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63화>
천문석과 일행의 일등석 탑승이 끝난 후 일반석 탑승이 시작됐다.
휴가, 업무, 카지노.
수많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제주도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배낭을 멘 김철수가 끼어 있었다.
“와- 제주도 가는 사람이 뭐 이리 많아?”
김철수는 주위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감탄했다.
성수기 제주도행 항공권.
그것도 전날 밤에 표를 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김철수는 엄청난 웃돈을 주고서야 간신히 항공권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여행을 가다니…….
자신보다 먼저 표를 구했어도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거다.
어쩐지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것만 같았다.
이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앞에 분 빨리 좀 움직여 주세요.”
“앗, 죄송합니다.”
김철수는 재빨리 좌석을 찾아 움직였다.
“잠시만요, 지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김철수는 비좁은 좌석 한가운데로 간신히 들어가 앉았다.
앉는 순간 좌우에서 들려오는 소리.
으아, 으아앙-
왼쪽에는 신나게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가.
“아이, 이따가.”
오른쪽에는 얼굴을 맞대고 간지럽게 웃는 커플이 있었다.
울음과 웃음.
인간 감정의 극단이 좌우에서 동시에 쏟아지는 정신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김철수는 강철 같은 사나이었다.
전동공구로 정유관에 굳은 화학 슬러지를 깨던 때에 비하면 이 정도 소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김철수는 바로 귀마개를 하고 배낭을 품에 안은 채 머리를 좌석에 댔다.
이 순간 김철수는 순식간에 잠들고 꿈을 꿨다.
김철수 사무실 사장.
키즈 카페 점장.
수많은 알바.
대학 입학.
고등학교 졸업식.
중학교 졸업식.
새로 생긴 가족들.
전쟁고아 보육원.
……
시간을 거스르듯 과거로 이어지는 장면들.
그리고 오랫동안 여러 번 꿨던 꿈이 다시 시작됐다.
‘이 꿈은 오랜만이네…….’
스치듯 떠오르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실제 있었던 기억인지 상상인지도 모호하고, 자신이 겪은 일인지 관찰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꿈.
모든 게 불확실하고 모호한 경계 선상에 걸친 꿈속으로 김철수는 빠져들었다.
……
까마득한 하늘, 폐허가 된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커다란 강이 관통하는 이 거대한 도시 곳곳에서 화염과 연기가 치솟고.
거인이 흙장난하듯 도시 곳곳에서 자욱한 먼지가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들려오는 굉음.
쿵, 쿵, 쿵-
도미노가 쓰러지듯 잇달아 쓰러지는 빌딩과 무너지는 아파트!
크아아아아-
물리력마저 가진듯한 포효가 울려 퍼지는 순간.
자욱한 먼지가 단숨에 사라지고 수백 미터 빌딩조차 내려다보는 거대 괴수가 나타났다.
쿠우웅, 쿠우우웅-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칠 때, 대지를 달리는 수많은 마수들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끼이이이익-
크아아아아-
거대 괴수와 수많은 마수, 몬스터로 부서진 도시.
이곳은 처음 게이트가 열린 서울이다.
이때 문득 장면이 전환되어 부서진 건물 잔해 와 박살 난 자동차가 나타났다.
상수도관에서 치솟은 물이 강처럼 도로 위를 흐르고, 끊어진 전기선이 타닥타닥- 번뜩이는 섬광을 내뿜는다.
시간은 이른 오후.
그러나 곳곳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자욱한 먼지로 하늘이 가려져 시가지는 어둑어둑했다.
이 어둑어둑한 폐허에 어린아이 한 명이 나타났다.
타다다닥-
몸에 안 맞는 커다란 담요 같은 옷을 걸치고, 두 손을 꼭 쥔 채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를 달리는 꼬마.
꼬마는 박살 난 건물 잔해를 밟고 잽싸게 달리다가, 펄쩍 뛰어 벽에 걸린 간판을 밟고 창으로 쏙 들어갔다.
건물 안 계단을 순식간에 올라 건물 옥상으로 나오는 꼬마.
꼬마는 옥상 난간 위를 달려 주저 없이 다른 건물로 뛰어넘었다.
이렇게 옥상을 뛰어넘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 더 뛰어넘을 옥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
꼬마는 빗물관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화물차 위에 내려섰다.
텅-
이 순간 터져 나오는 포효!
크아아앙-
눈이 붉게 충혈된 들개 마수 십여 마리가 꼬마가 뛰어온 거리에서 튀어나왔다.
킁, 크킁-
냄새로 사냥감의 흔적을 찾더니 번쩍 고개를 드는 들개 마수들!
