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212화>
천문석은 화물차째로 바지선을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하- 이번 헌터일 너무 힘들었어…….”
운전석의 엠마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때,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주위를 살폈다.
해가 완전히 졌지만, 강은 어둡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모든 곳에 환하게 불을 밝힌 뗏목과 뗏목을 끌고 움직이는 마력 엔진이 설치된 거대한 바지선들이 보였다.
바지선 위에는 장갑 SUV와 장갑 버스가 실려 있고 수십 명의 헌터가 타고 있다.
이 바지선과 뗏목 하나하나가 이동하는 이동식 헌터 캠프였다.
수많은 뗏목과 바지선.
고블린 평야의 상황을 전해 들은 다른 사냥터의 헌터들이 어느새 강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천문석의 시선이 환하게 강을 밝힌 수많은 뗏목과 바지선을 지나 강변에 만들어진 교두보로 향했다.
장갑 버스를 이어 성벽을 만들고 이 위에 진지를 만든 교두보.
헌터들은 고블린 평야에 모인 엄청난 수의 마수와 몬스터에 대해 들었는데도, 강변에 만든 장갑 버스 진지를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지선에 실려 도착하는 장갑 버스를 이용해서 진지를 넓히고 강 위에 뗏목을 이어 주둔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가 짐작됐다.
고블린 평야에 고립된 헌터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구출팀이 출발할 교두보가 필요하니까.
이때 문득 마력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구으으응-
살짝 열린 장갑 버스 성문으로 헤드라이트를 끈 장갑 SUV가 하나둘 고블린 평야로 출발하고 있었다.
이 장갑 SUV에는 스스로 자원한 구출팀이 타고 있었다.
스스로 난장판으로 들어가는 헌터들을 보며 천문석은 묘한 감흥을 느꼈다.
화물차로 수십 명의 헌터들을 싣고 달린 자신의 행동은 특별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수와 몬스터로 난장판이 된 고블린 평야로 자원해서 달려가는 수많은 헌터들이 있었으니까.
어쩐지 웃음이 났다.
자신과 비슷한 헌터들이 수없이 많은 이곳은 고블린 평야.
신동대문, 대한민국의 사냥터였다.
* * *
늦은 밤, 갑작스럽게 고블린 평야에서 전해진 몬스터 웨이브 소식에 거점도시 신동대문이 들썩이고 있었다.
성벽을 지키는 치안 병력은 몇 배로 늘어났고.
평소 파티원을 모으던 광장, 술집, 헌터팀, 길드 사무실로 헌터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몬스터 웨이브 소식.
그런데 그 규모와 구성이 심상치 않았다!
최소 수만이 넘는 고블린, 오크, 랩터.
게다가 보기 힘든 천둥 기린 같은 마수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고블린 평야는 이곳 신동대문에서 하루 거리.
평소라면 신동대문의 방어를 걱정했을 규모의 웨이브였다.
그러나 광장과 술집, 인력 사무실. 곳곳으로 모여드는 헌터들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어째선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고.
지금 신동대문 시청에는 헌터 부대 장교들과 대형 길드 집행부가 모여 있었다.
대형 길드와 헌터 부대 모두 거대 괴수를 잡고 마경과 던전을 정리하는 일에서는 전문가들이다.
게다가 이런 전문가들이 하나로 합쳐진 ‘연합 레이드 팀‘이 오고 있었다.
신동대문의 헌터들은 직감했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하늘이 내린 기회다!
연합 레이드 팀이 몬스터 웨이브의 주력을 무너트렸을 때.
사방에서 들이치면 엄청난 헌터 포인트와 마석, 부산물을 얻을 수 있다!
마치 누군가 공들여 차린듯한 밥상이 눈앞에 높이고 있었다.
기회를 포착한 발 빠른 헌터들은 재빨리 장비를 정비하고 마탄과 인원을 모아들였다.
