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W.S. 인더스트리 A/S 비용 더럽게 비싼 거 몰라!?”
분노한 최후식은 한경석의 머리를 연신 쥐어박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앗! 아앗! 앗! 그건 안 건드렸다니까!"
한경석은 연신 머리를 쥐어박히면서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최후식은 한경석에게 헤드락을 건 채 재금 빌딩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우선 길드 사무실로 가서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안돼!"
"뭐가 안 돼! 돼! 아주 잘 돼!"
"최후식 이사님! 나 친구랑 놀러 가야 해요!"
"...친구?"
한경석의 입에서 친구란 말이 나오는 순간.
우뚝 멈춰서는 최후식.
최후식은 주위를 살피다가 화물차에 타고 있는 천문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너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냐?"
"안녕하세요. 최후식 이사님.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천문석이 민망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최후식은 한경석에게 걸었던 헤드락을 풀었다.
순간 잽싸게 점멸 이동해서 화물차 옆으로 도망치는 한경석.
최후식은 한경석을 잠시 보다가 천문석에게 물었다.
"둘이서 놀러 가는 거야?"
"아뇨. 집에 애들 둘 더 있습니다. 넷이서 가까운 북한산 캠핑장에 놀러 가려고요."
"그래? 언제 돌아오는데?"
"내일 아침에 출발해서 모레 아침에 돌아올 생각입니다."
"..."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최후식이 입을 열었다.
"한경석!"
"..."
대답 없이 눈치만 살피는 한경석.
"장비 다 제자리에 돌려놓고 놀다 와라."
최후식의 허락을 받는 순간,
한경석은 깜짝 놀라 외쳤다.
"진짜로?"
최후식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문석을 봤다.
"저 녀석 친구랑 놀러 가는 게 정말 오랜만이다. 잘 좀 부탁한다."
최후식은 어쩐지 철없는 조카를 부탁하듯 말하고 있었다.
"걱정마세요. 그럼 내일 아침 여기서 뵙겠습니다. 전화하겠습니다."
"알았어. 친구!"
한경석은 신나게 외치더니 재금 빌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하, 새끼. 그렇게 뺀질거리던 녀석이···."
최후식은 한경석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천문석을 봤다.
"고맙다."
"별거 아닙니다."
최후식은 천문석의 대답을 들으며 평소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내심 매우 놀라고 있었다.
극도의 대인 기피증으로 은신 망토 뒤에 숨었던 한경석.
한경석이 친구와 놀러 간다고 신나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요즘 경석이가 달라졌다고 누나가 좋아하더니···. 그게 천문석 이 녀석 덕분이었구나.’
최후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천문석을 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길드 지원팀에서 받은 연락.
한경석이 한 헌터와 함께 찾아와 무기고에서 장비를 빌려 갔다가 방금 전 무기를 반납했다는 연락.
그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뛰어와 사방으로 도망 다니던 한경석을 잡을 수 있었다.
최후식은 직감했다.
'아직 제대로 된 장비를 구하지 못했구나!'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 던전에 들어갔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각성몽을 꾸고 각성을 해도 길드나 기업에 들어가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장비를 마련하려면 최소 1, 2년은 걸린다.
최후식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라. 너 줄 게 있다."
최후식은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통화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땀으로 엉망인 헌터 셋이 최후식에게 달려왔다.
"총괄이사님. 말씀하신 물건 가져왔습니다!"
최후식 이사에게 전해지는 길쭉한 무장 박스.
"수고했다. 숨 좀 돌리고 들어가라."
헌터 셋이 환해진 얼굴로 카페를 향해 달려가자,
최후식은 손에 들린 무장 박스를 천문석에게 건넸다.
"이거 받아라."
"네? 이게 무슨?"
얼떨결에 받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그 안에 마력 무구 들어있다. 난 한동안 쓰지 않을 것 같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써라."
"네? 마력 무구요!?"
레이드 메인 탱커 최후식 이사가 쓸 정도의 마력 무구면 보통 물건이 아니다.
그러나 최후식은 어깨만 한번 으쓱하고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른 락은 초기화해뒀으니까 '0000' 번호 누르면 열린다. 알아서 락걸고 써라. 그럼 수고해라."
최후식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재금 빌딩으로 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말했다.
"그리고 각성 축하한다.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하자."
"최후식 이사님! 잠시만 이거!"
천문석이 외쳤으나 최후식은 손만 흔들고 재금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생긴 마력 무구.
