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67화>
“원래 일은 힘든 거야.”
특급 헌터는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
“앗! 감뀰이 많이 쌓였어! 알바 엄청 빠르잖아!?”
특급 헌터는 재빨리 손을 움직여 감귤을 다시 상자에 담았다.
이 모습을 본 임옥분 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
원래 일은 힘든 거다.
하루하루 재미없게 반복되는 힘든 일.
이 힘든 하루하루가 쌓여 일주일, 한 달이 되고 돈을 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가족과 먹고 살아가는 게 임옥분 여사가 아는 삶이었다.
힘든 하루하루가 쌓여야 웃을 수 있는 삶이 되기에, 하루하루 매 순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했다.
아직 어린데도 열심히 살아가는 아이.
임옥분 여사는 특급 헌터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이 꼬맹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때 문득 주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 퍼져 있는 조카와 조카며느리, 종손과 일가친척 십여 명.
임옥분의 눈이 닿는 순간 20대에서 4, 50대까지 다양한 나잇대의 친척들은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눈길이 사라지면 어느새 슬렁슬렁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욕심은 가득한데 평생 땀 흘려 힘들게 일해 본 적이 없으니 몸이 따라가지 않았다.
새삼 실망스러웠다.
사실 일은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었다.
자신이 보려 한 건 이 지루한 농사일을 묵묵히 해내는 성실함이었다.
분명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땅값이 폭등하고 돈이 쏟아지자 어느새 성실함을 잃어버렸다.
아쉬웠으나 이 또한 각자의 선택이다.
회사에 한 자리씩 내줘 먹고 살길을 열어 줬으니 할 도리는 다했다.
‘쯧- 아이만도 못한 녀석들.’
임옥분 여사가 내심 혀를 차는 순간.
후두드드득-
우박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천문석이 보였다.
임옥분은 천문석을 보고 다시금 감탄했다.
더 빨라졌다!
타타타타탁-
천문석이 전지가위를 들고 쓱 걸어가면, 자동 수확기가 지나간 것처럼 감귤이 후두둑- 떨어졌다!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가지가 잘려 나간 감귤!
유심히 골라낸 듯 잘 익은 감귤이 나무마다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2년 전 부산의 감귤 농장에서 봤을 때도 대단하더니.
이제는 숫제 날 때부터 감귤 농사를 지은 것처럼 감귤을 수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천문석의 뒤를 특급 헌터가 따라가며 쉴 새 없이 감귤을 주워 담고 있다!
뀰뀰뀰-
열심히 일하는 두 사람.
퍼져서 슬렁슬렁 시간만 보내는 일가친척.
임옥분은 너무나 차이 나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한탄했다.
“이런 꼬맹이만도 못한 녀석들…….”
“……!”
슬렁슬렁 일하던 친척들이 움찔 놀라는 순간.
임옥분은 특급 헌터 앞에 앉아 같이 귤을 담으며 말했다.
“우리 강아지 내가 좋은데 취직시켜 줄까?”
“나 엄청 바쁜데?”
“뭐가 바쁜데?”
“경주 연습도 해야 하고. 러브 시그널도 봐야 해. 그리고 특급 헌터도 해야 해.”
“특급 헌터? 설마…… 너 각성자였어? 아이는 각성 못할 텐데?”
임옥분 여사가 고개를 갸웃하자, 특급 헌터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나 각성자 맞아! 내 힘을 보여 줄게!”
“……!?”
임옥분이 깜짝 놀랄 때, 특급 헌터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나와라!”
“사슴이!”
“반짝이!”
“니케!”
뽈뽈뽈-
커다란 사슴벌레가 몸을 타고 올라오고.
비실비실-
풍뎅이가 하늘을 날아왔다.
사슴벌레와 풍뎅이는 특급 헌터의 어깨에 앉아서 울었다.
구으으-
띠이이-
친구들이 우는 순간.
특급 헌터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봤지!? 나 각성자야! 내가 부르면 친구들이 나타나! 니케는 지금 열심히 오고 있어!”
“…….”
임옥분 여사의 시선이 특급 헌터에게서 천문석에게로 움직였다.
“문석아. 얘 괜찮은 거 맞냐?”
“네. 평소랑 똑같습니다.”
“어때 엄청 멋지지!?”
두 팔을 번쩍 든 특급 헌터가 자랑스럽게 외치자.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어이없어했다.
“쟤가 세연이가 데려온 애라고?”
“뭐 저런 이상한 애를 데리고 와.”
“세연이가 공부만 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인맥을 쌓아야지. 쯧쯧쯧-.”
“저런 꼬맹이랑 놀지 말고 사교 모임에나 나오지!”
“할머님. 제가 세연이를 제대로 된 사교 모임에 소개해 줄까요?”
친척들은 기회라도 만났다는 듯 하나둘 말했고.
특급 헌터는 의기소침해졌다.
