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한경석이 게릭과 클릭스, 폴리머를 새 거처로 안내하는 동안.
천문석과 4인조 헌터의 리더 엠마는 종로의 뒷골목을 걷고 있었다.
"정말로 이렇게 나와도 괜찮을까요?"
엠마가 불안한 얼굴로 주위를 살필 때,
천문석은 어깨를 으쓱하며 두 이름을 말했다.
"암살검. 재금 그룹."
순간 자신도 모르게 끄덕여지는 엠마의 고개.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이는 엠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친근하게 말했다.
"야,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내 밑에 있으면 카르텔도 못 건드린다! 내가 왜 허름한 헌터 장비를 입었고, 지금도 이렇게 반팔 반바지로 다닌다고 했지?"
엠마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분을 모셔서 위장했다고···."
천문석은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맞아. '위장' 때문이다. 나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분이랑 형·동생 할 정도로 아주 친한 사이다."
"..."
"너희들 고용계약 맺은 거 하늘이 도운 거다? 카- 이렇게 운이 좋다니! 나랑 계약 안 했으면 지금쯤 카르텔에 끌려가고 있었다니까. 카르텔에 끌려가면 어떻게 됐을지 알지?"
엠마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호텔 밖에 진을 쳤던 카르텔의 집행 부대!
그대로 호텔 밖으로 쫓겨났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걸 막아준 게 암살검의 친구이자 재금 그룹 사람이라는 새로운 고용주 천문석이었다.
엠마는 천문석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봤다.
천문석은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를 모신다고 말했다.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
게이트 관련 기술을 전 세계에 독점 공급하는 재금 그룹은 강대국 이상의 힘을 가졌다.
재금 그룹의 그늘에 있다면 마석 카르텔에서도 감히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암살검의 친구라고 하지만, 진짜로 재금 그룹의 실세를 모실까?
재금 그룹의 실세면 약소국의 국가수반 이상의 권력자다.
그런 권력자와 형·동생 한다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엠마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천문석.
이세계의 난장판 도로에서 처음 만난 후 몇 번이나 농락당했다.
남미의 암흑가에서 빡세게 구른 자신들을 너무나 쉽게 속인 천문석.
잔머리만 잘 돌아갈 뿐 실제 실력은 별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강화전투복도 없이 단봉과 방패만 들고도 순식간에 자신들을 제압했다.
게다가 대인전 세계 랭커 암살검의 친구기도 하다.
지금까지 알게 된 사실만 놓고 보면 천문석의 말은 진실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반팔에 반바지, 슬리퍼를 신은 채,
우둘투둘 찌그러진 방패와 단봉을 어깨에 걸치고 걷는 모습이라니!
천문석은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의 실세를 모시는 거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겉모습만 보면 휴학하고 알바에 치여 사는 학생 같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눈앞의 천문석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호텔 밖에 깔렸던 카르텔의 집행 부대를 단숨에 흩어지게 하고.
자신과 부하들을 안전하게 밖으로 빼낸 천문석이란 고용주를.
이때 천문석이 말했다.
"다 왔다. 여기다."
엠마 앞에 자리한 거대한 성채 빌딩.
빌딩에 붙어있는 이름을 보는 순간,
엠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재금 빌딩!
"재금 빌딩! 재금! 설마 이곳에···?"
엠마가 묻는 순간,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맞아. 이 성채 빌딩에 앞으로 너희가 모실 분이 계신 사무실이 있다. 위장 때문에 사무실이 좀 작지만. 그분의 안전을 위해서 사무실을 이곳 '재금' 빌딩에 마련했다."
천문석이 비밀을 말해주듯 목소리를 낮추자,
엠마도 덩달아 마른침을 삼키며 바짝 긴장했다.
"그렇군요. 그게 그렇게 된 거군요!"
엠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재금’ 이란 이름이 붙은 성채 빌딩을 살폈다.
이제야 안심한 듯 확 풀린 엠마의 얼굴을 보는 순간,
천문석은 엠마의 생각이 짐작됐다.
