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휘이이-
이때 바람을 타고 희미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보니 멀리 공터에 자리한 마차와 무사들이 부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위연화가 우리를 확인했군요.”
장일 총관은 반색하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천문석은 이동을 시작한 마차를 봤다.
이제 저 마차를 타고 나가면 무림 던전은 안녕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따르는 수레를 본다.
이세기.
생사를 넘어 다시 만난 친우와 헤어질 시간이었다.
천문석은 장일 총관에게 이세기를 부탁했다.
"장 총관님. 뒤에 수레에 있는 이세기라는 청년 좀 도와주세요. 강호 초출인데 제가 보니까 앞날이 아주 기대되네요."
"네 알겠습니다. 하하-"
"그럼 전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러 가야겠네요."
천문석은 가볍게 마차 짐칸을 달려 뒤쪽 마차로 넘어갔다.
수레를 모는 이세기 옆에 털썩 앉는 천문석.
"나 이제 간다."
이세기는 이미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짧은 물음 속에 담긴 깊은 감정.
무림 던전이 클리어된 이상, 자신과 이세기가 다시 만날 가능성은 없었다.
아마도 다음에 이세기가 만나는 천문석은 전생의 자신인 천마 천문석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란 언제나 예측불허.
처음 무림 던전에 들어올 때도 이 안에서 이렇게 많은 사건·사고를 겪고 전생의 이세기까지 만날 줄 상상도 못 했다.
"어쩌면."
천문석은 여지를 남기며 웃었다.
그리고 롱소드를 검집째 끌러서 내밀었다.
"이거 받아라."
“...”
말없이 롱소드를 보는 이세기.
“야, 어서 받아.”
천문석은 이세기의 검대에 롱소드를 걸어줬다.
롱소드에 담긴 검혼과 하늘 고래의 힘은 사라졌지만,
천검의 검혼이 담겼던 흔적은 이 검에 남아있다.
이 롱소드는 천검의 검혼을 흡수한 이세기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세기는 참담한 얼굴로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하다. 이런 엄청난 법보가 나 때문에 힘을 잃다니···."
천문석은 웃었다.
삑삑이 검강 롱소드.
하늘 고래와 천검의 검혼이 담긴 엄청난 검이었으나 이 또한 도구,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하늘 고래의 힘 덕분에 한번 생명을 구했고.
이세기가 롱소드를 사용한 덕분에 자신과 발도 스님, 얍삽한 주호가 생명을 구했다.
아쉬움은 있지만,
미련은 이미 날려버렸다.
천문석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세기를 봤다.
이세기는 천검의 검혼을 흡수하고 대환단을 얻었지만, 아직 천검이 아니었다.
흡수한 검혼을 완전히 체화하고 대환단으로 내력을 키우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이걸 모두 해낸다 해도 천하 십절의 검절에 간신히 도달할 뿐이다.
천하 십절의 검절.
무림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 엄청난 위치다.
그러나 이세기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갈 생각이었다.
마도 지존, 천마.
이세기는 창천문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천마에게 도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세기가 천검의 경지에 오른다고 하여도 천마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했다.
-무저갱의 마굴 돌파, 마도 대전, 장강 격전, 개방 거지 떼 소탕, 화산파 현판 깨기···.
천마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수많은 아수라장을 헤쳐나왔다.
'전생의 나. 진짜 무지막지하게 강했구나.'
천문석은 전생의 자신에게 새삼 감탄하며 이세기의 어깨를 툭 쳤다.
"..."
말없이 고개를 드는 이세기.
천문석은 이세기의 목에 팔을 걸어 조이며 말했다.
"야, 뭐 이리 죽상이야?"
"돌멩이···."
"됐고. 너 대환단 절대 주호에게 주지 마라. 쟤 대환단 먹어 봤자 소용없어. 대환단 네가 먹는다고 약속하면 내가 아주 좋은! 깜짝 놀랄 정보를 가르쳐줄게."
