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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264화 (265/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64화>

어느새 잠에서 깬 김철수는 피식 웃었다.

정략결혼이라니.

새아버지, 새어 머니, 새 동생뿐만 아니라.

갑자기 생긴 일가친척과 그룹 회장인 김호천 회장까지.

집을 나온 후 지난 5년 동안 천호 그룹 사람들과 엮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사실 몇 번 있기는 했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발명가 ‘김철수 아저씨‘.

그러나 철수 아저씨도 자신처럼 집안과는 소원해진 지 오래였다.

역시 재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5년 전인데, 갑자기 전화하더니 내일 맞선에 나가라니!

‘그러고 보니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철수 아저씨가 넘긴 건가? 요새 연락도 잘 안 되는 데…… 철수 아저씨 혹시 강제로 끌려 갔나?’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김철수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일 있을 맞선이다.

김철수는 맞선 장소에서 첫인사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봤다.

‘안녕하세요. 김철수입니다.’

‘사실 제가 천호 그룹 3세가 아닙니다.’

‘김호천 회장님의 양손. 그러니까 유통사 사장님의 양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선 상대방의 반응이 좋을 것 같지 않았다.

가장 좋은 상황이라야 점잖게 일어나 나가는 것.

어쩌면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마시던 커피를 뿌릴지도 몰랐다.

김철수는 입고 있는 옷을 훑어봤다.

제주도를 간다는 것에 들떠 자신도 모르게 제일 좋은 양복, 제일 좋은 와이셔츠를 입었다.

“…….”

삶에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입양된 집이 갑자기 재벌이 되고 새아버지, 새어 머니, 동생이 사장님, 사모님, 아가씨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잘 기억나지 않는 보육원 시절부터 수십 년.

언제나 열심히 살아온 김철수는 알고 있었다.

사람은 언제나 계획을 세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김철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비싼 양복이 아닌 싼 옷으로 갈아입고.

-맞선 자리에는 냉수를 두 잔 미리 시켜놓는다.

-그리고 비싼 식사나 차를 마시기 전에 정확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현재 상태를 알려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다.

흐흐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웃음.

사모님, 사장님. 그리고 김호천 회장님은 자신의 계획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불 같은 분노를 터트릴지도 모른다.

김호천 회장의 분노.

천호 그룹에 적을 둔 모두가 벌벌 떨 것이다.

그러나 김호천 천호 그룹 회장님이 화를 낸다고 해도 김철수 자신에게는 1도 타격이 없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김철수는 천호 그룹에 기대하는 게 없기에 김호천 회장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두려웠다.

천문석.

최고의 알바 동지이자, 김철수 사무실의 공동 경영자!

‘하- 문석이 녀석. 내가 재벌 3세인 거 알면 장난 아닐 텐데…….’

힘든 알바를 같이하며 재벌 2세가 되고 싶다는 말을 100번은 했다.

다음 생에는 꼭 부잣집, 가능하면 재벌 3, 4세로 태어나자며 낄낄거린 적도 수없이 많았다.

그랬던 형이 알고 보니 재벌 3세다.

이 순간 김철수는 경악한 천문석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와! 철수 형! 어떻게 그런 걸 속입니까!?’

아니지, 천문석 자신이 본 녀석이라면 간사하게 웃으며 바로 충성 맹세를 할 수도 있었다.

두 상황 모두 최소 삼겹살 10번에 소고기까지 한두 번은 사줘야 할 정도의 사안이었다!

말이 재벌 3세지, 호적에도 오르지 않은 개털인 자신에게는 엄청난 타격이다!

‘절대 들키면 안 된다!’

김철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철수는 피식 웃었다.

“문석이랑 제주도에서 만날 리가 없지.”

그렇다!

천문석, 자본 주의의 화신 같은 녀석이 물가가 미친 성수기 제주도로 휴가를 올 리는 없었다!

재벌 3세(명목상)인 자신도 제주행 일반석 항공권을 사며 몇 번이나 고민하지 않았던가!?