성채 빌딩의 '재금'이라는 이름을 보고,
재금 그룹의 실세를 모신다는 자신의 말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역시 외국인!
'한국어 마법 각인'을 받아 한국어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렇다고 한국인의 상식과 문화적인 배경까지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엠마는 재금 그룹이 뜬 이후로 한국에서는 동네 빵집이나, 슈퍼, 노래방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재금'이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재금 빌딩과 재금 그룹은 별 관계가 없었지만,
천문석은 엠마의 오해를 고쳐주지 않았다.
마음은 편해질 테니까.
그리고 재금 그룹과 깊은 관계가 있는것도 사실이었다.
엠마와 남미 헌터 3인이 일할 김철수 사무실은,
재금 연구소의 추이린 수석 연구원에게 일거리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철수형의 친척도 재금 그룹에 아는 사람이 있고,
자신도 장철 헌터의 소개로 재금 그룹의 박혁 이사와 인사를 했다.
즉 몇 다리 건너야 하지만,
재금 그룹과 일을 한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천문석은 환한 얼굴로 재금 빌딩을 올려다보고 있는 엠마에게 말했다.
"자 들어가자. 앞으로 모실 '사장님' 소개해줄게."
엠마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그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라는 ‘김철수’ 사장님 말씀이시죠?"
---
“잠깐. 여기서 기다려라.”
천문석은 긴장한 표정의 엠마를 문밖에 세워두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철수형! 저 왔습니다!”
천문석이 외친 순간.
비품으로 가득 차 좁아진 사무실 안쪽 번쩍 고개를 드는 김철수의 얼굴이 보였다.
다크 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김철수.
초췌한 얼굴의 김철수는 문을 열고 들어온 천문석을 보는 순간 벌떡 일어나 외쳤다.
"문석아! 드디어, 드디어! 돌아왔구나!"
뭐지, 이 익숙한 불안함은?!
천문석이 주춤 물러선 순간 김철수가 외쳤다.
"야, 우리 할 일 엄청 밀렸어! 빨리 거기 책상에 앉아라!"
"네, 일이요? 철수형. 그게 무슨···?"
천문석이 당황할 때 김철수는 책상에 높게 쌓인 서류 더미를 뚝 떼어 천문석 앞에 있는 책상으로 옮겼다.
"갑자기 일거리가 밀려들어서 나 월요일부터 사무실에 살고 있다!"
"철수형 오늘이 월요일인데···. 어?"
천문석은 깨달았다.
지난주 월요일부터 최소 일주일 이상 이 사무실에서 일했다는 이야기다!
턱-
순간 천문석의 어깨에 놓이는 김철수의 손!
"문석아! 정말 잘 왔다! 죽는 줄 알았다!"
철수형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너무나 익숙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키즈카페 부점장직을 제안받았을 때 느꼈던 그 전율이!
'도망칠까?'
반사적으로 생각한 순간 그래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그냥 직원이 아닌 지분을 가진 김철수 사무실의 부사장인 것이다!
그래서 천문석은 다급히 말했다.
"철수형! 마침 제가 훌륭한 인재들을 고용했습니다!"
"뭐? 아니, 우리가 누굴 고용할 정도는···."
김철수가 의아해하는 순간,
천문석은 재빨리 고용계약서를 꺼내 흔들었다.
"철수형. 우선 이 고용계약서부터 보고 이야기하죠."
"고용계약서까지 쓴 거야? 아직 직원 인건비 주기 힘들어. 우리 자리 잡으려면···. 어!?"
고용계약서를 보던 김철수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됐다.
"이거 급여 항목 이게 뭐냐?"
김철수는 급여 항목을 읽었다.
"....고용주 갑은 피고용인 을의 한국에서의 안전 보장으로 급여의 지급을 갈음한다···."
김철수는 계약서 앞뒤를 넘겨 특약 사항이 있나 살폈다.
