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무급인데 빡세게 굴리라고?”
어이없어하는 김철수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천문석.
“네 아주 빡세게 굴려야 합니다. 크크크-”
천문석은 음흉하게 웃다가 문득 든 생각에 물었다.
"그런데 일거리요? 갑자기 무슨 일거리에요? 혹시 지난번 배송경주 뒤처리 때문에 그래요?"
“아니. 그건 네가 소개해준 장강 유통, 장민 대표님 도움받아서 진행 중이다.”
김철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와아- 그런데 장강 유통 보통회사가 아니더라? 장민 대표님 인맥이 상상을 초월해! 내가 경매장을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할 때는 본 척도 안 하던 놈들이. 전화 한 통 받더니 바로 특장차에 경호원까지 보내서 네가 맡긴 무기 인수해 갔어!”
“오크 뼈 도끼 말이죠?”
“맞아. 오크 마석도 같이 가져갔다. 그런데 그 무기 소재가 뼈고 사용했던 오크도 오러를 썼다며? 그래서 국내에서는 제값 받기가 힘들 거라네. 해외 경매 진행 중이라 처분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에는 오러 각성자의 수가 많지 않았다.
마스터급 오러 능력을 보인 오크의 뼈 도끼를 제값 받고 팔려면, 오러 각성자가 많은 북미나 유럽에 팔아야 했다.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제값 받고 팔아야죠.”
"전리품은 그렇게 됐고. 오리온 길드에서 빌린 장비 배상 문제는 갑자기 오리온 길드에 비상이 걸리면서 좀 미뤄졌어."
"그럼 아까 서류는?"
김철수는 휴대폰을 꺼내 메일 앱을 실행해 천문석에게 보여줬다.
회사 계정으로 들어온 수많은 메일.
“보름쯤 전인가? 갑자기 의뢰가 밀려들어 왔다. A4지, 필기구 같은 비품부터 헌터용 안전 장갑과 강화 패드까지. 하나하나는 자잘한데 합치면 금액이 좀 되고. 헌터 업계 인맥을 쌓기 좋을 것 같아서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받았다.”
김철수는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생각 없이 일거릴 받다가 과부하가 걸려 버렸어. 하하-"
"보름 전이요···."
고개를 갸웃하던 천문석은 문득 생각나는 이름이 있었다.
박혁 이사!
보름 전쯤 장민 대표와 함께 갔던 파티에서 장철 헌터에게 소개받은 재금 그룹의 박혁 이사의 얼굴이 기억난다.
근거는 없었지만, 박혁 이사가 일거리를 몰아줬다는 막연한 느낌이 왔다.
"하, 이게 또 이렇게 연결되네···."
천문석이 감탄할 때,
김철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잘됐다. 게이트 너머로 가야 하는 의뢰도 몇 건 있었는데. 너 던전 들어가서 처리할 엄두도 못 냈거든. 이제 그것도 처리할 수 있겠다."
"네? 게이트 너머면···. 설마 이번에도 이세계 배송일 받았습니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많지만 하늘과 땅 모두 난장판으로 돌아갔던 이세계 배송경주.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김철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설마 내가 쿠팡맨 일을 또 받겠냐? 이번에는 보통 헌터들이 하는 평범한 일이야. 몬스터와 마수 몇 종류의 부산물을 구하는 일인데···."
김철수는 높게 쌓인 A4 상자를 툭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오리온 길드 비품관리 직원한테 술 한잔 사면서 자세히 알아봤거든? 동대문 게이트 거점 도시 근처에서 대부분 처리할 수 있는 일이래. 잠깐 지도 보여줄게."
김철수는 책상으로 돌아와 커다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탁-
그리고 천문석의 손에 쥐어지는 코팅된 종이.
"그게 지도야. 내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모두 기록했다. 그 지역 동대문 게이트가 사라지고 한동안 난장판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안정됐다고 하더라고."
동대문 게이트 거점 도시 주위, 거점 마을과 도로, 몬스터와 마수 서식지가 기록된 지도.
"..."
지도를 받은 천문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
대청소와 집수리를 피해 옥탑방에서 도망치듯 나왔는데, 찾아오듯 손에 놓이는 일거리.
그것도 게이트를 넘어가 처리해야 하는 이세계의 일거리라니!
"철수형. 설마···. 이거 오늘 당장 출발하고 그런 거는 아니죠?"
천문석이 지도를 보며 묻자,
김철수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야, 너 던전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그럴 리가 있냐?"