이렇게 신동대문이 대박의 예감으로 들썩일 때.
은밀한 만남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 * *
처음 헌터가 생겨난 게이트 전쟁이래, 헌터는 언제나 힘과 폭력에 가까운 직업이었다.
그렇기에 헌터와 폭력조직은 그 시작이 밀접하게 연관됐고, 특히 중국과 일본은 초기 상황 때문에 폭력조직이 빠르게 성장했다.
남중국.
수많은 마경에 둘러싸인 도시들.
이 도시들을 군벌화된 헌터 조직이 지배하고 그 밤은 헌터 군벌들에게 선을 댄 삼합회가 장악했다.
일본.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안정됐었다.
하지만 게이트 안정화 권역, 안전지대를 만들 수 없어 곳곳에서 무작위로 나타나는 던전과 균열로 전선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다는 것은 이미 옛말.
치안 부재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공권력은 폭력조직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폭력조직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남중국과 일본 모두 게이트가 열리며 폭력조직이 크게 성장했다.
남중국의 삼합회.
일본의 야쿠자.
그리고 두 폭력조직은 헌터를 조직으로 흡수해 힘과 영향력을 빠르게 키워 이제는 어지간한 대형 길드도 범접하지 못할 힘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한국은 남중국, 일본과 상황이 달랐다.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게이트 전쟁 당시.
한국은 사실상 남녀 가리지 않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징병이 시행됐다.
조폭은 폭력의 전문가다.
그러나 참혹한 게이트 전쟁을 겪은 군인, 헌터들과 조폭을 비교하면 어른과 어린아이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조직 폭력배가 같은 사람을 상대로 폭력을 사용했다면.
군인과 헌터들은 사람을 압도하는 마수와 몬스터, 거대 괴수를 상대로 생명을 걸고 싸웠다.
게이트 전쟁이 끝났을 당시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성인 남녀는 모두 총을 잡고 한 번쯤은 마수나 몬스터와 싸웠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서울을 수복한 1세대 헌터들.
이들이 만든 길드가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조폭은 매력 없는 직업이었다. 헌터가 되는 게 경제적, 사회적 대우 모두 월등했다.
이렇게 세계 최초로 ‘헌터 길드‘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며 폭력조직은 설 자리를 빠르게 잃었다.
남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의 폭력조직은 빠르게 소멸했고, 끈질기게 남아 있던 전국구 폭력조직은 하나둘 길드로 탈바꿈했다.
칠성 길드.
광역 폭력조직 칠성파를 전신으로 삼은 이곳도 그런 길드 중 하나였다.
……
칠성 길드의 길드장 마혁진에게 부하가 다가와 보고했다.
“길드장님. 도로에 깔린 차량 때문에, 손님들이 좀 늦어지신다고 합니다.”
마혁진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창가로 움직였다.
호텔 15층.
스카이라운지의 룸.
창밖으로 불이 환하게 밝혀진 신동대문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도로에 가득한 마차와 수레, 차량.
넓은 시청 앞 광장에는 인원을 모으려는 헌터들로 가득했다.
마치 축제라도 시작된 듯 희열에 들뜬 얼굴로 국적 상관없이 몸집 불리기에 여념 없는 헌터들.
어리둥절한 표정의 외국계 헌터들도 이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곧 얼굴이 환해졌다.
헌터들은 하나같이 몬스터 웨이브 소식에 기뻐하고 있었다.!
“미친 새끼들!”
마혁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동대문의 헌터 모두가 고블린 사냥터에서 일어난 몬스터 웨이브에서 한몫 잡을 기대에 들썩이고 있다!
평소라면 칠성 길드도 인원을 모으고 사냥준비에 바빴겠지만…….
“하- 시바. 타이밍. 거지 같네.”
마혁진은 이번 몬스터 웨이브를 기뻐할 수가 없었다.
고블린 사냥터 외곽을 돌며 천천히 굴리던 몬스터 스노우볼!
