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23화>
협상 장소로 이동하는 천문석에게 분노한 헌터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칠성파는 어디 있는 거야!?”
“야쿠자 놈들도 전혀 안 보여!”
“이 새끼들 벌써 튄 거 아냐?”
“기다려 봐라. 지금 한국 애들이 인맥 총동원해서 찾고 있다!”
“그냥 삼합회나 아작내러 갈까?”
“거기는 이미 애들이 완전히 박살 냈다고 하더라. 남아난 게 없데.”
“그래? 하- 나도 거기에 끼어야 했는데!”
“그러게 말야! 하- 빨리 찾아서 조져야 하는데!”
……
성난 헌터 무리가 입맛을 다시며 우르르 지나갔다.
최설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대화에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물었다.
“칠성파, 야쿠자 둘 다. 협상 장소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진짜 혼자 가시려고요?”
“난 대화를 우선하는 합리적인 사람이야. 어서 안내나 해라.”
천문석은 적당히 대답하고 최설을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칠성파와 야쿠자가 협상 장소로 모일 충분한 시간을 줘야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계획.
처음은 몬스터 스노우볼을 굴린 범인을 찾기 위해서 시작한 계획이다.
그런데 이 계획이 제멋대로 엉망진창으로 구르고 굴러 신동대문에 있는 수많은 헌터들이 하나로 엮어 들었다.
이렇게 엮어 들어간 수많은 헌터들이 결집해서 분노한 군중이 됐다.
분노한 개인이 모여 분노한 군중이 되면 누군가는 반드시 피해를 본다.
누군가 피해를 봐야 한다면 그 누군가는 당연히 악당들이 되어야 했다.
천문석은 악어 가면에 가려진 얼굴로 웃으며 마지막 계획을 다시 생각했다.
일기일원공은 거의 4성에 달하고, 각성까지 하여 내기와 외기가 어우러졌다.
매일매일 열심히 개고생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경지가 오른 상황!
천문석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
모든 일은 마무리가 깔끔해야 하는 법!
가장 중요한 건 몬스터 웨이브를 눈앞에 둔 지금 헌터들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
거기에 더해 분노한 헌터들이 모두가 만족할 만한 화려한 피날레를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대본을 쓴 이 피날레의 주인공은 칠성파와 야쿠자들이고, 관중은 신동대문에 있는 수많은 헌터들이다.
이때 멀리 피날레 무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청 앞 광장.
헌터들이 사라진 광장은 휑하니 텅 비어 있었다.
마침 이 빈 무대에 관중들을 불러 모을 호객꾼이 눈에 띄었다.
의기소침한 얼굴로 건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익숙한 분위기의 헌터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바로 감이 왔다.
‘도를아십니까‘길드의 호객꾼 헌터들이다!
“최설. 내가 말 걸면 네가 쟤들 뒤를 막아라.”
“네?”
최설이 반문하는 순간, 천문석은 호객꾼 헌터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거기 헌터들. 기운이 아주 선하고 맑은데. 내가 좋은 말씀 좀 전해도 될까?”
“어!?”
“네, 네?”
누군가 자신들과 같은 방식으로 말을 걸어온다는 생경한 경험에 도를아십니까 헌터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
턱-
어느새 뒤를 막은 최설.
“기운이 맑은 친구들 모두 일어나 봐. 저기 골목에서 내가 좋은 말씀 좀 전해 줄게.”
“……저희가 지금 바빠서.”
“다음 기회에 들으면 안 될까요?”
“저는 매일 집에서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있습니다!”
……
순간 최설이 섬뜩한 살기를 뿜어냈다.
“…….”
호객꾼 헌터들이 찔끔해서 입을 닫는 순간.
천문석은 양을 몰아가듯 호객꾼 헌터들을 몰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좋은 말씀은 많이 들을수록 좋은 거야. 금방 끝나니까 빨리빨리 움직여!”
그리고 잠시 후.
따악, 따악, 따악-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몇 번 울리고 난 후.
이마가 볼록 솟아 나온 호객꾼 헌터들이 골목에서 도망치듯 뛰어나왔다.
호객꾼 헌터들은 신동대문 곳곳으로 흩어져 만나는 모든 헌터들에게 천문석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칠성파, ‘칠성 길드’와 규슈 야쿠자, ‘규슈 연합’이 모든 오해에 대해 해명을 한다는 말을!
천문석은 사방으로 달려가는 호객꾼 헌터들을 보며 웃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무대로 관중들이 몰려들 것이다!
“자 가자! 최설!”
천문석은 최설을 앞세워 칠성파의 ‘비밀 창고‘가 있는 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헌터들이 찾고 있는 칠성파는 시청 광장에 바로 접한 비밀 창고에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칠성파는 평소 신동대문에서 헌터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광장 바로 앞에 비밀 창고를 만들어 둔 것이다.
천문석은 곧 광장에 도착했고.
