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59화>
깊은 밤.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을 뜨고 있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상할 정도 몸이 개운하고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다.
방금 깬 꿈.
내용이 기억나지 않은 이 꿈속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기분이 들었다.
천문석은 다시 잠들기 위해 한참을 누워 있었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쉽게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대환단!
천문석은 바로 일어나 침대 아래에서 대환단이 담긴 안전상자를 꺼냈다.
지난 한 달여 연이어 터지는 사건·사고로 빡세게 구르느라 무공을 점검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내일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출발한다.
무공을 점검하고 대환단을 언제 먹을지 결정하기엔 오늘 밤이 딱 이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니.
창밖에 뜬 달로 환한 거실이 보였다.
소파 앞 러그 위에는 대자리를 깔고, 여름 이불을 덮은 류세연과 특급 헌터가 잠들어 있었다.
특급 헌터는 류세연의 배에 머리를 올린 채 퐁퐁검을 꼭 쥐고 잠들어 있었다.
조심조심. 천문석은 두 사람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갔다.
철컥-
천문석이 나가는 순간 고장 나 완전히 닫히지 않는 신발장 틈에서 번뜩이는 안광이 나타났다.
킥, 키킥-
의욕을 잃고 축 늘어져 있던 니케!
니케는 재빨리 신발장 틈에서 나와 방금 인간이 나간 현관문을 노려봤다.
어디선가 본듯한 인간!
저 인간에게서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났다!
아까는 무시무시한 꼬맹이가 눈을 부릅뜨고 있어서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꼬맹이는 잠들었다!
킥, 키키킥-
‘멍청한 꼬맹이! 내 연기에 속다니!’
이제 무자비한 폭군으로 돌아가 저 수상한 인간의 비밀을 알아낼 때였다!
타닥-
니케는 번개같이 신발장 위로 올라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빛의 날개를 펼치고 공간을 뛰어넘는 순간.
딱-
현관문에 부딪혀 버렸다.
킥-!?
깜짝 놀란 니케는 몇 번이나 공간을 뛰어넘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현관문에 부딪혀 버렸다.
딱, 따닥, 딱딱-
키, 키키킥-
당황한 니케는 두 팔을 번쩍 들고 빛의 날개막을 만들어 냈다.
파스, 파스, 파스슥-
그러나 배터리가 다 된 전등처럼 빛의 날개막은 잠시 깜박이다가 꺼졌다!
깜짝 놀란 니케는 빛의 날개막을 흔들어 물건을 꺼냈다.
탁, 타탁, 탁-
소리만 나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하늘을 날수는 있는데, 빛의 날개막에 어린 빛과 힘이 극도로 약해졌다!
공간을 넘을 수도, 창고의 물건을 꺼낼 수도 없었다!
킥, 키킼키-
‘왜 이래? 왜 안 되지!?’
니케가 당황하는 순간 들려오는 잠꼬대 소리.
“……샐러드 맛없어…….”
이 순간 니케는 깨달았다.
몸에 남았던 힘이 저 무시무시한 꼬맹이한테 맞으면서 사라졌구나!
뀨, 뀨뀨-
니케가 비틀거리며 눈물을 찔끔 흘리는 순간.
하늘 고래의 힘이 담긴 파동이 나뭇가지에서 흘러나왔다.
퐁, 퐁, 퐁-
니케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
분명 저 나뭇가지에 케페니안의 빛을 불어넣었다!
킥, 키키킥-!
‘내 빛!’
니케는 번개같이 꼬맹이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케페니안의 빛이 담긴 나뭇가지에 손을 올리고 힘을 썼다.
그러나 분명 자신이 불어넣은 힘인데도, 나뭇가지에 들어간 케페니안의 빛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키, 키키킥-
‘내놔! 내 거란 말야!’
니케는 수상한 인간을 뒤쫓겠다는 생각도 까먹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담긴 케페니안의 빛이 천천히 움직인다!
개미가 기어 오듯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는 힘!
킥, 키킼-
‘된다! 되고 있어!’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마침내 물방울이 뚝 떨어지듯 케페니안의 빛 한 방울이 픽- 몸으로 흡수됐다!
킥-!
이 순간 느껴지는 엄청난 성취감!
니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든 꼬맹이를 내려다보며 맹세했다.
내가 힘을 모두 되찾는 날!
무시무시한 공포를 맛보게 해 주마!
그러나 오늘은 너무 힘들었다.
힘든 일을 한 자신에게 상을 줘야 했다.
니케는 펄쩍 날아올라 탁- 찬장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찬장 위 몰래 뚫어 놓은 구멍으로 들어갔다.
꼬맹이는 육포가 사라졌다고 이상해하며 찬장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육포를 찾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 너무나 맛있는 육포는 이미 자신이 숨겨 둔 뒤였으니까!
니케는 능숙한 솜씨로 구멍 속에 몰래 숨겨 둔 맛있는 육포를 하나 꺼냈다!
