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한번 빵 터진 후,
살벌했던 분위기는 단숨에 풀렸다.
신입 연수 중이라는 베테랑 헌터들은 오해한 걸 사과했고,
천문석은 이들의 신입 헌터 연수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아까 고블린 잡은 거 보니까. 실력이 상당한것 같은데. 신입 헌터 교육을 본다고 도움이 될까? 이거 비각성 헌터용 기본 교육이라, 별 도움 안 될 거야. 그래도 보려고?"
베테랑 헌터는 의아한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제가 고블린 사냥은 처음이라 사냥터의 규칙을 잘 모릅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뭐, 오해한 것도 있으니···. 교육하는 김에 겸사겸사 설명해주면 되겠지."
베테랑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입 헌터들에게 외쳤다.
"바로 포메이션 짜라!"
신입 헌터들의 포메이션을 확인하면서 설명을 시작하는 베테랑 헌터.
“이곳 신동대문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고블린 사냥터는 점유하는 길드가 없다.”
“...”
“고블린 사냥터는 신입 헌터들이 처음 사냥법을 배우고, '마비독' 팔아서 기본적인 장비를 마련하는 곳이라 '위에서' 이곳은 건들지 않기로 협약을 했거든.”
"위라면?"
천문석의 반문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베테랑 헌터.
"태성 길드 이태성 길드장이 처음 제안하고. 금성, 일화 같은 대형 길드가 모여서 협약을 맺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거물의 이름에 천문석은 깜짝놀랐다.
한국 최고의 길드라 불리는 태성 길드의 이태성 길드장!
“이태성 길드장이 처음 제안하면서 한 말이 이거야. ‘고블린 사냥터는 온라인 게임의 초보 지역이니까 건들지 말자고.’ 하- 원래 게임 폐인이었던 이태성 길드장다운 말이지.”
베테랑 헌터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반발이 좀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장비를 갖춘 1년 차 헌터 수가 확 늘어나서 헌터 업계 모두가 만족했지. 그러면서 이것저것 다른 규칙들이 생겼는데···.”
베테랑 헌터는 포메이션을 짠 신입 헌터들을 가리켰다.
"특히 이곳 신동대문 고블린 평야 사냥터에는 온라인 게임처럼 암묵적인 자리 개념이 있다."
"자리 개념이요?"
머리를 끄덕이는 베테랑 헌터.
"이곳에서는 고블린을 쫓아다니며 사냥하는 게 아니라. 한곳에 자리를 잡고 고블린을 풀링해서 사냥한다. 여기서 사냥하는 헌터 대부분이 신입 헌터거든. 그리고 북서쪽이 산맥으로 막혔고 남동쪽은 강으로 막혔지."
천문석은 베테랑 헌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감을 잡았다.
드넓은 고블린 평야. 하지만 산맥과 강으로 주위가 막혔고, 북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좁다.
이런 지형에서 고블린을 쫓아다니며 사냥하다 보면 고블린 무리가 하나로 뭉쳐 커질 수가 있었다.
보통 이걸 눈덩이가 굴러서 커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스노우볼’이 구른다고 말한다.
몬스터 스노우볼이 구르면, 최악의 경우 하나로 모인 몬스터 무리에 산맥에 사는 다른 강한 마수나 몬스터의 어그로가 끌릴 수도 있었다.
고블린 사냥 중인 신입 헌터들에겐 큰 위험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알아서 사냥했는데. 고블린 스노우볼이 굴러서 신입 헌터 인명 피해가 몇 번 났어. 그래서 이곳에서는 자리 사냥을 하기로 암묵적 규칙을 정했는데···. 쯧-"
베테랑 헌터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차더니 땅에 수북이 떨어진 화살을 가리켰다.
한자가 새겨진 뾰족하게 깎은 붉은 나무 화살.
천문석이 고블린에게서 뽑은 화살과 같은 종류의 화살들이었다.
