이어질 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한 방에 끝낼 수 있었는데!’
천문석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류세연의 외할머니, 맨손으로 이 거대한 농장을 키워 낸 분이다.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되는 상대였다!
이때 임옥분 여사가 은근슬쩍 다가와 사근사근 말을 걸었다.
“문석아. 내가 서울에 빌딩이 하나 있는데…….”
뭐, 빌딩!?
방금 다짐했는데도 순식간에 커지는 눈과 확 트이는 귀!
솔깃했다.
너무나 솔깃했다!
“여사님. 그 빌딩…….”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려다가 흠칫 놀랐다.
“……!”
재빨리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외치는 천문석.
“우와아! 폭포다!”
천문석은 환호하는 특급 헌터를 향해 달려갔다.
“기다려 같이 들어가자!”
“빨리 와! 알바! 여기 수영장인가 봐! 바닥에 타일도 있어!”
특급 헌터는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며 달렸고.
천문석도 상의를 벗어 던지고 뒤를 따라 뛰었다.
두 사람은 단숨에 마당을 가로질러 바위에서 쏟아지는 물이 고인 거대한 연못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야압!
끼요오옷-
첨벙!
산산이 부서진 물보라가 하늘 높게 치솟고.
몸에 쌓인 열기를 단숨에 날려 버리는 시원한 냉기가 느껴졌다.
천문석은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까닥했으면 낚일 뻔했다!
정신이 번쩍 드니 주위의 모습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폭 10미터가 훌쩍 넘는 연못에는 특급 헌터 말대로 반짝이는 타일이 깔려 있었다.
특급 헌터는 능숙하게 헤엄쳐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알바 빨리 와! 여기 폭포도 있어!”
“야, 위험해 같이 가자!”
두 사람은 곧 폭포로 다가가 바위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촤아아아-
“간지러워! 카캬캌-.”
바위에서 쏟아진 물이 산산이 부서져 무지개를 만들어 낼 때.
대청마루에 류세연이 나타났다.
류세연은 온종일 집 안 곳곳을 수리했는지 먼지로 엉망이 된 작업복을 입고 공구 벨트를 걸치고 있었다.
작업용 장갑을 탁탁- 벗으며 외치는 류세연.
“오빠! 특급 헌터! 빨리 씻어 곧 식사 준비 끝난 데!”
“오빠!? 이게 어디서 기어 올라!?”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뜨다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연못 앞에 서 있는 임옥분 여사님!
“…….”
임옥분 여사가 아무 말 없이 천문석을 바라봤다.
하, 하하, 하하하-
천문석이 어색하게 웃고.
“끼요오오옷- 할머니 얼른 들어와! 엄청 시원해!”
특급 헌터가 신나게 환호성을 지를 때.
말없이 서 있던 임옥분 여사는 피식 웃으며 천문석에게 손짓했다.
“적당히 놀고 나와서 씻고 밥 먹자. 오늘 고생 많았다.”
“네……?”
생각과 전혀 다른 반응에 천문석이 당황하자, 뒤늦게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실려 오는 단어가 있었다.
“손녀사위.”
기겁한 류세연이 다급히 달려와 외쳤다.
“할머니! 아니라니까! 자꾸 왜 그래!”
“아유- 농담이야. 농담! 할머니가 손주들 반가워서 농담한 거야.”
그러나 이 순간에도 임옥분 여사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
전혀 농담 같지 않았다.
* * *
천문석과 특급 헌터, 류세연 셋은 바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상 앞에 앉았다.
대청마루에 놓인 상 가운데는 커다란 은갈치 조림과 구이가 놓이고.
그 주위로 호박잎과 쌈장 갓 따온 온갖 배추와 당근, 오이 야채와 오분자기 된장찌개가 올라왔다.
상위에 음식을 차리던 아주머니가 주방의 임옥분 여사를 힐끗 보더니 천문석에게 말했다.
“마님께서 손녀분이랑 정말 귀한 손님 오신다고 며칠 전부터 정말 좋아하셨어요. ‘귀한 손님’ 맞으시죠?”
‘귀한 손님’
이 단어에 담긴 은근한 뉘앙스에 천문석이 뭐라 답을 하지 못하자.
아주머니는 알겠다는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생전 남에게 부탁 한번 안 하시던 마님께서. 직접 어선에 부탁해서 제일 좋은 은갈치를 준비하셨어요. 많이 드세요.”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특급 헌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귀한 손님?”
“…….”
“…….”
천문석과 류세연 모두 뭐라 대답하지 못할 때.
임옥분 여사가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배고프겠다. 얼른 먹자.”
“잘 먹겠습니다!”
특급 헌터의 신나는 외침을 시작으로 식사가 시작됐다.
……
커다란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먹고 뒷정리까지 끝났을 때.
천문석은 대청마루에 앉으며 한숨 돌렸다.
