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깊은 새벽 문득 눈을 뜬 천문석.
천문석은 한참 동안 눈을 뜬 채 잠이 오길 기다렸지만,
한번 달아난 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한겨울의 무림 던전에서 빡세게 굴러서인가?
갑자기 한여름이 된 날씨, 푹신한 침대와 포근한 이불 이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천문석은 창밖에 뜬 달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확 넓어진 거실 한쪽 두툼한 러그 위에 티피, 인디언 텐트가 쳐있었다.
조용히 걸어가 슬쩍 가림막을 걷으니, 팔다리를 대자로 펼친 꼬맹이가 보였다.
새로운 방에 자신의 침대가 있는데도 꼬맹이는 자기 이름이 붙어있는 텐트에서 자고 있었다.
적예의 나뭇가지 검을 손에 꼭 쥔 채 이불을 걷어차고 잠들어 있는 특급 헌터, 꼬맹이.
천문석은 한쪽으로 밀려난 이불을 들어 특급 헌터의 배를 덮어 줬다.
"퐁퐁검 좋아···. 결방 싫어···."
특급 헌터는 적예의 나뭇가지 검이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잠꼬대까지 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옥상으로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옥상을 걸어 난간에 선 채 도시의 야경을 바라봤다.
하늘에 뜬 밝은 달과 수많은 별보다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
이 야경을 보고 있으니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이 순간 떠오르는 이름 이세기.
이세기가 이 야경을 봤으면 정말 좋아했을 거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에서 사라진 적예도.
천문석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예(赤芮).
전생의 기억 중 유달리 선명한 어린 시절의 기억.
그러나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이세기가 말한 '적예'는 없었다.
무림 던전에서는 다급한 상황이 계속 이어져 그 이유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유가 생기니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천문석의 손이 머리로 움직였다.
쓰으윽-
아직 짧은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
오리온 길드의 현장 면접 때.
강철 와이번을 쫓아버리기 위해 전생의 경지를 훔쳤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하늘의 저울은 천문석의 머리카락을 가져갔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머리카락의 모근이 살아있고 생사팔문의 보법도 일부 남아서 이상하게 여겼었다.
'전생의 경지를 훔쳤는데 머리카락을 영구적으로 가져간 것도 아니고 그냥 한번 빡빡 밀고 끝낸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계산이 맞지 않아,
혹시나 다른 것도 가져간 게 아닌지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늘의 저울이 무엇을 대가로 가져갔는지···.
"하-"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깊은 한숨.
지금에서야 그때 하늘의 저울이 무엇을 가져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날 꾼 너무나 생생했던 어린 시절의 꿈.
거기에 하늘의 저울이 가져간 대가가 담겨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기억.
적예(赤芮).
'적예의 기억'이 하늘의 저울이 가져간 대가였다.
기억은 존재의 증명이다.
적예가 존재했다는 기억이 사라지며,
천문석의 마음속에서 적예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순간 천문석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삶은 그 끝이 정해져 있으나 그 본질은 끝없이 이어지니···."
"크게 그리워하는 사람은 설령 삶이 끝난다고 해도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된다."
무저갱의 마굴을 홀로 걸으며 수천수만 번 되뇌던 구결.
생자필멸. 生者必滅.
회자정리. 會者定離.
거자필반. 去者必返.
사람의 본질 영혼육백.
삶이 끝나는 순간.
영과 혼은 하늘로 날아가고,
육과 백은 땅으로 스러진다.
혼이 담기는 그릇 영체,
백이 담기는 그릇 육체.
혼백을 담은 그릇, 영육이 흩어진다 해도.
그 안에 담긴 본질, 혼백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문석은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을 바라보며, 기억에서 사라진 동생에게 절절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영육은 사라져도 혼백은 끝없이 이어지니···."
"적예,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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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냉기가 쏟아지는 시스템 에어컨 아래 소파,
천문석은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덮고 리모컨을 쥔 채 소파에 누워있었다.