"새로 유입된 외국계 헌터 중에 자리 개념을 무시하는 놈들이 있다. 이 사냥터에서는 선점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화살을 무더기로 날려놓고 화살 맞은 고블린은 자기 거라는 거지. 아니 화살을 날렸으면 막타를 치고 뒷정리까지 해야 하는데. 요새 이런 놈이 한둘이 아냐. 쯧-"
베테랑 헌터가 혀를 찰 때,
다른 헌터의 외침이 들려왔다.
"준비 끝났다. 풀링 시작할까?"
"바로 시작해라! 신입 준비해라!"
베테랑 헌터는 가볍게 외치고 천문석을 봤다.
"바로 사냥 시작할 거다. 이게 보통 비각성 신입 헌터 사냥법이다."
그리고 신입 헌터의 정석적인 고블린 사냥이 시작됐다.
베테랑 헌터 한 명이 풀링을 하기 위해 나갈 때.
신입 헌터 6인은 한자리에 모여 포메이션을 짰다.
선두 2인은 방패를 들고,
그 뒤에 2인은 두꺼운 검을 잡았다.
1인은 그물을 들고 옆으로 빠지고,
마지막 1인은 짧은 검을 들고 간이 방벽 뒤에 섰다.
"이게 사냥팀 기본 포메이션이다. 지금 달려간 녀석이 풀링조. 저 방패든 신입 둘이 방패수, 방패 뒤 검을 든 게 격수, 방벽 뒤가 회수조. 그리고 저 그물 들고 있는 게 견제조. 각성 헌터가 포함된 사냥 때도 보통 이렇게 구성하고 그 인원수와 구성만 조금씩 변해."
베테랑 헌터는 포메이션을 손으로 훑으며 설명을 이었다.
"상급 마수나 몬스터 사냥할 때는. 저 그물 들고 있는 견제조 자리에 마력 각성자가 들어가고. 회수조는 원딜이 같이 맡거나 전문 업자를 부른다. 검을 든 격수 자리에는 마탄 사수를 섞어 넣고. 방패수에는 탱커를 넣지. 풀링조는 원딜이 하거나 아예 탱커가 겸하는 경우도 있고. 커맨더는 보통 원딜이나 회수조처럼 시야가 넓은 포지션에서 맡는데. 이태성 길드장처럼 탱커가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깜빡했다는 듯이 덧붙이는 베테랑 헌터.
"알고 있겠지만, 고블린 사냥에서는 마탄을 안 쓴다."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뇌리에 화인처럼 남은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고블린한테 마탄 쏘면 거지 된다!'
"...인원수 사냥 대상에 따라서 구성이 조금씩 변하기는 하는데 사냥팀, 레이드 구성도 기본은 이거다. 어때 뭐 생각나는 거 없냐?"
베테랑 헌터는 피식 웃으며 천문석에게 물었고,
천문석은 포메이션을 보면서 계속 생각하던 걸 말했다.
"이거 온라인 게임 파티, 레이드 구성이랑 비슷하네요?"
"맞아. 처음 이 사냥 파티 만든 1세대 헌터들이 철벽 이태성, 강철 해머랑 같은 온라인 게임 하던 사람들이라 그래. 그때 같은 게임을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한국 헌터 업계에서 모두 한 자리씩 하고 있지."
베테랑 헌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듯 말했다.
"하아- 나도 그때 그 게임을 해야 했는데···. 게이트 열릴 줄도 모르고 토익에만 목을 맸으니···."
삐이이이-
이때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울렸다.
베테랑 헌터는 돌연 날카롭게 명령했다.
"신입! 준비해라!"
그리고 잠시 후.
파드드득-
흔들리는 수풀에서 풀링을 나갔던 베테랑 헌터가 튀어나왔다.
베테랑 헌터는 신입 헌터 옆으로 달리며 외쳤다.
"고블린 8! 전사 3! 궁수 5! 주술사 없음!"
다음 순간 수풀에서 튀어나오는 고블린 8마리!
