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장일이 숲으로 달려가고 한참 후.
주호가 숲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아니! 한시가 급한데!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순간 바라카스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제가 화를 내는 게 아니고···."
주호가 깜짝 놀라 움츠러들 때.
경악한 바라카스의 외침이 터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순간 눈을 감고 앉아있던 이세기도 번쩍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봤다.
경악한 바라카스와 이세기의 시선이 하늘로 향하는 순간.
파르르르-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산천초목이 떨었다!
그러나 미동도 없는 수레.
세 사람은 깨달았다.
흔들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들 자신이다.
“이게 대체!?”
주호마저 경악해 주위를 돌아보는 순간.
퐁, 퐁, 퐁-
경쾌한 소리와 진동이 퍼져 나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이세기의 검대에 걸린 검, 천문석이 건네준 십자검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십자검으로 향하는 순간 거대한 파문이 세 사람을 덮쳤다.
하늘과 땅이 수없이 뒤집히는 감각.
아찔한 현기증에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
타다다다닥-
이세기의 전신에서 푸른 불꽃이 일어나고,
푸른 불꽃은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 주호와 바라카스를 삼켰다.
이 순간 십자검에서 천지를 떨어울리는 거대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으으으으응-
이와 동시에 폭발하는 섬광.
섬광과 거대한 울음소리가 사라졌을 때.
수레의 짐칸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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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스스슥-
섬광이 사라지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훅 올라왔다.
눈 내리던 한겨울 숲이 갑자기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한여름이 돼버렸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갑자기 세상이 변해버렸다.
이세기, 주호.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때 천문석이 남긴 십자검이 다시 한번 진동하기 시작했다.
퐁, 퐁, 퐁-
“으아악-”
주호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는 순간.
십자검 검신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하얀빛.
하얀빛은 엄청난 속도로 하늘로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북동쪽 하늘로 사라졌다.
"하늘 고래의 념이!"
경악한 바라카스가 하얀빛을 쫓아 달려갈 때.
푸른 하늘을 바라보던 주호는 경악했다.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화살들!
"저건!?"
주호가 외치는 순간.
쒜에에에엑-
거대한 화살의 궤적을 따라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곧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콰아아앙, 쾅, 쾅, 쾅-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는 땅과 요동치는 대기.
당장이라도 눈과 귀가 멀어버릴 듯한 엄청난 섬광과 굉음이 터졌다.
주호는 넋 나간 표정으로 거대한 화살이 쏟아져 폭발이 일어난 곳을 바라봤다.
이 순간 먼지구름 속에서 튀어나오는 거대한 촉수!
구으으응-
거대한 촉수가 채찍처럼 하늘을 가르는 순간,
푸른 빛이 촉수에 맺히고 사방에서 쏟아지던 거대한 화살들이 박살 났다.
콰지직, 쾅-
단숨에 불꽃이 되어 사라지는 흩어지는 거대한 화살들.
주호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내가 무저갱의 마굴에 떨어진 건가!?"
휘이이잉-
이때 거센 바람이 불어와 자욱하게 일어났던 흙먼지가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이 순간 드러나는 수천수만의 요마괴이(妖魔怪異)!
경악한 주호가 눈을 부릅뜰 때.
그으으으응-
하늘을 떨어 울리는 울부짖음이 울려 퍼지고,
거대한 촉수를 휘감은 괴생명체가 나타났다!
주호는 바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이런 젠장! 되는 일이 없네! 이세기. 도망쳐라! 마굴의 거대 괴이다!"
그러나 이세기는 미동도 하지 않고 정면을 주시했다.
그으으으으으응-
천지를 떨어 울리는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파르르 쉴 새 없이 경련하는 손!
이세기는 직감했다.
눈앞의 저 거대한 촉수 괴물은,
주호가 말한 대로 옛이야기에나 등장하는 괴이(怪異)다.
부정형의 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힘.
도망치지 않는다면 백이면 백 죽을 것이다.
그러나 저 괴이가 있는 곳에서 기감이 느껴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저 괴이와 싸우고 또 다른 이들은 도망치고 있었다!
이 순간 이세기는 물었다.
"돌멩이,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이세기는 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
이세기는 웃음을 터트리며 친우가 넘겨준 대환단을 삼키고 십자검을 뽑았다.