느긋한 평일 오전.
천문석은 손가락만 까닥여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커다란 텔레비전을 스쳐 지나가는 예능, 광고, 다큐, 영화 그리고 뉴스.
[남중국···.]
남중국이란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천문석은 채널을 멈췄다.
3일 전 긴급 뉴스로 소식을 들었던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 남중국의 지도가 화면 가득 나타났다.
지도 곳곳이 마경을 뜻하는 붉은 색으로 물들었고, 전선을 뜻하는 붉은 선이 마경을 넘어 해안가로 이동한 상태.
[...쏟아지는 몬스터와 마수에 전선이 크게 뒤로 밀렸습니다···.]
문득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하 이것도 큰일이네."
처음 이 뉴스 속보를 들었던 3일 전에는 별생각 없이 넘겼다.
그러나 곧 천문석은 깨달았다.
남중국은 무림 던전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는 장소였다.
남중국이 갑자기 발생한 몬스터 웨이브로 개판이 된 이상,
장민 대표의 협상이 끝나도 무림 던전 입구를 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게다가 남중국에 나타난 건 몬스터와 마수뿐만이 아니었다.
이때 뉴스 화면 가득 나타나는 원근감을 무시하는 거대한 몬스터.
거대 괴수!
거대 괴수는 엄청난 몬스터 반발 장으로,
지구에서조차 현대 무기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거대 괴수를 잡으려면 경험과 실력, 장비 모든걸 갖춘 최소 20인 이상의 레이드 팀이나 나이트 아머 기갑사단이 필요했다.
아니면 완전무장한 한 자릿수의 세계 랭커가 움직이거나.
세 가지 방법 모두 남중국에서는 사용하기 힘든 방법이었다.
남중국은 1차 게이트 사태 당시, 사회 기반 시설이 집중된 도시지역 대부분이 파괴당했다.
이후 게이트 안정화 장치가 설치되고 안정화 권역에서 도시가 재건됐지만, 여전히 마경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중앙 정부가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군벌화된 헌터 집단이 지역을 나눠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견제하는 군벌 헌터들은 적극적으로 마경을 제거하지 못했다.
마경의 핵심 재앙급 몬스터를 제거하려다가 약해지면 다른 군벌 헌터에게 잡아 먹힌다.
게다가 마경에서 쏟아지는 마석 들도 문제였다.
멕시코의 구리협곡 마경이 남미의 카르텔과 경제를 지탱하는 것처럼.
남중국의 마경에서 쏟아지는 마석은 군벌 헌터들의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력의 핵심인 '레이드 팀'을 거대 괴수 토벌에 선뜩 내놓을 군벌 집단은 없었다.
'나이트 아머 기갑사단'은 미국의 최우방국이 아니면 아예 판매조차 안 되는 상황이고.
중국 전체에 몇 없는 '한 자릿수 세계 랭커'도 복잡한 정치 상황에 나서기 힘들었다.
수많은 균열과 던전이 생겨났던 서울 사태 당시.
‘대형 길드’, ‘서울 헌터 부대’, ‘나이트 아머 기갑사단’이 빠르게 움직여 거대 괴수와 몬스터, 마수를 처리했던 한국과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설마, 안정화 권역에 있는 대도시도 무너지는 거 아냐?"
천문석은 심각한 얼굴로 뉴스를 봤다.
안정화 권역 안에서는 균열과 던전이 발생하지 않고 마수와 몬스터의 반발장이 억제된다.
하지만 몬스터와 마수가 일정 수 이상 권역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 게이트 안전장치에 과부하가 걸리고 작동이 멈춘다.
거대 괴수와 몬스터, 마수를 빨리 처리하지 못하면 남중국의 게이트 안정화 권역 안 대도시가 날아갈 수도 있었다.
최소 100만명 이상이 거주하는 대도시들!
이 대도시가 하나라도 무너지면 상상을 초월한 인명피해가 날것이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는 거 아냐···."