"역시 그렇죠?"
하하하-
천문석이 웃음을 터트릴 때.
툭-
천문석의 손에 쥐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배송경주에서 사용했던 화물차 열쇠.
“...철수형. 이건 왜?”
"차에다가 필요한 생필품 사서 채워라. 난 지금 업무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으니."
"생필품을 채우라고요···? 이거 언제 출발인데요?"
“...푹 쉬고. 모레에 같이 출발하자. 일거리가 제법 돼서 기한 맞추려면 그때는 출발해야 해. 이게 우리가 할 일.”
김철수는 천문석에게 서류철을 건넸다.
툭-
손이 아래로 내려갈 듯한 묵직한 서류철!
천문석은 서류철 중간쯤을 열어봤다.
[타글란 갈고리발톱 3종 이상 수집과 서식지 변화 확인.]
...
이런 의뢰서가 두툼하게 쌓여있었다.
“...”
천문석은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무림 던전에서 개고생하면서 다짐했다.
집에 가면 최소 일주일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놀겠다고.
그런데 불과 3일이 지났다!
밤에는 무림 던전에서 얻은 것을 수습하기 위해 빡세게 무공을 수련하고 낮에만 좀 빈둥거렸는데···.
후환을 처리하러 나오니까,
찾아오듯 생겨난 일거리라니!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상황에 몇 달 전 기억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다.
일거리가 알아서 찾아오는 일복이 터졌다고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랬다.
젠장.
---
띠리리리-
천문석이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앗 전화가!"
다급히 달려가 전화를 받는 김철수.
"네, 김철수 사무실입니다. 네, 네! 준비 중입니다···."
김철수는 전화를 받으며 서류를 찾고 컴퓨터 화면을 확인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바쁘게 움직이는 김철수를 보며 새삼 감탄했다.
자신도 지분을 가지고 있는 김철수 사무실.
철수형은 자신이 무림 던전에 다녀오는 동안 혼자서 빡세게 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이때 통화를 마무리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철수.
딸깍-
그러나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띠리리-
"네. 김철수 사무실입니다···."
천문석은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김철수는 정신없이 연속으로 몇 통의 전화를 받더니 한숨을 돌리고 천문석을 봤다.
"이건 내가 처리할게. 넌 생필품이랑 물자 준비해줘."
"철수형. 이렇게 바쁜데 사무실 비우고 이세계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해봐야지."
김철수가 힘없이 말하는 순간,
천문석은 서류를 정리하며 생각하던 걸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번 일은 밖에 엠마 데리고 제가 처리할게요. 철수형은 다른 세 명 데리고 사무일 처리하는 게 어때요?"
김철수는 엠마가 나간 문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엠마라는 헌터 진짜. 믿을만하냐? 믿지 못할 사람이랑 헌터 일 나가는 거 엄청 위험하다던데? 그냥 사무실 잠시 닫고 우리 둘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천문석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재금 그룹이 망하고 암살검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4인조 헌터는 배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절대 뒤통수 못 때려요. 얘네들 진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할 겁니다."
흐흐흐-
천문석은 음흉하게 웃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장강 유통에서 사무실로 배송 올 거 하나 있어요. 철수형이 좀 받아주세요. 그리고 추이린 수석 연구원 혹시 만날 일 없나요?”
“...어떻게 알았냐? 조만간 한번 사무실 들른다고 하던데?”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재금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을 보면 악당 4인조의 믿음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철수형. 그럼 그렇게 분업하죠. 현장은 제가 사무는 철수형이. 오늘은 저도 일할게요.”
김철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너 바로 집으로 돌아가라."
"네? 집에 가라고요?"
천문석이 의외의 이야기에 반문하자,
김철수는 책상 서랍을 열며 말했다.
"빡센 현장 일하러 가는 사람한테 사무일까지 맡길 수는 없잖아. 가서 좀 쉬어라. 그리고 이거 가져가고."
김철수는 책상 서랍에서 카드와 열쇠를 꺼내 넘겼다.
"이거 법인 카드 발급받은 거다. 경비는 이걸로 쓰고. 이 열쇠는 대여금고 열쇠다."
"대여금고 열쇠요?"
"네가 리볼버 영치해둔 게이트 지역 맹호 건 스미스에 우리 사무실 이름으로 대여금고 신청했어. 그 금고에 강화 전투복이랑 헌터용 무기, 장비 빌려서 넣어 놨으니까. 이 열쇠로 열고 바로 찾아가면 된다. 아 혹시 마탄 살 거면 그것도 법인 카드로 사라."