기세등등하게 튀어나온 고블린 들은 눈앞에 인간들을 보더니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끼에에엑-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하는 고블린 무리!
신입들이 바짝 긴장하는 순간,
베테랑 헌터의 외침이 터졌다.
"대기! 대기! 대기···!"
그리고 거리가 5미터 남짓 남았을 때 터져 나오는 명령!
"견제! 그물!"
이 순간 그물을 들고 옆에 빠져 있던 헌터가 뛰어나가 그물을 던졌다.
촤르르륵-
넓게 펼쳐져 떨어져 내리는 그물!
끼에엑-
돌진하던 고블린은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물을 던졌던 신입 헌터는 다급히 그물 방향을 조정했으나 오히려 펼쳐진 그물이 뒤엉켜 버렸다.
휘리릭-
뒤엉킨 그물에 걸린 건 고블린 셋뿐!
"괜찮아! 그 정도면 충분하다!"
순간 그물을 피한 고블린이 다섯이 그물을 던진 헌터에게 달려들었다.
"치고 나간다! 방패수 전진! 검수 그물에 걸린 놈부터 처리한다!"
으아악-
함성을 지르며 방패를 앞세워 돌진하는 신입 헌터들.
이들이 고블린 다섯을 향해 밀고 들어가 방패로 밀어붙였다!
쾅, 콰쾅-
고블린 한 마리의 무게는 고작해야 20kg 남짓.
장비 무게까지 따지면 헌터 무게의 1/3밖에 안 된다.
고블린 다섯 마리가 체중을 실은 방패 가격에 단숨에 날아갈 때.
검을 든 격수, 두 헌터가 그물에 엉킨 고블린 세 마리 앞에 도착했다.
그물 사이로 검을 박아 넣어 고블린을 단숨에 끝장내는 격수!
이 순간 베테랑 헌터가 외쳤다.
"격수 방패수 지원! 회수조! 회수 시작!"
검을 든 격수가 방패수에 달려가는 동시에.
방벽 뒤에서 기다리던 회수조 헌터가 훌쩍 뛰어나와 견제조가 풀어낸 그물에서 나온 고블린을 처리했다.
단검으로 심장을 찔러 확인 사살하고,
옷을 죽 그어 고블린 옷가지를 잘라내고 뒤집어서 마비독 주머니와 무기를 하나로 모아 묶는다.
베테랑 헌터는 시선을 전장에 둔 채 천문석에게 말했다.
"사냥감이 마수거나 중급 몬스터 이상이면 회수할 때 마석을 찾는 작업이 추가된다. 그런데 고블린은 마석도 잘 안 나오고 가격도 영 별로라서 마석 탐지견 대여비용도 나오지 않아. 그래서 보통 고블린 마석은 무시한다."
베테랑 헌터가 설명하는 사이.
방패수와 격수, 4명의 헌터들은 5마리 고블린과 싸우고 있었다.
고블린은 허리춤에 올 정도 크기에 몸무게도 20kg 남짓.
당연히 무장한 헌터들이 고블린을 압도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문제는 익숙지 않은 몬스터의 야성과 광기!
끼에에엑-
괴성을 지른 한 고블린이 격수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순간 다른 녀석이 펄쩍 뛰어올라 등에 매달렸다.
팍, 파박, 파바박-
녹이 슨 단검이 강화 전투복과 방검 조끼에 미친듯이 꽂혔다.
당연히 단검은 강화 전투복위를 미끄러졌지만,
방패수가 깜짝 놀라 동료를 구하기 위해 몸을 돌려 달려갔다.
이 순간 베테랑 헌터는 버럭 소리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방패 포메이션 유지해야지! 자리 지켜!"
깜짝 놀라 달려가던 방패수가 제자리에 굳는 순간.
검을 휘두르던 격수와의 동선이 꼬였다.
쾅-
휘두르던 검이 갑자기 멈춘 방패수의 방패를 때리고.
