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257화 (258/1,336)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57화>

옥탑방 거실.

어느새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온 류세연이 백화점 쇼핑백을 흔들며 외쳤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내가 맛있는 요리 할게. 기대해!”

동시에 신나게 외치는 특급 헌터.

“나도 도울 거야. 기대해!”

오래간만에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집밥이었다.

“그래 기대할게. 맛있게 해라.”

천문석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휘이잉-

열린 창으로 이제는 제법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고,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왔다.

[…… 남중국에 20년 만에 연합이 탄생했습니다. 12개 헌터 군벌은 오늘 협정서에 사인하고 상호 불가침을 확인했습니다. 이 연합의 중심에는 모든 게 베일에 가려진 한 각성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잠시 후 부동산 전문가 한호석 교수님과 함께 심층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대 류세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으로 된장찌개에 돈까스, 초밥 괜찮지?”

마치 마감 세일 물품을 집어 온 듯한 구성.

나쁘지 않았다.

“괜찮아.”

천문석은 가볍게 손을 저어 대답하고 뉴스에 집중했다.

[…… 오늘 첫 소식은 대한 해협에 출동한 일본 해상 자위대 소식입니다. 정체불명의 해상 마수 등장으로 해상 자위대 제4, 5호위대군이 대한 해협에 출동한 지 벌써 일주일째입니다. 여전히 봉쇄는 풀리지 않았고 추가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부산 일대의 부동산…….]

철수 형에게 들었던 남중국 관련 소식과 대한 해협에 출동한 일본의 해상 자위대 출동이 메인 뉴스였다.

신동대문의 몬스터 웨이브, 지하 터널 관련 소식은 뉴스 헤드라인에 언급되지도 않았다.

이 순간 천문석은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블린 평야의 몬스터 웨이브.

-신서울과 신동대문을 잇는 지하터널.

-신동대문의 조폭 길드를 아작낸 난장판.

……

이런 사건들을 겪을 때는 자신이 사건·사고의 중심.

급변하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이렇게 집으로 돌아와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뉴스를 보니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세계에서 구를 때, 세상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남중국의 12개 헌터 군벌을 통합한 각성자 등장!

-해상 자위대가 출동할 정도로 엄청난 해양 마수의 출현!

두 사건 모두 정치, 경제, 해상 물류 유통망이 바뀔 정도로 큰일이다.

자신이 신동대문에서 겪은 일들은, 이 두 가지 대사건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다.

나를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나지도, 내가 이야기의 중심, 주인공도 아니었다.

잇달아 터진 사건·사고는 그냥 우연일 뿐이었다.

이 순간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천문석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캔 맥주를 땄다.

딱, 치이익-

얼음이 얼 정도로 시원한 맥주!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신동대문에서 구르며 쌓인 피로가 단숨에 날아간다.

카아아-

천문석은 탄성을 터트리며 캔 맥주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홀로 건배했다.

“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 기쁜 사실에 건배!”

*   *   *

타타타타타-

훙훙훙훙훙-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과 몸이 밀려날 정도로 강한 바람!

“헬기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악을 쓰듯 소리친 내각 정보실 국내 3부의 직원이 앞장서 헬기로 이동했다.

그 뒤로 신동대문 작전에서 돌아온 후세 케이코 팀장이 따르고 있었다.

지금 이들이 있는 곳은 대한 해협에 전개된 해상 자위대 제4호위대군, 이즈모급 헬기탑재 호위함 갑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이동하는 갑판 한쪽에는 SH-60K 시호크 헬기가 이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후세 케이코는 시호크 헬기에 타자마자 문을 닫고 외쳤다.

드르륵, 탁-

“지금 상황이 어떻지!?”

그러나 헬기 안에 들어왔음에도 엄청난 소음에 목소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내각 정보실 국내 3부의 부하 직원은 바로 헤드폰을 건넸다.

케이코가 헤드폰을 쓰는 순간 헬기 소음이 확 줄어들고 부하 직원의 목소리가 헤드폰에서 들려왔다.

“지금 제4호위대군과 제5호위대군을 전개해 대한 해협과 근해를 막았습니다!”

부하 직원은 보안 태블릿에 선명한 선이 그어진 지도를 띄웠다.

“1차 저지선은 이키섬 - 오시마섬 - 이키쓰키섬 - 나카도리섬을 잇는 선이고.”

“…….”

“2차 저지선은 쓰씨마섬 - 우쿠지마섬 - 후쿠에 섬을 잇는 선입니다.”

“지금 나찰승은 어디에 있지?”

바로 지도 위, 한 곳을 짚는 부하 직원.

나가사키.

“나가사키에 도착한 직후. 나찰승의 이동 경로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북서쪽 쓰시마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할 것 같았는데. 나찰승이 갑자기 산 위로 오른 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정보집약센터에서 예상 이동 경로를 뽑아냈나?”

케이코가 묻는 순간 태블릿 위에 새로운 선들이 그어졌다.

북서쪽 쓰시마를 거쳐 부산으로 이어진 선.