그냥 맞선 날짜를 2, 3일 미루고 부산에서 배를 탈까 하고!

하하하-

김철수가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기내 방송이 시작됐다.

[…… ]

귀마개를 뽑자 좌우에서 울음과 웃음이 천장에서는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으아, 으아앙-.”

“후흐흐훗- 간지러 하지 마-.”

[……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의 도시 제주에 이제 곧 도착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은…….]

김철수는 기지개를 켜며 생각했다.

맞선 따위 빠르게 해치워 버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다.

명목뿐인 재벌 3세가 아닌 김철수 사무실의 김철수 사장으로!

김철수는 비행 중에 꿨던 꿈은 이미 잊은 후였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지금이다.

현실인지 망상인지 모를 꿈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게 따로 있었다.

“음…… 흑돼지 삼겹살을 먹을까? 아니면 은갈치 조림을 먹을까? 둘 다 먹는 건 너무 사치스럽겠지?”

김철수는 점심 메뉴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제주 국제공항 밖으로 나온 네 사람.

천문석, 류세연, 특급 헌터, 제임스.

제임스를 본 직원이 재빨리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차량 준비됐습니다. 팀장님.”

“수고했다.”

대기 중인 장갑 SUV로 걸어가는 도중 특급 헌터는 연신 주위를 살폈다.

“너 뭐 찾냐?”

천문석의 물음에 특급 헌터는 이상하다는 듯 대답했다.

“니케가 아직 안 왔어. 왜 이리 늦지?”

“니케? 그 다람쥐? 너 목에건 그 상자 안에 있는 거 아냐?”

“아니. 여기는 특급 사슴이랑 특급 반짝이만 있는데.”

“……!”

“니케! 어디 있어!?”

특급 헌터가 외치는 순간 천문석은 물었다.

“……너, 설마. 니케한테 서울에서 여기까지 날아오라고 한 거냐?”

“당연하지! 니케 엄청 빨라!”

천문석은 이게 왜 당연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서 제주도라니!

거리도 거리지만 중간중간에 있는 마수와 몬스터, 위험지대를 생각하면 그 작은 다람쥐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무사히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

아무래도 니케를 다시 보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때 주차 중인 장갑 SUV에서 투피스 정장 차림의 여성이 내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제주도에 계실 동안 모실 이혜민. 이 비서입니다!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시면…….”

주위를 살피던 특급 헌터가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이 비서 누나님! 부탁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면 됩니다. 도련님.”

이 비서는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니케가 안 보입니다!”

“니케요? 일행분이신가요? 바로 조치하도록…….”

“니케는 훌륭한 다람쥐입니다!”

“네? 훌륭한…… 다람쥐요?”

“잠시만요!”

특급 헌터는 메고 있던 배낭을 내려놓더니 지퍼를 내리고 가방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이건가? 아닌데. 이것도 아니고…… 앗! 찾았다!”

손을 빼자 나타난 익숙한 신발.

특급 헌터는 이 비서에게 꺼낸 신발을 건넸다.

“이게 니케 집입니다!”

“…….”

NIKE 신발을 받아 든 이 비서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특급 헌터와 천문석을 차례로 봤다.

몰래카메라라도 찾는 듯한 시선이 닿는 순간 천문석은 말했다.

“야, 너 그 신발이 아니라 니케를 데리고 왔으면 됐잖아? 왜 니케 집만 넣어 온 거야?”

“어, 어어!”

특급 헌터가 깨닫는 순간.

장갑 SUV 운전석 문을 연 제임스가 외쳤다.

“타라. 바로 출발하자.”

“도련님이 니케를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비서가 말했지만, 제임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가자.”

이 순간 터져 나온 외침.

“전혀 안 괜찮아!”

“난 니케가 올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특급 헌터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특급 헌터는 신발을 품에 안더니 재빨리 가로수로 달려가 매달렸다.