이세기는 어린 시절처럼 눈을 반짝이는 천문석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천문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세기는 가슴속에서 큰 울림이 느껴졌다.
하늘조차 호응하는 엄청난 검, 법보가 힘을 잃었는데.
천하의 그 누가 이렇게 쉽게 털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법보마저 자신에게 넘겨주고 대환단을 꼭 먹으라고 채근한다.
순간 옛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던 돌멩이.
-아이들을 마종문에 입문시키고 멀리 떠나던 돌멩이.
-대박 객잔의 주인, 큰 땅을 가진 장원주가 되는 게 꿈이라면서도 재물에는 관심이 없던 돌멩이.
돌멩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옛 모습 그대로인 친우를 보며 이세기는 맹세했다.
‘돌멩이,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이세기가 마음속으로 맹세하는 순간,
천문석은 어깨를 툭 치며 다시 물었다.
“야, 이세기! 빨리 약속 안 하냐?”
"그래. 알았다. 약속할게."
이세기가 약속하자,
천문석은 음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내 정보는 천마에게 지지 않을 방법이다!"
"뭐? 천마?!"
이세기가 깜짝 놀랄 때 손안에 쥐어지는 잘 접힌 편지.
"거기에 내 금낭묘계가 담겨있으니! 천마에게 도전하기 전에 펼쳐 보아라!"
천문석이 근엄하게 말하는 순간 어이없어하는 이세기.
"그놈의 금낭묘계.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그럴 때마다 완전 사기꾼 점쟁이 같아."
"이번엔 진짜야!"
"됐고. 이거나 받아라."
이세기는 품 안에서 어쩐지 눈에 익은 한자 길이의 나뭇가지 검을 꺼내 건넸다.
"어, 이거 설마?"
"내가 챙겨놨었어. 이제 돌려줄게."
천문석은 나뭇가지 검을 받아 가볍게 휘둘렀다.
휘이이이-
나뭇가지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검에서 흘러나오는 바람 소리.
귀에 익은 바람 소리는 경쾌한 휘파람 소리를 닮았다.
천문석은 한눈에 알아봤다.
전생의 어린 시절 자신이 아이들에게 만들어준 속이 빈 나뭇가지 검이다.
휘이, 휘이이-
휘파람 소리를 듣는 순간 산속 사당에서 환하게 웃으며,
신나게 나뭇가지 검을 휘두르는 꼬맹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키즈카페의 악마 꼬맹이들과 전혀 다른 천사 같은 꼬맹이들!
천문석이 자신도 모르게 웃을 때,
이세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나뭇가지 검. 네가 적예한테 만들어준 거야. 적예가 언제나 그거 가지고 다녔던 거 기억하지?"
"적예?"
이세기가 전에도 말했던 이름.
그러나 천문석의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문득 나뭇가지를 돌려보니,
한쪽에 새겨진 이름이 보인다.
적예(赤芮).
붉은 풀?
새겨진 이름을 손끝으로 만져보니 자신이 새겼다는 느낌이 왔다.
"적예라고?"
천문석이 의아해하는 순간, 이세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 적예 기억 안 나? 그 꼬맹이가 네 꿈을 듣더니 엄청난 부자가 돼서 널 집사로 고용한다고 했잖아?"
뭐지, 이 어이없는데 익숙한 이야기는?
천문석이 고개를 갸웃할 때 연이어 들려오는 이야기.
"걔가 네 등이랑 발바닥에 '적예 거'라고 썼잖아?"
“...”
"버섯 키워서 대박 내겠다고 키웠는데 멧돼지가 버섯을 다 먹어서 울고."
"겨우살이 채취한다고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못해서 다시 울고."
"꿀이 비싸다니까 커다란 벌집을 들고 엉엉 울면서 달려온 적도 있었잖아?"
"..."