끼에엑-
펄쩍 뛰어오른 고블린이 검을 휘두른 격수의 팔에 매달린다.
이때 격수의 뒤에서 들려오는 우박 떨어지는 소리!
후두두두둑-
고블린 독침이 발사됐다.
"야 바닥으로 굴러!"
베테랑 헌터가 다급히 외쳤으나,
격수는 팔에 매달린 고블린에 정신이 빠진 상태였다!
무더기로 쏟아지는 독침이 그대로 전신에 쏟아졌다.
그러나 강화 전투복에 방검 조끼, 강화 헬멧을 착용 중인 헌터에게 독침은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독침이 몸을 닿는 순간 격수는 패닉에 빠져 버렸다.
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고 다급히 몸을 털어내며 독침이 박힌 방검 조끼를 스스로 벗는 신입 헌터!
"야! 멈춰! 뭐 하는 거야!"
베테랑 헌터가 움직이려 할 때,
천문석이 먼저 움직였다.
땅을 박차고 뛰어 몇 걸음 만에 접근,
강화 해머로 긁듯이 내려친다.
크륵-
떨어진 고블린을 낚아채 내력을 실어 던진다!
내력이 실린 고블린이 방패수의 등에 매달린 고블린을 때리는 순간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터져나온 충격에 방패수가 앞으로 넘어지고,
고블린 두 마리가 뒤엉켜 공중으로 뜨는 순간.
후드득-
후드득-
삼점사로 쏘아지는 화살!
머리, 목, 가슴!
엠마의 화살이 공중에 뜬 고블린 두 마리를 끝장냈다.
이때 견제조와 회수조 두 명이 고블린 등 뒤에 검을 박아 넣었고 괴성이 들려왔다.
으아악!
방패수가 방패로 내리찍어 마지막 고블린을 끝장냈다.
휘이이이-
베테랑 헌터는 휘파람을 불며 천문석에게 말했다.
"와- 너 진짜 고블린 사냥 처음이냐? 아주 능숙한데? 혹시 특임대 출신인 건가?"
감탄하던 베테랑 헌터는 돌연 전투현장으로 고개를 돌려 버럭 소리 질렀다.
"야! 정신 제대로 안 차리지! 뒷정리 바로 시작해야지! 빨리빨리 움직여라!"
순간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던 신입 헌터들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쓰러진 고블린을 모아 회수조가 있는 곳으로 옮기고,
회수가 끝난 고블린을 미리 땅을 파둔 곳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사냥한 곳의 흙을 고르고 탈취제를 뿌리는 신입 헌터들.
"하루종일 해야 겨우 사냥 시늉이나 하겠네···."
베테랑 헌터는 불만스럽게 말하다가 문득 천문석에게 물었다.
"어때 도움이 좀 됐냐?"
"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천문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베테랑 헌터는 피식 웃었다.
"비각성 헌터 사냥법이 도움은 무슨. 하여튼 방금 도움 고마웠다. 아까 오해한 것도 미안하고."
그러나 천문석에게는 진짜 도움이 됐다.
사실 사냥법 자체보다 중간중간 듣는 이야기가 더 큰 도움이 됐다.
암묵적인 사냥터의 규칙들.
왜 이런 규칙이 생겼는지와 사냥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런 사냥법이 만들어진 이유가 온라인 게임이었다는 것,
다른 헌터들이 역할을 나눠 사냥하는 걸 보는 것도 도움이 됐다.
처음 몬스터와 싸운 서울사태 이후 대부분 혼자 다녔고,
사실 사냥보다 도망을 더 자주 다니던 천문석에게는 이 모든 게 아주 신선했다.
‘헌터들은 이렇게 사냥하는구나.’
천문석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보고 있자,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엠마가 어이없어했다.
"저게 재밌냐? 누가 보면 너 초짜 헌터인 줄 알겠다."
"..."
‘이 뜬금없는 예리한 녀석!’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천문석은 얼른 지루한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