들개 마수들의 시선이 화물차 위에 있는 꼬마에게로 향했다.
우워어어어-
들개 마수들은 일제히 하울링을 하더니 화물차 위에 있는 꼬맹이를 향해 달렸다.
화물차는 순식간에 들개 마수들에게 포위됐고 꼬맹이는 당황한 듯 우뚝 멈춰 섰다.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고 하늘을 봤다.
검은 연기 사이로 보이는 조각난 푸른 하늘.
꼬맹이는 고개를 내려 주위에 가득한 마수들을 바라봤다.
쿵, 쿵, 쿵쿵-
십여 마리의 들개 마수들은 화물차로 몸을 던졌고, 화물차는 당장이라도 전복될 듯 거칠게 흔들렸다.
꼬맹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들개 마수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아직도 꼭 움켜쥔 손을 보았다.
타다다다당-
이 순간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지고 부서진 건물과 잔해 곳곳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 아이가 고립됐다! 화물차 위!”
“사선 아래로 유지해! 도탄 된다!”
“점사! 점사로 화망을 만들어!”
들개 마수들이 본능적으로 좌우로 뛰어 쏟아지는 총탄을 피하려 했으나 사수들은 능숙했다.
점사로 날아가는 예측 사격이 들개 마수들의 몸통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타다다당-
깽, 깨개갱-
총격을 받은 들개 마수들은 탄환에 실린 충격량에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반발장에 닿는 순간 탄두에 실린 충격량은 확 죽어 버리고 궤적이 비틀린다.
들개 마수들이 바닥을 구르고는 있지만, 탄두가 육체를 관통하지는 못했다.
단 한 마리도 치명타를 입지 않았고 공격성도 금세 살아났다.
깨갱거리던 들개 마수들이 하나둘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릉-
이때 다시 한 번 터지는 외침!
“안 먹힌다!”
“이놈들 마수다!”
“그물! 야, 그물 가져와!”
“하 시바- 뭐 죄다 마수야!?”
다급한 외침이 터지고 사방에서 던져지는 그물!
강철을 꼬아 만든 그물에 들개가 뒤엉키는 순간 피 끓는 외침이 터졌다.
“지금이다! 모두 가자!”
“그물 끊기면 끝장이다!”
“한 번에 달려들어 마무리한다!”
“시바-! 이 미친 짓을 또 하다니!”
으아악-
시바아알-
피와 흙으로 엉망이 된 군복과 두꺼운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달려 나와, 강철 그물에 걸린 들개를 군화와 등산화로 내리찍었다!
“빨리 밟아!”
“반발장 깎아내야 한다! 짓밟아!”
퍽, 퍼벅, 퍽-
깽, 깨갱, 깨앵-
그리고 피 끓는 기합과 함께 대검과 야전삽, 해머가 떨어져 내렸다.
으아악!
이야약!
게이트에서 쏟아진 마수와 몬스터와 몇 번이나 싸운 이들은 총탄은 먹히지 않아도 두 손으로 쥔 근접무기는 어느 정도 먹힌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지배력 때문이었다.
이들의 근접무기에 총탄의 위력마저 줄이던 마수의 반발장이 뚫렸다.
대검과 야전삽, 망치가 들개 마수의 몸에 박혀 들기 시작했다.
깨애애앵-
치솟는 피와 으깨지는 뼈.
고통스러운 울부짖음.
사방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강철 그물에 뒤엉킨 십여 마리의 들개 마수를 단숨에 끝장냈다.
그리고 화물차 위에 멀뚱멀뚱 서 있는 꼬맹이에게 다가왔다.
“헉, 허억- 꼬맹이 괜찮냐?”
“야, 너 부모님은 어디 있냐? 헉-.”
“이 녀석 쇼크 온 거 같은데?”
“너 이름 뭐야? 이름 생각나?”
이때 무표정한 꼬마의 얼굴에 표정이 생겨났다.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더니 하늘을 보다가 시선을 내려 움켜쥔 두 손을 봤다.
이때 다시 한 번 질문이 들려왔다.
“너 이름이 뭐야?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나는…….”
꼬마가 문득 고개를 들고 입을 여는 순간.
꿈꾸던 김철수는 작은 소리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나 이 순간 예전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
크아아아아아-
엄청난 포효가 꼬마의 목소리를 지워 버리고, 물리력이 담긴 듯한 포효에 사람들이 휘청였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폭음!
펑, 퍼벙, 펑펑-
포효가 들려온 곳에서 잇달아 굉음이 터지고 먼지구름이 치솟았다!
“상급 마수!?”