계획대로라면 다음 주에 스노우볼이 폭발하고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어야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스노우볼이 오늘 터지고 모든 게 엉망이 돼버렸다.
마혁진의 머리에 이 일을 같이한 파트너가 떠올랐다.
야쿠자, 삼합회.
‘규슈 야쿠자‘가 자금을 대고, ‘남중국 삼합회‘에서 인력과 장비를 제공했다.
그리고 한국의 칠성 길드, 칠성파에서 전면에 나서 이름을 내걸고 곳곳에 기름칠을 했다.
칠성파, 삼합회, 야쿠자.
한·중·일의 세 조직이 스노우볼을 굴리고 인위적인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려던 이유는 간단했다.
신동대문의 이권!
게이트가 사라지고 신동대문에 들어갈까 말까, 간을 보는데…….
갑자기 도로망 건설계획이 발표되고 바닥을 쳤던 신동대문의 이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제는 돈이 있어도 사들일 매물 자체가 없는 상황.
이때 칠성 길드는 예전부터 끈이 닿았던 삼합회도 신동대문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우연히 접촉하게 된 규슈 야쿠자 조직.
서로의 이해관계를 확인한 세 조직은 손을 잡았다.
계획은 간단했다.
시작은 한글과 한자, 일본어가 적힌 화살로 고블린 평야에서 몬스터 스노우볼을 굴려서 한, 중, 일 세 나라 헌터들이 치고받게 하는 것.
1단계. 다른 국적 헌터에 대한 반감을 높이고 폭발 일보 직전의 상황을 만든다.
2단계. 반감을 증오로 끌어올린다.
3단계. 해외 투자자와 시청, 헌터 부대, 대형 길드가 모여 도로망 건설 협정서에 사인하기 직전.
팡!
굴리던 스노우볼을 폭발시켜 인위적인 몬스터 웨이브를 만든다!
자본은 분위기에 민감하고, 대규모 해외 투자 자본은 더욱 민감하다.
외국계 헌터에 대한 증오에 몬스터 웨이브까지 일어난다면 상황은 엉망이 된다.
당연히 대규모 투자계획은 철회되고 신동대문의 이권은 다시 폭락한다.
그때 재빨리 폭락한 이권을 쓸어 담는 게 계획이었다.
이걸 위해서 칠성파, 삼합회, 야쿠자 세 조직은 공고문 떼기, 물품 싹쓸이, 헛소문 유포 같은 자잘한 일을 벌이고 사냥터 분쟁을 의도적으로 일으켰다.
계획은 성공해 헌터들의 신경은 곤두서고, 다른 국적 헌터들에 대한 반감이 점점 깊어져 갔다.
이렇게 1단계 계획이 성공하면서, 2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2단계, 결정적 사건.
헌터들이 반감을 넘어 증오를 품게 만들 결정적 사건을!
마혁진은 주먹으로 창을 두들겼다.
쿵-
진동이 퍼져 나가는 강화 유리 창.
창 너머 광장에 가득한 헌터들의 모습이 흔들렸다.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인도…….
국적, 인종 상관없이 뭉쳐서 사냥 팀을 구성하는 헌터들!
헌터는 목숨을 걸고 마수와 몬스터를 사냥한다.
그렇기에 사냥 중에 동료가 죽는다면 분노하고 울분을 터트려도 결국 털어 낸다.
하지만 동료가 다른 헌터의 잘못으로 죽는다면.
피에는 피로!
반드시 보복한다.
이렇게 한번 피가 흐르면 돌이킬 수 없다!
복수의 연쇄.
피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
이게 2단계 계획이었다.
반감을 넘어 증오를 심어 주는 계획!
2단계만 계획대로 됐으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어도, 지금처럼 모든 헌터가 하나로 뭉쳐 대응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런데 피가 흐르고 제대로 증오가 쌓이기 전에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며 모든 게 엉망이 됐다.