“이거 별로야? 엄청 대단한 건데…… 그럼 내가 다른 것도 보여 줄까?”
이 순간 임옥분 여사의 눈에 장난기가 스쳤다.
그리고 터져 나온 탄성!
“엄청난데!”
“굉장한 능력이야!”
“우리 강아지가 진짜! 특급 헌터였구나!”
임옥분 여사는 과장된 어조로 감탄했고 의기소침하던 특급 헌터는 신나게 외쳤다.
“그렇지!? 대단하지! 어디서 부르든 친구들이 온다니까! 니케도 열심히 오고 있어! 카카카-.”
“진짜로? 니케도 온다고 와- 엄청 대단하네!”
“…….”
도대체 뭐가 대단하단 건지 알 수 없는 대화에 친척들 모두가 어이없어할 때.
임옥분 여사가 슬쩍 말했다.
“너 엄청 대단한데. 혹시 회사 하나 맡을 생각 없니? 사장 자리 하나 줄 수 있는데?”
순간 어이없어하던 친척들이 난리가 났다.
“할머니! 사장이라고요!?”
“회장님! 설마 카지노? 리조트!?”
“당고모님! 학교도 안 간 꼬맹이한테 무슨 그런 농담을 하세요!?”
“농담 아니다. 하겠다면 진짜 회사 맡길 거다.”
임옥분은 한다면 하는 사람.
이 순간 모두의 시선이 특급 헌터에게 모였다.
그러나 특급 헌터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열심히 감귤을 농작물 상자에 담고 있었다.
“우리 강아지 사장님 안 할래?”
임옥분 여사가 묻는 순간 특급 헌터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나 바빠서 사장 못해!”
친척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임옥분 여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야? 이 꼬맹이 녀석 더 마음에 드는데. 회사가 별로면 농장을 좀 떼어 줄까……?”
순간 경악한 친척들이 소리를 지르며 안간힘을 썼다.
“으아악- 할머님! 저 두 개! 두 개씩 나르고 있습니다!”
“이야압! 난 할 수 있다!”
……
어느새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모두가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있었다.
임옥분 여사는 뿌듯하게 웃으며 천문석을 봤다.
본인도 만능일꾼인데 데려온 꼬맹이도 아주 맘에 들었다.
역시 사람은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기 마련이다.
임옥분 여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장난스럽게 웃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매일 세연이를 놀리지만.
천문석 이 아이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온 성실함과 자기 사람을 지키는 뜨거운 열정이 담겨 있었다.
서울 안정화 권역이 뚫린 서울사태 때, 천문석이 손녀를 구해 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얼마나 놀랐던가.
뒤늦게 비서실을 움직여 사건의 전모를 듣고는 임옥분은 몇 번이나 감탄했다.
사람들은 임옥분 여사가 땅 보는 눈이 대단해 엄청난 부자가 됐다고 말하지만.
사실 임옥분은 땅보다 사람을 더 잘 봤다.
그런 임옥분 여사가 보기에 천문석은 모든 재산을 줘서라도 꼭 잡고 싶은 사람이었다.
임옥분 여사는 천문석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하- 저 녀석 정말 탐나네.”
이 순간 천문석은 알 수 없는 한기에 흠칫 놀랐다.
* * *
낮에 시작된 감귤 수확은 오후 4시까지 이어졌다.
11시부터 시작해 5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이어진 노동.
으으으으-
전신이 벌겋게 익은 류세연의 친척들이 그늘에 쓰러져 앓는 소리를 낼 때.
턱, 턱-
천문석은 어깨에 걸친 20kg 감귤 상자 2개를 화물차에 실으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 상자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인부의 외침이 들려오고.
‘드디어 끝났다!’
천문석이 탄성을 내지르려는 순간.
특급 헌터가 번쩍 들고 있던 바구니에 담긴 감귤을 쏟으며 외쳤다!
“드디어 끝났다! 맛있는 감뀰! 엄청 많아! 이게 다 감뀰이야! 뀰뀰뀰!”
땀으로 전신이 엉망인데도 두 팔을 번쩍 들고 신나게 외치는 특급 헌터.
“……너 안 힘드냐?”
“전혀! 감뀰 엄청 조아! 반짝반짝 예쁘거든!”
특급 헌터는 당장이라도 다시 하우스로 달려갈 듯 힘이 넘쳤다.
무공을 되찾고, 각성까지 한 자신도 고강도 노동에 정신이 혼미한데 이렇게 기운 넘치는 모습이라니!
‘이 녀석 광합성이라도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진짜로 각성한 건가?’
천문석이 특급 헌터의 정체에 대해서 고민할 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임옥분 여사가 하우스 앞에 나타났다.
“일 끝났냐?”
순간 나무 그늘에 널브러져 있던 친척들이 재빨리 일어나 모여들었다.
“다 했습니다!”