냄새만 맡아도 행복한 최고급 육포!
킥, 키킼-
신나게 웃은 니케는 신발장 안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맛있는 육포를 먹고 행복한 얼굴로 쿨쿨 잠들었다.
너무너무 맛있는 육포를 먹은 니케는 당연하단 듯이 지금 하려던 일들을 까먹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수상한 인간의 심문.
조금 열린 방에서 느껴지던 뭔가 익숙한 느낌 확인.
그래서 니케는 알 수 없었다.
천문석이 안전상자에 넣어 둔 대환단.
침실 협탁 위에 놓인 잡낭 안에 들어 있는 맛없는 사탕, 마안.
그리고 너무나 절실히 찾아다니던 143개의 보물 도토리.
케페니안의 빛을 담은 143개의 보물 도토리가 10초도 안 걸리는 거리. 바로 옆 방 침대 아래 무장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이 모든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던 니케는 맛있는 최고급 쇠고기 육포를 먹고 행복한 꿈을 꾸며 잠들었다.
* * *
간만에 새벽의 옥상에 나온 천문석은 깊게 심호흡했다.
바로 옆에 있는 산에서 불어오는 숲 내음 가득한 바람, 난간 너머로 펼쳐진 화려한 시가지.
옥상 위를 환하게 밝힌 달빛.
변한 것 없이 모두가 예전 그대로였다.
어쩌다 보니 매번 옥상에서 무공 수준을 점검하게 된다.
천문석은 대환단이 담긴 안전상자를 난간 위에 내려놓고 가볍게 마종권의 마보를 밟고 일기일원공을 일으켰다.
뜻하는 순간 어느새 심상 공간의 기경팔맥을 흐르는 일기일원공의 내력!
문득 생사팔문의 보법을 펼치는 순간.
건곤감리, 사면(四面)을 밟고, 손진태감, 사각(四角)으로 나아간다.
반전하는 생문과 사문의 틈.
생사의 간극을 밟아나가는 생사팔문의 보법이 끊김 없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오래전 훔쳐 냈던 생사팔문의 보법.
이 보법의 부족함이 어느새 채워져 있었다.
‘이거 잘하면 내력과 외력을 이을 수 있겠는데?’
생각하는 동시에 천문석은 양손을 펼쳤다.
왼손이 천지를 잇는 순간.
쿠르르르-
허공을 뒤흔드는 굉천수의 우레가 터지고!
오른손이 천지를 가르는 순간.
파르르르-
공간을 무너트리는 구인창의 와류가 생겨났다!
천지를 잇는 왼손의 굉천수.
천지를 가르는 오른손의 구인창.
두 손이 하나로 합쳐지는 동시에 펼쳐지는 도법!
관음천수도!
하늘 끝에서 땅끝까지 닿지 않는 곳이 없는 관음천수도가 펼쳐지는 순간.
육체의 감각이 올올이 깨어나고, 영체의 영안이 번쩍 눈을 뜬다.
영안이 눈뜨는 찰나의 순간, 천지 만물에서 풍겨 오는 관음의 향!
정신이 끝없이 확장되어 천지 만물을 내려다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또한 무공의 일각(一角)일 뿐!
천문석은 관음에 쏠리는 마음을 다잡아 기경팔맥에 마음을 두었다.
일기일원공이 기경팔맥을 격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이 순간 천문석은 하나가 되어 흐르는 일기일원공을 둘로 나눴다.
일기공과 일원공.
그리고 일기공과 일원공을 두 다리 삼아 나아갔다.
시작은 기경팔맥의 내력(內力)이다.
기의 바다 기해혈에서 시작된 내력의 강이 가파른 계곡으로 쏟아지는 거친 격류가 된다.
일기공과 일원공. 심법의 두 다리로 쏟아지는 거친 격류를 타고 단숨에 비상하는 순간.
천문석의 왼손과 오른손.
굉천수와 구인창.
관음천수(觀音千手)를 그리던 두 손이 맞닿았다.
짝-
이 순간 천문석의 각성력이 움직였다.
영육과 혼백 사이에서 자라난 선, 순수한 각성력이 천지간에 가득하나 미동도 하지 않던 기에 닿았다.
각성력이 닿는 순간 전생을 깨우친 후 수많은 시도에도 미동도 하지 않던 천지간의 기가 마침내 움직였다!
멈춘 공기가 흘러 바람이 되고, 고인 물이 흘러 강이 되듯이.
천지간에 가득한 기가 움직여 영맥을 만들어 냈다!
영맥은 외력(外力)이 되어 심상 공간의 기경팔맥에 닿았고.
이 순간 내력을 타고 비상하던 일기공과 일원공이 외력, 영맥을 타고 하늘 끝까지 날아올랐다.
‘심상 공간’과 ‘현실 공간’이 이어지고, 기경팔맥의 ‘내력’과 영맥의 ‘외력’이 이어졌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 샘을 이루고 샘이 강이 되어 흘러 마침내 바다에 닿는다.