천문석은 잠시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무장 상자의 락을 해제했다.
딸깍-
"어?"
무장 상자 안에는 낯익은 형태의 마력 무구가 들어있었다.
오래전 장민 대표에게 빌렸던 W.S. 인더스트리에서 제조한 마력 무구.
강화 해머.
'비슷한 해머인가?'
천문석은 강화 해머를 쥐었다.
손에 착 감겨드는 묵직한 무게감.
해머 헤드에 새겨진 특이한 문양, 마력회로.
그리고 손잡이에 새겨진 제조사명.
W.S. 인더스트리.
쌍둥이여도 각자의 성격이 다른 것처럼.
똑같은 모양과 무게의 양산형 무기여도 모든 무기는 특유의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강화 해머를 잡는 순간 느껴지는 익숙한 감각!
천문석은 직감했다.
백곰 마수와 싸울 때 사용했던 그 강화 해머다!
"하, 이 해머 구매자가 최후식 이사님이었구나."
천문석은 새삼 마음이 든든해짐을 느꼈다.
이미 한번 사용해봤기에 이 강화 해머의 성능은 잘 알고 있었다.
마력회로를 작동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쓸만한 기본에 충실한 무기.
주 무기는 이거면 충분하다.
강화 전투복과 다른 장비는 대여금고에 있으니,
원거리 무기로 리볼버 마탄을 준비하고 부산물 채취용 단검 몇 자루만 더 준비하면 장비 준비는 끝이다.
헌터 업계의 가장 큰 진입 장벽, 헌터용 장비 문제가 쉽게 해결됐다.
천문석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화물차를 몰아 대형 마트로 향했다.
이제 캠핑장에 놀러 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
끼이익-
천문석은 화물용 탑차를 옥탑방이 있는 건물 주차장에 세웠다.
그리고 신선 식품이 담긴 마트 봉지를 꺼내 옥상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며 천문석은 일정을 생각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 한경석을 태워 북한산 캠핑장으로 간다.
그리고 온종일 놀다가 일박 후 아침에 돌아와 일행은 이곳 건물에 내려주고 자신은 바로 게이트를 넘어가면 된다.
이미 필요한 물건은 모두 구입했고,
북한산 캠핑장과 인근 워터파크 예약도 끝났다.
문제는 특급 헌터.
천문석은 몇 번이나 장철 헌터와 장민 대표에게 전화했지만 두 사람 모두 연락이 안 됐다.
중간에 비서실과 연결돼서 확인하니 두 사람 모두 통화를 하기 힘든 곳에 있다고 했다.
보호자와 연락이 안 되는 지금 특급 헌터를 캠핑장으로 데려가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문득 오래전 고등어 선물세트를 받았을 때의 특급 헌터의 얼굴이 떠오른다.
상상도 하지 못한 배신에 경악한 그 얼굴.
당장 연극무대에 세워도 손색이 없을듯한 그 모습!
슬프게도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됐다.
"...풉!"
순간 천문석의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오고 몸이 흔들렸다.
꼬맹이가 슬퍼하는 걸 상상하며 웃다니 어른답지 못한 모습이다.
그러나 특급 헌터의 특급 리액션을 상상하는 순간.
천문석은 더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카캬카-
"뭐. 이것도 운명이겠지."
천문석은 신나게 계단을 올라 옥탑방 문을 열며 외쳤다.
"야, 류세연! 너 오늘도 게으르게 소파에 누워있었냐?!"
인사를 하려던 류세연이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천문석을 봤다.
"잘 갔다···. 뭐?"
천문석은 혀를 차며 류세연에게 말했다.
"쯧쯧쯧- 내가 열심히 일할 동안 집에서 놀고 있었다니! 사람은 항상 바쁘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야! 하루종일 놀았지? 너 이거 냉장고에 정리해 놔라."
"와, 와-! 아까 대청소, 집수리하자니까! 도망친 사람이 누군데!?"
류세연이 분통을 터트렸으나,
천문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어허. 바쁜 일이 있었다니까. 그리고 너 종일 뭐했는데? 소파에 하루종일 누워있던 거 사실이잖아?"
"..."
류세연은 말없이 물끄러미 천문석을 바라봤다.
'뭐지, 이 녀석? 왜 반박을 안 해?'
천문석이 불안해하는 순간,
류세연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될까? 후회하지 않겠어?"
"뭐?"