아직 이른 저녁이지만, 힘겨운 하루를 보내서일까?
탁 트인 앞마당, 그늘진 뒷마당과 연결된 시원한 대청마루에 앉으니.
하루가 끝나간다는 홀가분함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왔다.
“하- 오늘…….”
“으아아아- 오늘 힘들었다! 그래도 보람찼어! 뀰뀰-.”
“…….”
특급 헌터가 천문석 옆에 벌렁 누우며 한발 먼저 탄성을 질렀다.
뭐지, 이 녀석?
이제 탄성까지 먼저 지르잖아!
혹시 사람 마음도 읽는 거 아냐?
몸이 힘드니 생각마저 맥락 없이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피식 웃을 때, 주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시원한 수박, 감귤 화채 먹어!”
드르륵-
류세연이 발로 미닫이문을 열고 수박 감귤 화채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왔다.
특급 헌터는 벌떡 일어나 반짝이는 눈으로 수박 감귤 화채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입 먹는 순간.
“최고야! 아삭! 새콤! 달콤! 시원하고 맛있어! 이건 최고의 감뀰이야! 뀰뀰뀰-.”
특급 헌터는 환호했다!
류세연은 웃으며 천문석에게도 화채 그릇을 밀어 줬다.
“오빠도 고생했어. 얼른 먹어.”
“…….”
천문석은 말없이 류세연을 바라봤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빠라고 부른 류세연은 ‘왜?’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천문석은 재빨리 임옥분 여사를 찾았다.
멀리 문이 열린 방 안, 전화를 받는 여사님이 보였다.
임옥분 여사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시선은 천문석에게 향해 있었다.
류세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외할머니를 보더니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오빠. 할머니는 왜 봐? 할머니가 딴 데 보고 있으면 뭐 하려고?”
“…….”
천문석은 말없이 화채 그릇을 받았다.
류세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도발하듯 계속 말을 걸었다.
“오빠. 화채 어때?”
“화채 맛있어? 오빠?”
“오빠? 화채 맛있냐니까?”
“빨리 대답해 보라니까 오빠!?”
……
잇달아 ‘오빠’를 강조하다가 웃음마저 터트리는 류세연.
흐흐흨흐흐큭-
이 녀석 몰래 쥐어박아 버릴까?
천문석이 진지하게 고민할 때,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응?”
천문석과 류세연의 시선이 대문으로 향했다.
곧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나타났다.
부부로 보이는 40대 남녀와 딸인 것 같은 20 중반의 여자.
부부가 마당을 가로지르며 외쳤다.
“어머니. 저희 왔습니다!”
이 순간 생글생글 웃던 류세연의 표정이 굳었다.
“여보. 세연이가 있네요?”
“누나는 너 온다는 말 없던데 언제 온 거야?”
세연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화영 언니.”
* * *
세연의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는 바로 임옥분 여사님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세연의 사촌 언니는 천문석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세연이 사촌 언니. 강화영이라고 해요.”
“처음 뵙겠습니다. 천문석이라고 합니다.”
“음…….”
강화영은 천문석의 손을 잡은 채 쓰윽 얼굴을 살피더니 빙긋 미소 지었다.
“그동안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듣던 대로 아주……?”
“네? 아주……?”
천문석이 반문하는 순간, 류세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언니! 무슨 소리 하려고!”
“듣던 대로 멋지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강화영은 피식 웃으며 천문석 옆에 앉았다.
류세연이 즉시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언니 안 바빠? 좋아하는 쇼핑이나 하지 여긴 웬일이야? 감귤 따러 온 거야? 아직 감귤 딸 거 많으니까, 저기 하우스 가서 감귤이나 따지?”
강화영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 내일 ‘맞선‘보거든. 그거 할머니한테 말씀드리러 온 거야.”
“응 그렇구나.”
류세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짧게 대답한 순간, 강화영의 강렬한 시선이 류세연에게 쏘아졌다.
“……!”
너무나 노골적인 시선이라 강화영을 처음 본 천문석도 이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 맞선 본다니까! 맞선!’
‘궁금하지? 물어보고 싶지!?’
‘빨리 물어봐! 빨리!’
“응 잘됐네. 그럼 얼른 보고하고 가봐.”
그러나 류세연은 손을 휙휙 흔들며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강화영의 시선이 천문석에게로 움직였다.
“질문할 게 없으면 내가 질문을 해야겠네. 천문석 씨는 지금 하는 일이…….”
“언니!”
다급히 말을 끊은 류세연이 사촌 언니를 봤다.
강화영은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 궁금한 게 생겼니?”
결국, 류세연은 사촌 언니 강화영이 너무나 원하는 질문을 했다.
“언니 누구랑 선보는데?”
후흐흣-
순간 경쾌한 웃음과 함께 폭풍 같은 대답이 쏟아졌다.
“너 한국대 알지?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학인 한국대!”