순간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천문석의 장난스러운 목소리.
'이세기, 넌 천검이 될 거다.'
천검(天劍).
상상조차 하지 못한 엄청난 칭호.
그러나 이세기는 자신이 천검이 되리라고 확신했다.
자기 자신보다 믿는 친우, 돌멩이가 이야기했으니까.
이세기는 십자검을 뽑아 휘둘렀다.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주저함과 두려움이 잘려나가는 순간.
휘이이잉-
시작된 곳 없이 불어오고,
끝나는 곳 없이 사라지는 바람이 불어왔다.
대환단으로 격발된 내공이 노도처럼 쏟아지는 순간.
이세기는 폭풍처럼 괴이를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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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이 운전하는 장갑 SUV는 쉬지 않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다음날 정오 무렵 게이트 거점도시 신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시작된 1차 게이트 검역 절차.
게이트 검역을 받으며 천문석은 감탄했다.
오래전 재금 보안과 함께 게이트 지역을 넘어갔을 때 이상으로 빠르게 검역이 끝났고 게이트 통과 열차를 탔다.
게이트 통과 열차 위에 자리한 장갑 SUV에 앉은 천문석.
천문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장철 헌터를 봤다.
장철 헌터가 나타나자 헌터 부대 소속 장교들과 헌터부 소속 공무원은 VIP라도 방문한 듯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 박혁 이사의 친구.
-대형 길드 오리온 길드 최후식의 선배.
-무림 던전이라는 각성 스팟을 사실상 소유했다.
게다가 헌터 부대와 헌터부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특급 헌터의 외삼촌 장철 헌터는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때 장철이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창밖을 가리켰다.
"하- 우리 집 꼬맹이가 나를 저렇게 존경스럽게 봐야 하는데. 어제도 이시언 모른다고 한소리 들었다. 도대체 이시언이 누구냐?"
천문석은 웃음을 삼키며 설명했다.
"러브 시그널이라는 예능에 나오는 출연자입니다. 요즘 특급 헌터가 푹 빠졌습니다."
"걔가 예능에 빠졌다고? 요새는 경주 연습 안 하고? 무슨 대장 이겨야 한다던데?"
특급 헌터 꼬맹이가 러브 시그널에 빠진 이유는 앙꼬 대장을 이기려는 이유와 같았다.
앙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다.
러브 시그널의 이시언은 여성 출연진 대부분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꼬맹이는 그런 이시언을 보고 배워 앙꼬가 쫓아다닐 정도로 멋진 특급 헌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사실은 특급 헌터가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
천문석의 설명이 끝나자,
장철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애가 무슨 연애를 예능으로 배워···. 우리 집 꼬맹이가 좋아하는 애 이름이 뭐라고?"
순간 천문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
분명 예전에 이름을 들었는데,
하도 ‘앙꼬’라는 별명만 부르다 보니 정작 이름은 잊었다.
"앙···. 뭐라고 긴 이름인데. 다들 앙꼬라고 부릅니다."
"앙꼬, 앙꼬······."
장철은 몇 번 이름을 되뇌다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무슨 단팥빵 상표 같은 별명이냐? 하여튼 우리 집 꼬맹이가 좋아하는 애가 있단 말이지. 이름이 ‘앙꼬’, 키즈카페에 자주 오고? 알려줘서 고맙다. 흐흐흐"
장철이 음흉하게 웃을 때 사이렌이 울리고 장갑 SUV 스피커에서 방송이 들려왔다.
위이이잉-
-광화문 행 게이트 열차 출발하겠습니다.
천문석과 장철이 탄 장갑 SUV를 실은 게이트 열차는 순식간에 게이트를 넘어 지구의 게이트 지역에 도착했다.
게이트 지역에는 장강 유통의 지원팀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고,
장철은 이 직원에게 타고 온 차량과 무장 상자를 넘기고 맨몸으로 천문석과 함께 게이트 지역 밖 광화문으로 나왔다.
아직 환한 오후의 광화문 광장.
장철 헌터는 지원팀 직원이 가져온 장갑 SUV를 가리키며 천문석에게 물었다.
"이 차 써도 되는데 어때? 집까지 타고 갈래? 나는 근처라 걸어가도 되는데."
"아뇨 괜찮습니다. 오래간만에 좀 걷고 싶네요."