천문석이 고개를 갸웃하자,
류세연은 냉장고를 가리켰다.
"열어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천문석은 바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 한 칸을 가득 채운 보자기로 쌓인 상자!
"어, 이거 뭐야? 선물 세트?"
"꺼내서 자세히 살펴봐. 흐흐흐-"
류세연의 웃음이 들려온 순간,
천문석은 홀린 듯이 상자를 꺼내 보자기를 풀었고 굳어버렸다.
구이용 한우 선물세트!
손에 걸리는 무게로 봐서는 10kg은 된다!
"야, 이거 뭐야? 네가 사 온 거야? 이거 엄청 비싸 보이는데?!"
천문석이 깜짝 놀라 외치자,
류세연은 소파에서 일어나 거만하게 대답했다.
"그거 우리 교장 선생님이 ‘나한테’ 선물로 보내주신 거야!"
"뭐, 이세영 선생님이?"
천문석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이세영 선생님? 선생님이 원래 부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우 선물 세트를? 갑자기 왜···?"
류세연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학교 박살 나고 교장 선생님 쉬고 계셨거든. 그런데 내 덕분에 일자리를 구했다고 엄청 좋아하셨어!"
"네가 이세영 선생님께 일자리를 소개해 드렸다고?"
"..."
갑자기 말이 없어지는 류세연.
류세연은 어쩐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좀 이상한데. 내가 교장 선생님이 심심해하신다고 말했잖아?"
"그랬나?"
"내가 신체 검사받으러 간 날 이야기했잖아?"
얼핏 떠오르는 기억.
"아, 기억난다. 나랑 특급 헌터가 키즈카페 갔던 날 말이지?"
"맞아."
류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한 그 말 덕분에 교장 선생님께 일거리가 들어왔데."
"...야! 그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나한테 이세영 선생님 심심해한다고 말했는데 왜 일거리가 들어와? 내가 선생님께 일거리를 소개해준 것도 아닌데!?"
"..."
류세연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류세연은 외쳤다.
"카오스 이론, 나비 이론! 몰라!? 양자 역학적으로 충분히 가능해! 이래서 문과란!"
천문석은 어이가 없었다.
"너 대충 막 던지는 것 같은데? 그리고 너도 문과잖아! 나랑 같은 학교 같은 과 온다며?!"
류세연은 순간 움찔했으나,
바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천문석에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잡아서 확인하니 출입용 보안 카드였다.
IC칩과 마정석이 박힌 보안 카드.
그리고 보안 카드에 새겨진 이름.
[재금 연구소, 류세연 연구원.]
"..."
천문석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무슨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않은 애가 연구원이란 말인가!?
그것도 국내외 유수한 연구기관의 박사급도 입사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재금 연구소의 연구원!
천문석은 소파 위 류세연과 보안 카드 사진 속 류세연을 번갈아 봤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하루 대부분을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류세연과 사진 속 하얀 가운을 입은 류세연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야, 이거 혹시 위조···."
천문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세연이 성큼 다가와 보안 카드의 마정석에 손을 올렸다.
순간 보안 카드에 박힌 마정석이 빛나고 보안 카드 전체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재금 그룹. 재금 그룹. 재금 그룹.]
"..."
천문석은 입을 벌린 채 보안 카드를 바라봤다.
탁-
이때 어깨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
류세연은 천문석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삼촌. 어떻게 한우가 생겼느냐. 이건 중요한 게 아냐."
“뭐?”
어쩐지 낯익은 화법에,
천문석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류세연은 은근슬쩍 손을 움직여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지금 우리한테 중요한 건! 눈앞에 구이용 한우 선물세트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야! 그것도 10kg이나!"
천문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류세연의 말이 맞았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한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저녁은 한우구이다!"
천문석이 신나게 외치는 순간,
류세연은 바로 휴대폰을 들며 말했다.
"특급 헌터 바로 오라고 할까? 키즈카페에 있을 텐데?"
"잠깐만! 내 촉이 움직이고 있다!"
"뭐?"
천문석은 손을 들어 창밖으로 보이는 옥상 문을 가리켰다.
"10, 9, 8···."
그리고 시작된 카운트다운.
"뭐 하는 거야?"
류세연이 어이없어했으나 멈추지 않는 카운트다운.
그리고.
"3, 2, 1, 0."
카운트다운이 끝나는 순간.
옥상 문이 활짝 열리고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특급 헌터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