강화 유리창 밖 멀리 광장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헌팅 시즌‘이라도 시작된 듯 환한 얼굴로 국적에 상관없이 헌터를 모아들여 몸집을 불리는 헌터팀과 길드들!
이들의 생각이 빤히 읽혔다.
시청에는 헌터 부대 특임대, 대형 길드의 집행위원들이 모여 있다.
이들이 만든 연합 레이드 팀이 몬스터 웨이브의 주력을 박살 내는 순간.
몸집을 불린 저 길드와 헌터팀은 흩어지는 마수와 몬스터를 쓸어 담을 생각이리라.
기껏해야 1, 2만 소규모 몬스터 웨이브나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해지는 소식에 따르면 광활한 고블린 평야 전체가 난장판이 될 정도로 거대한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다.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마수와 몬스터!
평소라면 도망칠 생각부터 했겠지만, 든든한 연합 레이드 팀이 있는 지금 신동대문의 헌터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석과 부산물.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엄청난.
상상을 초월하는 마석과 부산물이 쏟아질 것이다!
엄청난 대박의 예감에 애써 키웠던 반감은 이미 씻은 듯 사라지고 국적과 인종은 나중 문제가 됐다.
헌터는 몬스터를 사냥해서 돈을 버는 사람.
헌터에게 엄청난 수익은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절대 가치였다.
“하- 새끼들 어떻게 스노우볼을 굴렸기에 이렇게 되냐…….”
마혁진이 연락이 끊긴 고블린 평야의 부하들을 생각하며 탄식할 때.
부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알렸다.
“손님 분들이 오셨습니다.”
곧 룸 입구가 열리고 마혁진이 기다리던 파트너가 들어왔다.
남중국 삼합회의 최 선생.
규슈 야쿠자의 대리인 후세 케이코 변호사.
* * *
남중국 삼합회의 최 선생.
규슈 야쿠자의 대리인 후세 케이코 변호사.
칠성파, 삼합회, 야쿠자.
세 조직을 대표하는 셋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인사를 나눈 후 어두운 얼굴로 서로를 보는 사람들.
처음 입을 연 것은 야쿠자 변호사 후세였다.
“상황을 보니 계획은 틀어진 것 같은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삼합회의 최 선생.
마혁진의 예리한 감각에 두 사람의 의중이 잡혔다.
발을 빼려는구나!
그러나 본진이 있어 뒤가 든든한 삼합회와 야쿠자와 달리, 칠성 길드는 이번 일에 모든걸 걸었다.
칠성 길드는 길드장 마혁진이 1세대 헌터인데도 영향력이 엄청난 1세대 헌터 중 한 명에게 찍혀 다른 거점도시에는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곳 신동대문에 기반을 만들어야 했다.
마혁진은 초조한 내심을 감추고 느긋한 얼굴과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겨 본국에까지 영향이 갈까 봐 걱정이시겠죠?”
최 선생과 후세 변호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마혁진을 봤다.
“제가 단언컨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키는 마혁진.
마혁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신동대문 시청 청사 뒤, 헌터 부대 임시 주둔지였다.
삼합회의 최 선생은 눈을 번뜩였다.
“마 선생의 관계(關係)가 저곳까지 이어졌소?”
“시청. 치안청. 헌터 부대. 그리고 특임대. 모든 곳에 제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제가 가장 먼저 알게 됩니다.”
마혁진은 빙그레 웃으며 단호히 말했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기대했던 폭락이 일어날 것 같지가 않군요…….”
후세 변호사가 헌터들로 북적이는 광장을 보며 말끝을 흐리자.
마혁진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
“…….”
말없이 쳐다보는 최 선생과 후세 변호사.
마혁진은 이 순간이 승부수를 내 보일 때라는 깨닫고 입을 열었다.
“고블린 평야의 몬스터 웨이브. 만약에 헌터 부대가 패배하면.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