천문석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이 모두 그렇듯 전생의 기억 또한 선명한 부분과 흐릿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선명한 어린 시절의 기억 어디에도 이세기가 말한 적예의 기억은 없었다.
천문석이 자세히 물으려 할 때,
수레 짐칸에 앉아있던 바라카스가 끼어들었다.
"시주. 내가 급히 물을 게 있는데!"
천문석은 바라카스가 뭘 물으려는지 직감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발도 스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직과 신뢰! 이미 저 앞쪽 수레의 장일 총관에게 말해 뒀으니. 돈을 받는 데로 은자 1만 냥은 마제사로 보낼 겁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검에 관해서 물을 게 있네."
바라카스의 손이 이세기의 검대에 걸린 천문석의 롱소드를 가리켰다.
"네? 제 검이요?"
"여기 시주의 검에서 '퐁, 퐁' 거리는 파문이 나오던데···. 그거 혹시 하늘을 나는 산처럼 거대한 고래와 관련된 거 아닌가? 엄청난 안개를 뿜어내는."
"하하, 스님 고래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요."
이세기가 웃음을 터트릴 때.
천문석은 진심으로 깜짝놀랐다.
엄청난 안개를 뿜어내며,
하늘을 나는 거대한 고래.
하늘 고래!
"아니. 스님이 하늘 고래를 어떻게 아시나요?!"
---
"장일. 너 진짜로 여기에 남겠다고? 갑자기 마경으로 튕기거나. 영영 나오지 못할 수도 있어."
위연화는 예비 각성자들이 탄 마차를 살피며 장일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장일 총관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난 각오했으니까. 문 닫히기 전에 얼른 예비 각성자들 내보내라. 위연화 부탁한다."
"이런 고집불통 녀석!"
위연화는 결국 설득에 실패하고 예비 각성자들이 탄 마차로 돌아왔다.
던전 입구가 언제 닫힐지 모르는 지금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화를 내는 위연화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장일 총관.
"잘 가라 위연화!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다. 언젠가 다시 보자! 하하하-"
"시끄러워! 너! 마경에 떨어져서 개고생하게 될 거다!"
이 순간 두 사람이 모는 마차와 수레가 동시에 출발했다.
쿠르르릉-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마차와 수레.
위연화의 마차는 천문석과 예비 각성자들을 태우고 무림 던전 출구로 향하고.
장일 총관의 수레는 이세기, 바라카스, 주호를 태우고 장가장이 있는 서녕시로 움직였다.
그리고 10여 명의 장가장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외쳤다.
“추적을 따돌리겠습니다!”
천문석은 마차 지붕에 앉아 도시 방향으로 멀어지는 수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장 총관님 감사했습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잘 가라 이세기!"
"돌멩이, 꼭 다시 보자! 그리고 미안했다."
이세기의 대답이 들려올 때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야, 주호 정신 차리기 전에 길에다가 버리고 가라. 걔 내가 보니까 완전 재앙의 화신이야!"
순간 수레 짐칸에서 벌떡 일어나 분통을 터트리는 주호.
"뭐? 야, 이 미친놈아! 내가 네 놈 만나고 되는 일이 없었어! 네놈이야말로 재앙의 화신이다!"
기절한척하던 주호는 천문석을 향해서 삿대질하며 외쳤다.
“하- 역시 기절한 척 한 거구나. 이런 얍삽한 녀석!”
천문석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주호는 이제 던전 보스도 뭣도 아니었다.
이제는 자신이 사릴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외쳤다.
"야, 주호! 어제 비무 사실은 내가 이겼다! 내가 너같이 얍삽한 놈한테 질 리가 없잖아? 카캬카-"
"뭐, 그게 무슨!?"
주호가 경악한 순간,
천문석은 다시 외쳤다.
"이세기! 이제 사실대로 말해라. 객관적으로 볼 때. 어제 비무 내가 이겼냐, 주호가 이겼냐?"