동쪽으로 이동해 본토로 들어가는 선.

그리고 마지막 서쪽으로 이어진 선.

케이코의 손이 서쪽으로 이어진 선을 따라 움직였다.

나가사키를 지나 사세보에서 히라도섬으로 넘어가고, 서쪽 우쿠지마섬을 지나 바다 위로 계속 이어지는 선.

이 선이 끝나는 곳에는 너무나 유명한 섬이 있었다.

제주도.

후세 케이코, 내각 정보실 국내 3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나찰승이 이렇게 움직이면 최악이다!

대한 해협과 규슈 인근 바다에 해상 자위대가 전개하는 걸 주변국들은 의아해할 뿐 특별히 경계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게이트가 하나도 없기에 게이트 안정화 권역 또한 없다.

당연히 엄청난 수의 해양 몬스터를 처리하고 해안가 도시와 해상 물류를 지키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번 작전 또한 정체불명의 해양 몬스터에게서 도시와 해상 물류를 지키기 위해서란 핑계가 먹혔다.

그러나 나찰승이 1, 2 저지선을 뚫고 ‘제주도‘인근 해역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주도는 1차 게이트 사태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단 한 마리의 마수나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은 안전지대다.

게이트 전쟁 초기에는 한국의 정·재계 유력자들이.

안전하다는 게 알려진 이후에는 전 세계의 부호와 유력자들이 제주도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은퇴한 고위 헌터들이 엄청난 재산과 마력 무구, 아이템을 가지고 제주도를 찾았다.

당연히 제주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카지노와 해상 리조트, 수많은 호텔과 경매장이 들어섰고 세계 굴지의 은행 지점이 잇달아 건설됐다.

제주도에 투자된 유력자들의 막대한 자본과 영향력!

해상 자위대가 제주도 근처에 접근만 해도 일본 정부뿐 아니라 재계, 언론계, 헌터계, 시민사회 전반으로 엄청난 압력이 가해질 거다.

나찰승이 제주도에 접근하는 순간 회유 작전은 실패다.

어떻게든 나찰승이 2차 저지선을 빠져나가기 전에 회유해야 했다!

케이코는 태블릿에 띄워진 예상 이동 경로와 1, 2차 저지선, 섬들을 살폈다.

그리고 곧 한 섬을 손으로 짚었다.

우쿠지마 섬.

이곳이 맥이다!

바둑으로 치면 반드시 살려야 하는 대마!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케이코와 부하 직원의 눈이 마주쳤다.

부하 직원은 케이코의 내심을 짐작한 듯 바로 대답했다.

“위에서도 같은 판단입니다. 다른 방향은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나찰승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문제입니다.”

“맞다. 나찰승이 혹시라도 서쪽으로 이동할 경우. 우쿠지마 섬을 통과하기 전에 반드시 나찰승을 회유해야 한다!”

케이코는 바로 명령했다.

“우리 팀은 우쿠지마 섬으로 이동한다! 3팀 전원에게 연락하고! 민속학 교수! 준비한 물품을 모두 우쿠지마로 옮긴다! 서쪽은 우리가 막는다!”

“알겠습니다!”

부하 직원은 바로 헬기 조종사에서 신호하고 대기 중인 팀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타타타타타타-

시호크 헬기가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즈모급 헬기탑재 호위함에서 날아오른 시호크 헬기는 밤하늘을 가르며 남서쪽 나가사키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 순간 내각 정보실, 정보집약센터, 해상 자위대, 민속학 교수 모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들의 목적은 하나, 규격 외 각성자인 나찰승의 회유!

과거 게이트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검은폭풍.

현재 남중국 헌터 군벌의 통합을 이뤄 낸 규격 외 각성자.

규격 외 각성자는 일반 각성자 수백 명이 움직여도 불가능한 일을 해낸다.

어떻게든 일본에 처음 나타난 규격 외 각성자 나찰승을 회유해야 했다!

이렇게 일본의 정부, 군대, 학계가 긴박하게 움직일 때.

이들 모두를 긴박하게 움직이게 한 나찰승은 산에 올라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   *   *

바라카스 발도는 밤하늘을 바라봤다.

검은 하늘에 끝없이 펼쳐진 별.

세계의 나무를 넘어와 별자리는 변했으나, 끝없이 펼쳐진 별이 그려내는 천기는 다름이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천기는 상께서 영혼육백을 태워 키워내신 세계의 나무를 투영한 지도.

상께 봉직하는 샤는 모든 세계에서 천기, 세계의 나무의 지도를 볼 수 있었다.

바라카스 발도는 정식으로 이름을 바치지 않은 반쪽짜리 샤에 불과했지만, 별빛이 그려내는 천기를 보고 길을 찾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천기를 짚어 하늘 고래의 인과가 이어진 곳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시간 전 갑자기 별빛이 어두워졌다.

아니 별빛은 그대로이나 갑자기 천기를 읽을 수가 없었다.

별 앞에 두꺼운 베일을 드리우고, 검은 물감을 하늘에 풀어 놓은 듯.