그리고 바다에서 증발한 물은 다시 비가 되어 순환한다.
기경팔맥의 내력과 영맥의 외력이 하나로 이어져 무한히 순환하는 고리를 만들어 내는 순간.
일기공과 일원공.
심법의 두 다리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천문석은 눈을 뻔쩍 떴다.
올올히 깨어난 오감과 닫히지 않은 영안으로 세계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어오던 바람이 잠시 멈추고, 쏟아지던 달빛에서 무게가 느껴진다.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무심한 하늘에서 느껴지는 감정, 호기심!
천문석은 깨달았다.
삼성의 일기일원공은 어느새 사성을 넘어섰고.
절정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초절정, 초인경의 경지가 부쩍 다가와 있었다!
* * *
‘뭐가 이렇게 빨라!?’
경지가 오르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
이 정도면 천마 신공 극에 달한 마공을 익힐 때와 비슷한 속도였다.
설마!?
깜짝 놀란 천문석은 영안으로 내부를 관조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영육에 쌓아 올린 전생의 경지는 스러졌으나, 혼백에 새겨진 무업(武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이 무업이 맥동하고 있었다.
영안으로 내부를 관조하는 순간 전생 천마가 혼백에 새긴 무업이 오감으로 느껴졌다.
한걸음에 도산(刀山)을 무너뜨리고, 두 걸음에 검림(劍林)을 뛰어넘는다!
일수에 거대한 괴이를 쳐 죽이고 다시 일수에 대요마를 무릎 꿇리고 몰려드는 마귀무리를 짓밟는다!
들끓는 대지와 불타는 하늘!
끝없는 비명과 피, 분노와 죽음이 몰아치던 마굴을 일직선으로 돌파하던 전생 천마의 압도적인 무위!
이 모든 게 자신이 직접 행하는 것처럼 생생하다!
마치 현실인 듯 생생한 환상 속, 마굴을 달리던 전생 천마가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천문석을 봤다.
눈코입 전신에서 쏟아지는 화광!
전생과 현생, 천마 천문석과 헌터 천문석은 서로를 인지했다.
그리고 전생 천마가 천천히 입을 여는 순간.
“나를…….”
천문석은 재빨리 영안을 닫았다.
전원을 내린 텔레비전처럼 일순간에 반전하는 세상.
슬그머니 눈을 뜨자.
마굴의 환영은 어느새 사라졌고, 하늘의 별, 밝은 달, 시원한 바람 모든 게 전과 같았다.
그러나 마굴의 환영에서 느껴지던 현실감이 심상치 않았다.
천문석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천마 신공의 입문결을 조심스레 떠올려다봤다.
“……!”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단 한 글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때 난간에 놓아둔 작은 안전상자가 보였다.
“…….”
저 안에는 대환단이 담겨 있었다.
원래는 지금 대환단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경지가 오르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잠시 뜨인 영안에 전생 천마의 무업이 맥동하는 것까지 보였다.
아무래도 무공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천문석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봤다.
[대환단을 먹고 초절정의 벽을 단숨에 뛰어넘고 더 나아간다. 결국, 전생 천마가 익힌 천마 신공의 입문결까지 기억해 내 강제로 마공에 입문한다.]
“……!”
천문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공에 입문하면 끝장이다!
건물주가 되면 뭐하겠는가?
마공의 끝은 좋아 봐야 미친놈인데!
천문석은 대환단이 담긴 안전상자를 다시 봤다.
대환단쯤 되는 영약은 정순한 내공으로 정제하기에, 몇 년 보관한다고 약효가 떨어지진 않는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폭발적인 성장기에 대환단을 잘못 먹었다가 천마 신공까지 다시 찾으면 끝장이다!
이 대환단은 지금의 무공이 강해지는 속도가 느려지거나.
초절정의 벽을 넘을락 말락 뒤지게 힘들 때 먹으면 딱이다!
마음의 결정을 한 천문석은 대환단이 담긴 안전상자를 집었다.
대환단은 잠시 봉인이다!
천문석은 바로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옥상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구으-
띠이이-
사슴벌레와 풍뎅이는 어느새 천문석이 대환단을 놓았던 난간 위에 있었다.
스카라베 왕국의 두 채권추심원은 천문석이 사라진 현관문과 화분에 자라난 나무를 번갈아 봤다.
구으, 구으으-?
띠이이, 띠딛딛-?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 도토리 숲의 폭군에게 휘말려 떨어진 이곳에는 이상한 게 너무나 많았다.
-강제로 맹약을 맺는 어린 인간.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나무.
-거래 금지 리스트에 오른 힘을 사용하는 인간.
……
이상한 게 너무 많아서, 도토리 숲의 폭군이 정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구으으-
띠디딛-
사슴벌레와 풍뎅이.
힘을 잃은 스카라베 왕국의 두 신입 채권추심원은 한참 동안 불안하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