주호의 경악한 시선이 닿자,
이세기는 잠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천문석이 이겼습니다."
"이세기 대협!"
주호가 절절한 목소리로 외치는 순간.
천문석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지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러나 이제는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바로 내가! 단혈철검 주호를 이겼다! 카캬카-”
“야, 이···!”
주호가 부르르 떨며 말을 잇지 못할 때.
천문석은 재빨리 말했다.
"아. 그리고 너 대환단 안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주호! 얍삽하게 꼼수 부리지 말고! 앞으로는 착실하게 살아!"
"이런 쌍! 커억-"
주호가 목덜미를 잡고 뒤로 넘어가는 순간,
천문석은 마지막으로 바라카스 발도를 봤다.
하늘 고래에 대해 들은 후,
깊은 생각에 잠긴 발도 스님.
발도 스님은 이따금 번뜩이는 눈으로 이세기의 검대에 걸린 롱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처 숨기지 못한 복잡한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
그러나 천문석은 발도 스님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바라카스 발도.
어쩐지 이름이 특이하다 했더니,
발도 스님은 하늘 고래를 찾아 아주 오랫동안 세계를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퐁, 퐁- 하늘 고래의 소리와 진동을 느끼고 경악했던 발도 스님의 모습이 기억났다.
역시 세상은 넓었다.
무림 던전 안에서 하늘 고래를 찾아다니는 스님을 만나다니.
어쩌면 드넓은 무림 던전 안 어딘가에서 하늘 고래가 날고 있을지도 몰랐다.
구으으으응-
대기를 북처럼 울리며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거대한 산악 같은 생명체, 하늘 고래.
하늘 고래를 찾는 발도 스님은 하늘 고래의 힘이 머물렀던 자신의 검을 쫓아 이세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천문석은 문득 외쳤다.
"발도 스님. 꼭 고래 찾으세요!"
바라카스는 번쩍 고개를 들어 천문석을 향해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시주. 고마웠소."
빠르게 멀어지는 수레와 마차.
바라카스는 천문석이 탄 마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엄청난 고난을 예상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싱겁게 끝난 일.
게다가 너무나 운이 좋게도 하늘 고래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힘이 머물렀던 검까지 눈앞에 있었다.
의지로 현상을 변화시키는 힘,
하늘 고래의 념(念).
하늘 고래의 힘은 사라졌지만,
그 힘이 머물렀던 검을 따라가면 결국 하늘 고래가 살아가는 곳.
풍요의 대지, 허공도에 도착하리라.
천문석과 엮이며 거대한 재앙, 악연이 다가오리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일은 쉽게 끝나고 오랜 시간 찾아 헤맨 하늘 고래의 흔적까지 찾았다.
문득 발도 가문의 선조가 남긴 기록이 떠오른다.
하늘의 선악은 사람의 인지로 가늠할 수 없으니.
그 인과가 악연인지 선연인지는 모든 일이 끝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바라카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멀어지는 천문석을 바라봤다.
“...”
그러나 어째선지 모든 일이 좋게 끝났는데도 폭풍 전야처럼 불안한 마음.
"아미타불···."
바라카스는 입에 밴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흔들어 불안한 마음을 잠재웠다.
다행히 하늘 고래의 힘이 담겼던 검이 이세기에게 넘어갔다.
폭풍의 운명을 타고난 자,
천문석과는 더는 엮이지 않으리라.
이때 천문석이 탄 마차가 굽이진 길을 들어섰고.
이세기와 바라카스 그리고 어느새 일어난 주호.
세 사람의 시선이 마차 지붕 위 천문석에게 모였다.
“모두 잘 가라.”
천문석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순간,
이세기가 아득한 그리움을 담아 외쳤다.
"잘 가라. 돌멩이. 꼭 다시 보자!"
그리고 잠시 후 주호도 절절한 마음을 담아 기원했다.
“제발! 다시는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