“한국대 경영학과 4학년. 휴학 중인 사람이 내일 선 상대야!”
“그 사람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는데 벌써 자기 사업을 시작했데!”
‘뭐지, 이 정도로 이 언니가 자랑하지는 않을 텐데?’
류세연이 의아해하는 순간 바로 이어지는 목소리.
“게다가 그 사람 재벌 그룹 후계자야! 재벌 3세!”
“너 천호 그룹 알지? 요 몇 년 사이에 건설, 용역, 유통에서 무섭게 성장한 회사!”
“그 사람은 천호 유통 김 사장님 장남이야!”
“우리가 결합하면 할머니 농장의 농산물을 천호 유통을 통해서 유통할 수 있게 돼.”
“아!”
류세연이 탄성을 터트리는 순간.
강화영은 류세연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게 되면 할머니도 아버지한테 회사를 물려주실 거야.”
* * *
사촌 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류세연은 방금 본 작은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억이 사진처럼 펼쳐진다.
빳빳한 양복, 단정히 맨 넥타이.
이마를 흐르던 식은땀, 서류 가방을 꽉 움켜쥔 손.
할머니를 부르는 목소리에 담긴 약간의 초조함과 긴장.
자신을 본 순간 얼굴에 떠오른 약간의 당황과 걱정까지.
류세연은 순식간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했다.
-정략결혼으로 천호 그룹과 연을 맺어, 농장에서 생산된 농작물을 천호 유통을 통해 판매한다.
류세연은 생각과 동시에 이건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임옥분 농업 법인의 농작물 판매 유통라인은 튼튼하다.
잉여 농산물이 발생하지도 않고, 판로 다각화를 할 상황도 아니다.
게다가 천호 그룹에서 한 해 백억도 안될 농작물 유통에 끼어들기 위해 정략결혼을 추진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됐다.
그렇다면 무슨 생각일까?
이 순간 류세연의 머릿속에서 지난 몇 달 동안 스치듯 보았던 기사와 뉴스 온갖 정보와 숫자가 뒤엉켜 쏟아졌다.
이 뒤섞인 정보를 훑는 순간.
툭, 툭, 툭-
정보 속에서 튀어나오는 키워드!
-갑자기 생겨난 이세계의 ‘지하 터널’.
-신서울과 신동대문을 잇는 도로건설 계획 ‘폐기’.
-천호 그룹의 모체, 천호 건설의 ‘유동성 위기’.
-제주도의 대농장과 전국에 있는 엄청난 ‘땅’.
-경영에는 관심 없는 ‘엄마’.
-지주 회사인 농업 법인을 ‘물려줄 생각이 없는’ 외할머니.
-한껏 몸이 달아오른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의 친가는 ‘중소규모 건설사’.
……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키워드가 이어지는 순간.
류세연은 이 맞선의 이유와 작은아버지가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을 깨달았다.
지주 회사인 임옥분 농업 법인의 진정한 가치는 카지노, 호텔, 리조트의 지분이 아니었다.
제주도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강원 등 전국 곳곳에 소유하고 있는 엄청난 땅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천호 그룹과 손을 잡고 이 땅들을 개발하려 한다!
외할머니가 지주 회사인 농업 법인을 물려줄 것 같지 않자, 작은아버지 스스로 물려받을 회사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걸리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
천호 그룹이 재벌이라지만, 이세계 도로건설 계획하나 폐기된 거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것에서 보듯 그 뿌리가 튼튼하지 못하다.
당연히 제주도에 있는 엄청난 가격의 땅을 매입 후 개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땅을 투자하고 개발이익을 나눠 먹는 방식으로 진행할 텐데.
이건 땅 주인에게는 위험은 크고 이익이 적은 메리트가 없는 사업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하는 순간 어떤 방식으로 땅을 개발하고 위험을 회피해야 할지 순식간에 계획이 만들어졌다.
이때 어깨에 닿는 손길이 있었다.
톡-
류세연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1분도 지나지 않았다.
강화영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과 맞선을 보게 됐는지 자랑하고 있고.
어느새 특급 헌터는 마루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특급 리액션을 하고 있었다.
데굴-
“우와- 진짜로? 그렇게 부자야!?”
데굴데굴-
“우와아! 재벌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어!?”
데굴데굴데굴-
“우와아앗- 재벌이면 자동차도 많겠지!? 누나는 좋겠다! 너무너무 부럽다!”
“후흐흣- 너 어린데도 뭘 좀 아는구나! 재벌은 일반적인 부자랑은 차원이 다른 거야. 돈도 돈이지만 그 영향력이…….”
강화영은 특급 헌터의 리액션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이때 류세연의 어깨를 건드린 천문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 괜찮냐?”
천문석을 보는 순간.
류세연은 머릿속에 떠올랐던 수많은 계획과 생각들을 단숨에 털어 버렸다.
그리고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당연히 괜찮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