쓰윽, 쓰으윽-

짧은 팔다리를 몇 번 움직이자 순식간에 가로수 높이 올라가는 특급 헌터.

“저기 봐! 꼬맹이가 나무에 매달렸어!”

“뭐지? 지금 뭐 사달라고 떼쓰는 건가?”

“와 바닥에 눕는 건 자주 봤는데 가로수에 매달리는 건 처음인데!?”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

“…….”

“…….”

천문석, 제임스, 이 비서가 돌연한 상황에 말을 잇지 못할 때.

류세연이 차에서 내려서 외쳤다.

“내비 목적지 설정 다 됐어요. 이대로 운전하면. 어? 삼촌 쟤 뭐 하는 거야?”

“니케. 기다리고 있다.”

“……뭐?”

류세연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가로수로 다가갔다.

“세연! 난 절대로 설득되지 않아!”

특급 헌터는 씩씩하게 외쳤다.

그러나 류세연이 나무 아래에 도착하고 잠시 대화하자.

“알았어! 세연!”

특급 헌터는 단숨에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 와 번개같이 배낭을 메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빨리빨리 움직여! 왜 이리 느려!”

“…….”

장갑 SUV는 곧 출발했고, 특급 헌터는 신난 얼굴로 연신 외쳤다.

“재밌겠다! 얼른 했으면 좋겠어!”

천문석은 류세연에게 물었다.

“너 쟤한테 뭐라고 했냐?”

“한 번도 못해 본 거 시켜 준다고 했어.”

특급 헌터도 애는 애였다.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게 뭔데?”

류세연은 씨익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우스 감귤 수확.”

“……너 방금 뭐라고 했냐?”

“하우스 감귤 수확.”

감귤 수확!?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진 천문석은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확인했다.

“……세연아. 혹시 제주도에도 김옥분 여사님 감귤 농장이 있냐? 아니지? 땅값이 미친 수준인 제주도에 감귤 농장이라니. 하하- 아니지?”

류세연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있어.”

“……!”

이 순간 천문석의 머릿속에서 예전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감귤 수확은 크게 두 가지 일로 나뉜다.

-감귤 따기.

-감귤 나르기.

숙련된 감귤 노동자가 하루 600kg 정도의 감귤을 딴다.

농산물용 노란색 플라스틱 상자 하나에 20kg 정도의 감귤이 담기니, 하루에 30개 정도의 농산물 상자가 나온다.

20kg 농산물 상자 30개 나르기.

할 만한 거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었다.

농장 규모에 따라서 나오는 감귤의 양이 천지 차이다!

천문석은 부산에 있던 임옥분 여사의 감귤 농장을 떠올렸다.

그 거대한 하우스 감귤 농장!

임옥분 여사님은 농사의 신이었다!

혼자서 하루에 1000kg의 감귤을 따고, 다른 일꾼까지 모두 합하면 하루에 10,000kg에 가까운 감귤이 쏟아져 나왔다!

10,000kg, 10톤!

20kg 농산물 컨테이너 500개 분량!

아무리 강철이 단단해도 망치로 끝없이 내려치면 끊어지는 것처럼.

알바로 단련된 숙련된 일꾼도 뒤질 정도로 힘든 미친 노동강도다!

“우리 지금 감귤 따러 가는 거였어!?”

경악한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류세연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삼촌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비행기 탈 때 말했잖아. 항공권 공짜로 얻었다고.”

“그게 무슨…….”

순간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는 기억.

일등석 항공권을 본 자신이 놀라자, 류세연은 일등석 항공권을 공짜로 얻었다고 말했었다.

당연히 류세연 어머니의 마일리지로 지른 건 줄 알았는데…….

이게 임옥분 여사가 보내 준 항공권이었던 거야!?

이 순간 천문석은 진실을 깨달았다.

공짜 일등석 항공권은 최고의 휴양지 제주도로 가는 티켓이 아니었다.

극한 알바! 감귤 농장 수확 일꾼이라는 지옥행 티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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