그런데 텔레비전 속 아나운서는 천문석의 예상과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밀린 전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거대 괴수도 3개체나 잡았다고 발표했는데 믿을 수 있을까요?]
‘뭐, 거대 괴수를 잡았다고?’
천문석이 깜짝 놀랄 때, 전문가 패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지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서 정확한 영상자료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공식 경로를 통해 알아보니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을 보시죠.]
전문가 패널이 화면에 보여주는 십여 장의 사진들.
무너진 건물과 몬스터와 마수의 사체가 뒤섞인 도심을 찍은 위성 사진.
마력장에 왜곡된 십여 장의 위성 사진에는 하나같이 소용돌이치는 구름이 찍혀 있었다.
[이 소용돌이 치는 구름이 나타난 지역의 몬스터와 마수. 그리고 거대 괴수가 증발하듯 사라지고 있습니다. 현지에서는 폭풍우를 몰고 다니는 각성 헌터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설마 이게 각성 헌터 한 명이 한 일이란 건가요? 이게 가능한 건가요?]
아나운서가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묻는 순간.
전문가 패널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전 1차 게이트 사태 때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검은 폭풍!]
[네 맞습니다. 거대 괴수를 넘어 재앙급 마수조차 잡아낸 전설적인 헌터, 검은 폭풍이라는 전례가 이미 있습니다.]
[그럼 남중국에 검은 폭풍 같은 각성 헌터가 나타났다는 말씀인가요?!]
아나운서는 방송인 것도 잊고 깜짝 놀라 외쳤다.
그러나 천문석은 아나운서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검은 폭풍.
불리한 전세를 몇 번이나 뒤집으며 끝까지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검은 폭풍.
당시 낙동강 전선 뒤에 있던 건 한반도에 남은 유일한 공업단지와 수천만의 피난민들이었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졌다면 서울 수복 작전은 시작도 할수 없었다.
검은 폭풍은 이어지는 서울 수복 작전마저 성공시키고, 모든 명예와 영광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전투의 승패를 넘어 전쟁의 승패마저 바꿔 버린 역대 최고의 커맨더 검은 폭풍.
검은 폭풍의 정확한 각성 계통과 등급은 알려지지 않지만, 적어도 뽀미 이상일 것이다.
대형 마수 23마리를 공처럼 허공에서 굴린,
규격 외의 다중 초능력 각성자 국민대 뽀미 이상의 능력자가 검은 폭풍이었다.
검은 폭풍급의 각성 헌터가 나타난다면,
남중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도 단숨에 변한다.
남중국이 아무리 개판이어도 낙동강과 호남평야까지 밀렸던 한국 상황보다는 나았다.
고만고만한 헌터 군벌은 일순간에 통합되고 마경 제거의 핵심, 재앙급 마수와 몬스터도 순식간에 끝장날 것이다.
당연히 무림 던전의 입구를 뚫는 일도 바로 해결된다.
천문석은 기대감을 품은 채 전문가 패널의 이야기를 들었다.
[...거대 괴수가 쓰러지면서 웨이브의 기세가 주춤한 건 사실입니다. 이 사이 무너진 전선 재구축에 성공하고 조금씩 밀어 올리고 있습니다.]
[그럼 정말로 검은 폭풍급의 각성 헌터가 나타난 걸까요?]
[...아직 단정 할수는 없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검은 폭풍의 능력은 너무나 독보적이거든요···.]
[그렇다면 언제쯤 남중국의 혼란이 해결될까요?]
[그것도 아직은 말씀드리기 힘들겠네요.]
[그렇군요. 지금까지 한호석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W.S. 인더스트리 수뇌부의 한국 방문 계획이···.]
뉴스를 보던 천문석은 맥이 탁 풀렸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결론은 모른다였다.
하-
천문석은 한숨을 내쉬며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이때 현관문의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삐,삐,삐-
그리고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불량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