최설은 광장과 접한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기가 협상 장소. 칠성파의 비밀 창고입니다.”
천문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광장에 놓인 벤치에 앉아 주위를 살폈다.
정면에는 시청이 그 옆에는 헌터 부대가 그리고 등 뒤에는 호텔이 있다.
천문석은 만족스럽게 무대를 훑어보다가 호텔에 시선을 뒀다.
지금 시간은 12시 00분.
비밀 창고에서 만나기로 한 2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출연진들이 준비를 끝내고, 관중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릴 때였다.
‘이번 피날레 엠마를 조연으로 부를까 말까?’
천문석은 문득 고민하다가 최설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연을 부를까 말까? 넌 어떻게 생각하냐?”
“…….”
이해할 수 없는 뜬금없는 물음.
그러나 최설은 어느새 이 고수의 종잡을 수 없는 모습에 적응했다.
그래서 당황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 * *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진 호텔 객실.
궁, 궁, 궁-
와아아아아-
희미한 진동과 환호성이 호텔 11층에 있는 객실까지 들려왔다.
빛 한점 들지 않아 어두운 실내에는 서늘한 냉기가 감돌고.
침대에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사람이 누워 있었다.
꿈틀, 꿈틀-
이 사람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뒤척였지만.
와아아아아-
함성이 계속되자.
하아-
곧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침대에서 나와 분통을 터트리는 사람은 천문석과 고블린 평야를 돌파하고 밤새 화물차를 운전한 엠마였다.
엠마는 창가로 다가가 살짝 암막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창밖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도로와 인도, 눈에 보이는 모든 골목과 거리가 기세등등한 헌터들로 요동치고 있었다!
축제처럼 무리 지어 이동하는 헌터들!
게이트가 사라진 신동대문에 축제가 벌어질 리는 없었으니 뭔 일이 터진 거다!
“……!”
이 순간 엠마는 자신도 모르게 한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천문석!”
너무나 강렬한 직감이 든다.
천문석 자신의 고용주가 저 밖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련됐다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때로 결과를 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주사위를 던지면 1, 2, 3, 4, 5, 6중 한 숫자가 나오고.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처럼.
사건·사고가 터졌는데 그 주위에 천문석이 있으면, 99% 그 사건·사고는 천문석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이 지난 한 달여 천문석과 온갖 개고생을 하며 같이 사냥한 엠마가 내린 결론이었다.
엠마는 한참 동안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침대 옆에 자리한 전화기를 봤다.
마력회로 유선 전화기.
게이트가 사라진 신동대문의 유일한 통신 수단이다.
원래 클리셰대로라면 지금 타이밍에 전화기가 울려야 한다.
따르릉-
이 전화를 받으면, 당연한 듯 천문석이 다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야, 엠마! 긴급사태야! 당장 광장으로 나와! 엄청 급해! 빨리 나와!’
처음에야 안 나간다고 버티겠지만…….
지난 한 달 천문석을 겪으며 엠마가 깨달은 이 녀석의 진정한 무기는 ‘설득력‘이다.
엄청난 말빨!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설득되어 고개를 끄덕이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설득된 자신은 허겁지겁 광장으로 달려나갈 테고 천문석과 난장판을 구르며 개고생을 하게 된다.
단지 상상일 뿐이지만, 실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이 상상이 현실이 될 일은 없었다.
엠마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시선을 움직였다.
마력회로 전화기가 놓인 테이블 뒤쪽 벽.
이곳에는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린 선이 있었다.
전화기 코드, 클리셰는 이미 막아둔 상태였다!
하하하-
시원한 웃음을 터트린 엠마는 미소 지으며 광장을 내려다봤다.
“오늘 하루만 좀 쉴게. 천문석 부사장 고생…… .”
헉-
순간 엠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경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11층 호텔 아래, 까마득히 먼 광장 벤치!
한 여자와 나란히 앉아 있는 악어 가면을 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벌떡 일어나 신나게 손을 흔드는 남자!
“……!”
까마득히 먼 거리!
게다가 가면까지 쓰고 있다!
그런데도 엠마는 한눈에 알아봤다!
천문석!
엠마는 잽싸게 암막 커튼을 치고 기겁해서 욕실로 달려갔다.
“이런 빌어먹을!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진짜로 재수 없는 게 옮은 거 아냐!?”
쏴아아아-
엠마는 쏟아지는 물속에 무릎 꿇고 앉아 성호를 그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저희 죄인을 위하여 기도해 주소서…….”
* * *
헌터들이 무리 지어 행진을 시작했을 때, 신동대문 치안청의 수석 보안관은 바짝 긴장했다.
도로망 건설계획이 발표된 후 일어난 여러 사건으로 헌터들 간의 긴장과 갈등이 크게 고조된 시기.