"...특별 성과급이 발생할 경우 스위트룸 수리비 차감 후 지급하고. 갑은 을의 식사와 숙소를 제공한다."
천문석은 슬쩍 끼어들어 부연해 설명했다.
"숙소는 친구가 이곳 근처에 있는 방을 내주기로 했어요."
"뭐? 그럼 급여도 없이 식사만 제공한다고? 아니, 누가 이런 조건으로 계약을 해?!"
김철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다가 갑자기 희색을 띠었다.
"혹시! 류세연?! 너 세연이 데려온 거야? 세연이라면 이정도 서류처리는 순삭이지!"
"아뇨. 세연이는 아닌데. 아주 튼튼해서 한 달 정도 야근해도 문제없는 인재들을 데려왔습니다!"
천문석은 사무실 문을 열고 외쳤다.
"엠마! 들어와서 인사드려라. 앞으로 모실 김철수 사장님이시다. 내가 말했던 그분이시다."
천문석이 슬쩍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자,
엠마는 긴장된 얼굴로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엠마 파리킨슈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갑자기 나타난 20대 외국인 여성 헌터의 깍듯한 인사.
김철수는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아···. 네. 제가 김철수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천문석이 엠마에게 지시했다.
"엠마. 전화해서 게릭이랑 클릭스, 폴리머. 셋 다 오라고 해라. 일거리 많다. 바로 사장님께 인사드리고 일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엠마가 의욕적으로 외치며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김철수는 재빨리 천문석을 끌고 사무실에 가득 쌓인 비품 사이 구석으로 들어갔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외국인! 그것도 헌터잖아! 그리고 사람이 더 온다고?!"
“철수형. 걱정할 것 없습니다. 쟤들 한국어 마법 각인 받아서 한국말 능숙해요. 서류 작업도 조금만 하면 익숙해질 겁니다. 특히 폴리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꼭 필요하다고?”
김철수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대답했다.
“폴리머 마력 각성자에요!”
"뭐?! 마력 각성자?"
김철수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마력 각성자를 어떻게 무급으로 고용한 거야? 마력 각성자면 마석 정제만 해도 엄청나게 벌 텐데?!"
카캬카-
천문석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의 김철수, 철수형이 그 해답이었다.
천문석은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를 모신다고 말했다.
'숨겨진 실세 = 김철수 사무실의 대표 김철수!'
엠마와 헌터들은 철수형을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
마석 카르텔의 마수를 막아줄 튼튼한 그늘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은근히 잔정이 많은 철수형에게 사실을 말해주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
천문석은 시침을 뚝 떼고 말했다.
"철수형. 저 못 믿어요? 수많은 알바를 같이한! 그 키즈카페에서 같이 살아나온 동지를!"
순간 김철수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는 그 지옥에서 무사히 살아나온 동지지! 내가 너는 완전히 믿는데.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쟤들 절대 뒤통수 못 치고 엄청 열심히 일할 테니까 일거리 팍팍 넘기세요. 제가 보증합니다!"
천문석은 가슴을 두들기며 장담했다.
당연했다.
엠마와 부하들을 굴리기 위해 몇 겹의 안전장치를 만들었다.
-카르텔의 집행 부대를 보게 하고 그 집행 부대가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암살검이 자신의 친구라는 걸 확인시키고, 자신이 재금 그룹과 일하는 거물이라고 믿게 했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한국에서 앞뒤로 맞이한 위기.
‘카르텔과 재금 그룹.’
지금 엠마와 부하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이 불을 끌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믿게 됐다.
재금 그룹의 숨겨진 실세.
김철수!
지금 엠마와 게릭, 클릭스, 폴리머, 네 헌터의 지상과제는 철수 형에게 잘 보이는 거였다!
크크크-
천문석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철수형. 쟤 말고 세 명 더 올 텐데. 야근도 밥 먹듯이 시키고 아주 빡세게 굴려야 합니다. 성실하게 매일매일 일해야 사람 될 놈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