“감귤 상자 수백 개! 모두 날랐습니다!”
“이제야 몸이 좀 풀리는데, 아쉽네요. 하하하-.”
친척들의 속이 빤히 보이는 모습에 임옥분 여사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 할 일 아직 많은데 바로 다음일 시작 할까?”
“…….”
친척들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봤다.
“생각해 보니 애들 학교에서 올 시간이 됐네요.”
“아, 저도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습니다.”
……
류세연의 친척들은 하나둘 꽁무니를 빼더니 순식간에 모두 도망쳐 버렸다.
욕심만큼이나 계산이 빠른 이들이다.
얼굴이 두꺼운 이들이 보기에도 오늘의 승패는 이미 갈렸다.
더 있어 봐야 임옥분 여사에게 미운털만 박힐 뿐.
이들은 다음 기회를 노리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때 화물칸의 감귤 상자를 고정한 트럭 운전기사가 외쳤다.
“여사님. 지금 선별장으로 출발할 건데? 다른 거 더 실을 게 있나요?”
“아니. 오늘은 이걸로 끝이야. 조심해서 운전해.”
탕, 탕-
임옥분 여사는 트럭을 두들기며 외쳤다.
트럭이 출발하고 휑해진 농장에는 임옥분 여사와 천문석, 특급 헌터만 남았다.
특급 헌터는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할머니! 이제 뭐 하면 돼!?”
임옥분 여사는 씨익 웃으며 특급 헌터의 손을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종일 힘들었지? 이제 씻고 밥 먹으러 가자. 문석이 너도 따라와라!”
특급 헌터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개울! 하천에서 씻는 거야!? 혹시 수돗가에서 등목해!? 나 그거 꼭 한번 해 보고 싶었어?”
“너 그런 건 어디서 봤냐? 텔레비전에서 봤냐?”
천문석의 물음에 신나게 외치는 특급 헌터.
“인터넷!”
임옥분 여사는 씨익 웃으며 집을 가리켰다.
“할머니 집에 그거보다 더 좋은 거 있다.”
“더 좋은 거?”
“우리 강아지가 보면 아주 신날 거야.”
그리고 들어간 집.
특급 헌터는 임옥분 여사의 장담대로 환호했고 천문석은 어이없어했다.
“우와아아! 폭포잖아!?”
“……이거 개인 주택 맞아?”
높은 담이 있는 입구를 지나자 한옥과 양옥을 합쳐 놓은 듯한 3층 집이 보였다.
넓은 마당 너머 남향으로 펼쳐진 커다란 대청마루와 그 뒤 문이 활짝 열린 거실이 보였다.
서쪽은 건물로 막혔지만, 동쪽은 탁 트였다.
탁 트인 동쪽.
압도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바위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이 커다란 연못을 이루고, 이 연못에서 흘러나온 물이 하천이 되어 산을 지나 동쪽 바다로 흘러갔다.
이 하천을 따라 줄줄이 이어지는 과수원과 농장들!
녹음이 우거진 과수원, 노란 해바라기 농장, 푸른 배추 농장들이 교차하고 그 끝에서 푸른 바다와 쨍한 하늘이 만났다.
시야를 가리는 건물 하나 없이 바다까지 펼쳐진 대농장!
천문석은 이 농장의 가치가 수천억은 될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보는 건 전혀 달랐다.
지상에서는 녹색의 나무와 노란 해바라기가 교차하고,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이 지나가는 쨍한 여름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이 끝에 펼쳐진 푸른 바다.
넓은 대지와 쨍한 하늘.
그리고 푸른 바다.
여기 앞마당에 서자 이 모든 게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풍경 속 모든 것들이 가슴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휘이이이-
이때 바람이 불어왔다.
신선한 바다 냄새, 짙게 우거진 숲의 냄새, 잘 익어가는 과일의 달콤한 냄새까지.
수많은 냄새가 섞인 바람을 한 호흡 들이켜는 순간, 어째선지 가슴이 설레어 이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천문석은 곧 깨달았다.
이 엄청난 풍경은 임옥분 여사가 평생을 쌓아 올린 삶의 흔적 그 자체였다!
그걸 느낀 순간 설레던 가슴이 뭉클했다.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이 그려낸 아름다운 풍경.
임옥분 여사는 농사의 달인이자 삶의 달인이었다.
이때 바람에 실려 오듯 은근슬쩍 들려오는 목소리.
“세연이랑 잘 되면…….”
“이게 전부 다 내 거가 되는 거야…….”
“고개만 끄덕이면 돼. 자 이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기꺼이!’
한껏 고양된 천문석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우와아아아- 폭포! 알바! 여기 폭포가 있어!?”
특급 헌터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번쩍 정신을 차린 천문석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임옥분 여사가 있었다.
“여사님……?”
임옥분 여사는 눈을 반짝이면 입맛을 다셨다.
“하- 아깝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