김철수는 빠르게 말을 쏟아내더니 문을 열고 천문석의 등을 밀었다.
"자 이제 가서 쉬어라. 여기 일은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철수형 괜찮겠어요? 오늘은 같이 일하는 게···."
김철수는 다크 서클이 진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야, 내가 누구냐? 경영학부 화석! 고인물! 안 해본 알바가 없는 김철수가 바로 나다! 일주일 철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이때 엠마의 깍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통화 끝났습니다! 게릭과 클릭스, 폴리머 뛰어오고 있습니다!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잘됐네. 하아-"
김철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천문석에게 말했다.
"들었지? 일손 오니까 너는 집에 가서 좀 쉬다가 모레 출발해라. 엠마씨. 일 처리 가르쳐 줄게요. 안으로 들어가죠."
"네! 알겠습니다!"
김철수는 의욕적으로 외친 엠마와 사무실로 들어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수고해라."
쿵-
천문석은 서류와 열쇠, 법인 카드를 든 채 황당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봤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헛웃음.
하-
오래간만에 본 철수형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사장과 부사장 두 명뿐인 김철수 사무실.
사장이 야근하면서 부사장에게 집에 가서 쉬라고 등 떠미는 회사라니.
어쩐지 같은 층의 넓고 화려한 대형길드보다 눈앞의 A4지 문패가 붙은 김철수 사무실이 더 맘에 들었다.
천문석은 바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모레에는 게이트를 넘어 이세계로 가야 한다.
쉴 수 있는 시간은 오늘과 내일뿐.
그런데 어째선지 기약 없이 쉴 때보다 열정이 끓어 오른다.
더욱 열심히 최선을 다해 즐겁게 놀아야겠다는 열정이!
마침 야영 장비가 실린 화물차가 손에 들어왔고,
집에는 시간이 남아도는 여고생과 꼬맹이도 있었다.
마침 계절은 한여름!
놀러 가기 좋은 계절이다.
천문석은 희희낙락 휘파람을 불며 오리온 길드에서 빌렸던 장비를 반납하고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깔끔하게 수리된 화물차를 몰고 나오다가 한경석과 만났다.
---
"놀러 간다고?!"
천문석의 말을 들은 한경석은 깜짝 놀라 외쳤다.
"어디로 놀러 가는데?"
"그냥 가까운 북한산 캠핑장에 가려고 하는데···. 바쁘지 않으신가요?"
"나 전혀 안 바빠!"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한경석의 열망 어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
듣지 않아도 한경석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천문석은 한경석에게 권유했다.
"그럼 같이 가실래요? 내일 아침에 출발해서 모레 돌아올 예정인데?"
"알았어! 바로 준비해서 나올게!"
한경석은 재금 빌딩으로 달려가려다가 우뚝 멈춰섰다.
"후식이가 지랄할 텐데···."
"네?"
"레이드 때문에 그래."
한경석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레이드 좀 이상해. 참여하는 길드도 한두 개가 아니고 서울 헌터 부대도 같이 움직이거든. 레이드 커맨더도 군에서 나온다고 하고···. 나한테도 어디 가지 말고 회사에 꼭 붙어있으라고 했다니까."
하아--
한경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돌연 눈을 반짝였다.
"그래도 후식이는 바빠서 신경 못 쓸 거야! 후식이 메인 탱커 됐다고 좋아서. 요새 머리카락이 빠져도 웃고 다닌다니까! 하하하-"
순간 느껴지는 섬뜩한 한기.
"어···?"
한경석이 무언가를 느낀 듯 돌아보려는 순간.
타아앙-
한경석의 뒤통수에 작렬하는 손바닥!
"머리카락 빠져도 웃는 후식이 여깄다! 새끼야!"
어느새 번개같이 나타나 최후식이 한경석의 뒤통수를 갈기고 머리에 헤드락을 걸었다.
"앗! 아앗! 이사님!?"
한경석이 깜짝 놀라 버둥거릴 때,
최후식의 분노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극검의 왕관! 이지스의 방패! 가져간 게 너지!? 너 또 뭐 건드렸냐? 당장 불어라!"
"...나이트 아머 강화 전투복···. 컥, 커억- 쿨럭!"
“뭐?! 너 설마! 내 나이트 아머 슈트도 건드린 거야?!”
순간 최후식의 전신에서 일렁이는 푸른 마력광!
“야, 이 미친놈아! 할부 349개월 남은 장비를 건드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