중국계, 일본계뿐만 아니라 다른 국적 헌터들에 대한 불만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치안청은 언제 국적, 인종 갈등이 폭발할지 몰라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고문 도난 사건이 터지고 분노한 헌터들이 행진을 시작했다!
일반인도 아닌 헌터들이 무리 지어 행진하는 것만으로도 위압적이다.
게다가 이곳은 총기류가 엄격히 관리되는 지구가 아닌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이세계다.
자칫 잘못해서 분노한 헌터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끔찍한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신동대문 치안청의 수석 보안관은 치안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완전 무장 후 긴급 출동준비를 했다.
그러나 분노한 헌터 군중들은 특이한 행동 양상을 보였다.
삼합회!
누군가 유도라도 하는 것처럼 타겟으로 삼합회를 찍은 것이다.
“삼합회가 신동대문에 있었다고?”
치안청의 보안관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자리 잡은 삼합회에 어이없어할 때.
헌터 군중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삼합회의 비밀 사무실, 삼합 길드를 공격했다.
격렬하게 치고받는 헌터들과 삼합회의 조폭 헌터들!
이때 치안청 기동대는 출동준비를 마치고, 장갑 버스 10여 대에 시동까지 걸어 뒀다.
단 한 발의 총성. 혹은 화재, 약탈, 강도 비슷한 일만 발생해도 당장 출동해서 모두 제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마조마 기다리는 동안 어느새 삼합회는 아작이 났고, 집결했던 분노한 헌터들은 삼합회 비밀 사무실에서 흩어졌다.
총성, 화재, 약탈, 강도 행위 모두 없었고, 민간인이 다치는 일도 없었다.
삼합회의 조폭 헌터들이 흠씬 두들겨 맞았지만, 다친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흩어진 분노한 헌터들은 다음 타겟으로 칠성파와 야쿠자를 찍었다!
분노한 헌터 군중들이 신동대문 시가지 곳곳을 훑고 다녔지만, 걱정했던 일은 없는 상황.
치안청의 수석 보안관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에 얼굴이 환해졌다.
어차피 조폭 헌터 놈들 좀 두들겨 맞은 건 이야깃거리도 안 된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신동대문의 수사, 기소권을 가진 수석 보안관은 10년 이상 현장에서 구른 닳고 닳은 능숙한 헌터였다.
당연히 수석 보안관은 헌터들의 심리에 정통했다.
어깨를 맞대고 공통의 적을 상대로 싸웠다는 동질감, 전우애는 강력한 감정이다!
삼합회를 아작내며 중국계 헌터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씻은 듯 사라진 상황.
이제 야쿠자를 조지고, 칠성파를 박살 내면 동질감은 더 강해지고 상황도 더 좋아진다.
신동대문에 팽배한 불만과 서로에 대한 불신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다!
수석 보안관은 재빨리 정보원을 총동원해 칠성파와 야쿠자의 소재지를 파악했다.
당연히 미리 대피시킬 생각은 아니었다.
수석 보안관은 분노한 헌터 군중들에게 칠성파와 야쿠자를 먹잇감으로 던져 줄 생각이었다.
조폭 몇 개 날려 버리고 거점 도시, 헌터 간에 싹튼 불신을 처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렇게 운이 좋다니! 야, 모두 장갑 버스에서 내려라! 내려서 편하게 대기해라! 하하하-.”
수석 보안관이 웃음을 터트렸을 때.
긴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칠성파, 칠성 길드와 규슈 야쿠자, 규슈 연합이 광장에서 모든 오해를 해명한다는 소식!
“……얘네들 왜 이래?”
“조폭 놈들이 뭘 잘못 먹었나……?”
보안관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볼 때.
수석 보안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그냥 얻어터지지! 밝히긴 뭘 밝혀!?”
수석 보안관은 잘 풀려 가던 상황이 꼬였다는 것을 직감했다.
칠성파, 야쿠자가 좁은 건물에서 조용히 얻어터지는 것과 넓은 광장에 나타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탁 트여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쏠리는 광장.
광장에 가득한 분노한 헌터 무리 앞에 이들이 나타나면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모른다!
수석 보안관은 보안관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버럭 소리 질렀다.
“야, 이 새끼들아! 어리바리 타지 말고 빨리 기동대 준비해! 상점 유리창 하나만 깨져도 하수도 던전에 처박아 주마!”
얼굴이 하얗게 질린 보안관들이 쉬고 있는 기동대 사이를 달리며 명령했다.
“야! 다시 타라! 다시 타!”
“빨리빨리 움직여라! 빨리!”
“전원 무장 후 장갑 버스 대기한다!”
“하- 시바! 이런 미친 꼴통 새끼들 때문에 뭔 헛짓거리야!”
……
어두운 얼굴로 광장을 살피던 수석 보안관은 헌터 부대에 연락했다.
일이 커지고 있다.
기동대 병력만으로는 모자랄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특임대 타격대를 투입해서라도 시민들을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