천문석이 사양하자,
장철은 두 번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아이템은 어떻게 할까? 2차 검역에 2, 3일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제임스 시켜서 집으로 보내줄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대환단을 옥탑방에서 보관하는 건 무리였다.
천문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메모지를 뜯어 주소를 적었다.
"여기로 보내주시면 될 것 같네요?"
"...재금 빌딩. 김철수 사무소?"
장철이 메모지를 읽자,
천문석은 바로 앞에 있는 성채 빌딩을 가리켰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입니다. 저 성채 빌딩에 있습니다."
"아, 그 전에 이야기했던 선배."
장철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이템은 사무실로 보내줄게.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부담가지지 말고 언제든 연락하고."
천문석이 장철 헌터와 장민 대표에게 도움을 받은 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가를 원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순수한 호의, 그렇기에 연락하라는 장철의 이야기가 더 깊게 다가왔다.
천문석은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자주 연락하겠습니다."
"그래. 우리 집 꼬맹이에게 내 인사 전해주고. 다시 한번 각성한 거 축하한다. 넌 아마 랭커가 될 거다."
장철은 호탕하게 웃으며 장갑 SUV를 운전해 멀어져 갔다.
천문석은 몸을 돌려 광화문 광장을 걸으며 장철이 남긴 말을 생각했다.
랭커.
비각성 헌터는 각성 헌터를 꿈꾸고.
각성 헌터는 랭커가 되기를 꿈꾼다.
각성 헌터 중에서도 귀족, 마력 각성자를 뛰어넘는 귀족 중의 귀족이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 랭커.
천문석도 예전에는 랭커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생각이 변했다.
무림의 절대자 마도 지존 천마.
듣기에는 그럴듯한데 직접 해보니 영 별로였다.
그때보다 비정규직 알바인 지금 생활이 더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제 곧 전생과 현생의 소원대로 건물주가 될 테고 말이다.
천문석은 피식 웃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광화문 광장을 돌아봤다.
"...몬스터 마석 싸게 팔아요!"
"오크 부족 토벌! 근접 격수 모십니다!"
"마력 각성자 모십니다! 계통 상관없이 세 몫 쳐 드립니다!"
"여기 서명 좀 부탁드립니다. 뽀미 국회의원 추진 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
광화문 광장 곳곳에서 들려오는 활기찬 목소리.
몬스터와 마수,
게이트, 균열, 던전.
무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많은 시대이다.
그러나 그 위협을 여기 있는 수많은 각성, 비각성 헌터들이 걷어내고 문명의 불빛을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헌터의 시대!
천문석은 어쩐지 즐거운 기분에 휘파람을 불며,
헌터들이 가득한 광화문 광장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홀가분한 몸,
홀가분한 마음.
그러나 자신은 방금 나온 던전에서 상상을 초월한 대박을 쳤다!
탁, 탁, 탁-
벨트에 걸린 적예의 나뭇가지 검이 가볍게 흔들릴 때 문득 정류장으로 다가오는 버스가 보였다.
번호가 보이지 않아도 차체의 색과 도장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273번 버스!
집으로 가는 버스다.
천문석은 한달음에 달려 버스를 잡아탔다.
거의 텅 빈 버스 좌석!
'운이 좋군!'
신나게 웃으며 교통 카드를 찍으려는 순간,
천문석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
무림 던전에 들어가면서 의복, 신발, 지갑 같은 소지품과 무장 박스까지 모조리 커다란 주머니에 넣어서 제출했다.
그리고 그 주머니는 나중에 광화문 게이트 지역 물품 보관함에 보관된다고 했었다.
즉 무림 던전에서 초대박을 친 천문석은 지금은 개털이었다.
아니 개털은 아니었다.
벨트에 묶어둔 전낭.
이 안에 은자가 들어있었다.
개당 300만원에 팔린다는 무림 던전의 아이템, 은자.
그러나 이 은자는 무림 던전이 다시 열리기 전까진 가치가 폭락한 상태이다.
은값만 따지면 대략 3만원.
그러나 무림 던전이 다시 열리면 300만원이 된다.
천문석에게는 지금은 팔 수 없는 은자만 있었다.
"..."
이때 버스 기사 아저씨의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생. 얼른 카드 찍어야. 출발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