“당장 도망쳐! 이곳으로 오고 있다!”
“잠깐! 아이부터!”
“꼬마야 뛰어내려! 당장 도망쳐야 해!”
다급한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화물차 위의 아이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야가 변했다.
관찰자가 되어 아이를 보던 김철수는 이 순간 아이가 되어 멀리서 다가오는 강대한 마수를 느꼈다.
분노가 담긴 포효!
모든걸 단숨에 짓이겨 버릴 거대한 힘이 포효에서 느껴졌다!
이 순간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폐허를 뚫고 나타나 아이에게 달려드는 마수!
-달려드는 마수에 겁먹은 듯 굳어 버린 아이.
-아이를 향해 몸을 날리는 군인!
“꼬마야! 숙여!”
누군가에게 채여 데굴데굴 구르는 순간 시야가 어두워지고 장면이 끊겨 버렸다.
“뒤로 빠져! 내가 시간을 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끝으로 폐허를 달리던 아이의 꿈은 끝났다.
……
그리고 김철수의 오래된 기억이 하나둘 꿈으로 나타났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성당에서 운영하는 게이트 전쟁고아 보육원에 들어가는 게 시작이다.
보육원에서 생활했을 때의 일들은 몇 가지 말고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드문드문 며칠, 몇 달을 뛰어넘어 짧게 이어지는 기억들.
소풍 때 수녀님이 싸준 김밥이 눈물 나게 맛있었고, 매일 수많은 아이가 보육원에 들어오고 또 나갔다.
우울한 얼굴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헤어진 엄마, 아빠를 찾으며 엉엉 울었다.
그리고 이따금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게 기억난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군복을 입었고, 다음에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는 정장을 입고 찾아와 선물을 잔뜩 안겨 줬었다.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 사람은 일 년에 한두 번 드문드문 찾아오더니 어느 날부터는 찾아오지 않게 됐다.
아마 그때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무렵 자신의 일상에도 변화가 시작됐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온 보육원, 수녀님은 김밥이 가득 담긴 봉투를 가방에 넣어 주며 말씀하셨다.
‘입양을 가게 됐다고.’
보통 나이가 많은 경우 입양이 쉽지 않은데 용케 입양을 가게 됐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도착한 커다란 집.
키가 크고 억센 인상, 눈빛이 형형한 노인이 자신을 훑어보며 말했다.
“듣던 대로 애가 똘똘해 보이네. 둘째 네가 아이가 한 명뿐이지? 네가 맡아라.”
노인의 둘째 아들.
자신의 새 부모님은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리고 5년 동안 이 집안에서 살았다.
천호 건설.
김호천 회장의 양손(養孫).
‘김철수‘로서.
새 부모님에게 김철수는 그룹 회장인 아버지의 명령으로 갑작스럽게 맡게 된 아이였다.
갑자기 생긴 오빠에 어린 동생은 신이 났지만, 부모님은 자신을 껄끄러워했다.
그 이유는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은 자신을 김호천 회장의 사생아, 배다른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껄끄러운 분위기에 매일 눈칫밥을 먹어야 했지만 사실 나쁘지는 않았다.
삶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 가득했고, 눈칫밥 먹는 정도는 즐거운 일들에 비하면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회사가 성장하면서 생겨났다.
작은 건설 회사였던 천호 건설에 갑자기 행운이 이어졌다.
건설, 용역, 유통 온갖 일감이 쏟아지고, 은행에선 막대한 대출을 정부에서는 각종 공사에 천호 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했다.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천호 건설이 그룹이 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천호 그룹이 100대 그룹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새 할아버지 김호천 천호 건설 회장은 천호 그룹 회장이 됐고, 새아버지는 어느새 커다란 유통 회사의 사장이 됐다.
갑자기 가지게 된 돈과 권력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동생은 어디서 본 듯한 재벌 3세가 되고, 새아버지는 그룹 후계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김철수 자신이 시아버지의 사생아가 아니란 걸 알게 된 새어머니는 호칭을 정정했다.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수능을 치고 돌아온 날.
새어머니는 자신을 불러 말씀하셨다.
앞으로는 ‘사장님, 사모님. 아가씨.’라고 부르라고.
그 날 김철수는 집에서 나왔다.
짐은 단출한 배낭 하나가 전부였으나 앞날이 막막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김철수는 이미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휴학과 복학, 알바와 학업을 오가며 즐겁게 살던 중.
어제, 5년 만에 새어머니, 사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은 그룹 총수 김호천 회장의 명령을 전했다.
이미 이야기가 끝난 좋은 혼처가 있으니 맞선에 나가라는 정략결혼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