별 무리가 그려내는 천기가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상을 찾기 위해 긴 시간을 세계의 나무 위를 헤매고 다녔음에도 단 한 번도 겪지 않은 괴사!

바라카스의 전신이 덜덜덜 떨렸다.

끝없는 망망대해에 맨몸으로 떨어진 것처럼,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천 길 낭떠러지 잔도에 눈을 가리고 선 듯, 바라카스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바라카스가 경악하여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순간.

툭-

바라카스의 품에서 낡은 책 한 권이 떨어졌다.

발도 가문의 선조가 남긴 책.

깜짝 놀란 바라카스가 떨어진 책을 줍는 순간 펼쳐진 책에 쓰인 내용이 새겨지듯 눈에 들어왔다.

[…… 면 천기가 흐려진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떨어진 듯 어디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때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대사형에 배워서 그런 게 아니냐고? 그러나 그건 뭘 모르는 것이다. 사실 대사형에 뭘 제대로 배운 것도 없었다. 아니 하나 제대로 배운 게 있었다. 칼 갈기! 검신이 사라질 정도로 칼을 갈아 봤는가!? 와- 지금 생각해도 빡치네. 이런 미친 주정뱅이! 내가 받은 수많은 핍박을 생각하면, 내가 검성이 된 건 내가 잘났기…….]

선조의 책에 적힌 내용 대부분이 그러하듯 맥락 없는 자기 자랑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앞부분의 내용 ‘천기가 흐려진다.’ 이 부분이 자신이 지금 겪는 일과 일치했다!

바라카스는 재빨리 책을 들어 앞장을 훑었다.

[흑전이 나타나면 천기가 흐려진다.]

“흑전!?”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원인을 찾은 바라카스는 인과를 잇는 힘을 일으켜 책을 훑었다.

차르르르-

[…… 하늘이 자아내는 운명은 신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ㅁㅁㅁ들은 운명을 사기 위해 업을 쌓아 하나의 화폐를 만들었다. 검은 동전, 흑전! 그러나 흑전은 만들어 낸 이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쓰였다…….]

[대사형. 그 어이없는 양반은 흑전을 오락실 동전처럼 사용했다. 비극을 희극으로. 울음을 웃음으로. 한나절 꿈일 뿐인 삶에 웃음을 주기 위해서 흑전을 사용했고. 결국…….]

[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때 대사형이 흑전으로 사기를 친 것 같다. 내가 도박에서 진 적이 없는데 그 술주정뱅이 대사형에게 지다니…….]

[둘째 사형은 흑전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을까? ]

[새가 날기 위해서는 바람이 필요하고, 물고기가 헤엄치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천원좌(天元座)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업(業), 인과를 잇는 실. 무심한 하늘은 선악을 구별하지 않으니 선연과 악연, 기연과 마장은 단지 동전의 앞뒷면일 뿐이다.]

[흑전은 일기일원공에 끌린다.]

일기일원공!

이 단어를 보는 순간 바라카스는 다시 한 번 전신을 떨었다.

그러나 이 떨림은 두려움이 아닌 격동 때문이었다.

이 책을 남긴 발도 가문의 선조는 상에게 봉직하는 샤였다.

그러나 샤가 되기 전에 얻은 다른 신분이 하나 더 있었다.

일기일원문.

천원에 닿아 삼천세계를 걷는 자, 천원검.

선조는 천원검을 키워내는 일기일원문의 제자였다!

그리고 일기일원공은 일기일원문의 독문 심법이다.

끝없이 뻗은 세계의 나무 위를 걷는 샤라 할지라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스치지조차 못하는 일기일원문!

바라카스 발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방금 읽은 책의 문장이 튀어나왔다.

[흑전은 일기일원공에 끌린다.]

[흑전이 나타나면 천기가 흐려진다.]

[천원좌(天元座)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바라카스는 문득 고개를 들어 흐려진 천기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하늘의 천기는 흐려지고 대지에는 요마괴이가 들끓는다.

이 순간 바라카스는 흑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흑전은 새가 날아오르기 위한 바람이고, 천 년의 고행을 쌓은 이무기가 승천하기 위한 비다.

업(業)!

흑전은 땅에서 태어난 인간이 천원좌, 하늘에 오르기 위한 바람이고 비였다.

갑자기 천기를 흐리는 흑전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 세계에 일기일원문의 전인이 나타났다는 의미!

경계를 넘어 자라난 세계의 나무 위를 걸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

천원좌에 오를 이가 이 세계에 나타났다!

바라카스 발도는 깨달았다.

일기일원문의 전인을 찾으면 상(上)이 계신 허공도로 단숨에 경계를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천기가 어두워져 인과가 어디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바라카스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선조가 남긴 책에 나온 방법을 사용했다.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땅에 세웠다.

그리고 손을 놓는 순간.

탁-

쓰러져 한 방향을 가리키는 나뭇가지.

“…….”

말도 안 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길을 잃은 바라카스는 더는 고민하지 않고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서쪽!

바라카스 발도가 달리는 방향은 서쪽 제주도가 있는 방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