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극음도 이열. 이 끈질긴 녀석.”
무림이 거칠어진 것인가?
어떻게 만나는 놈마다 쉽게 포기하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이열은 몸 상태가 엉망일 테니 걱정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열과 함께 움직이는 마도 18문의 일문, 극음도의 무사들이 문제다.
이들의 수준은 사자련 본단의 정예 무사 이상.
지금 일행이 상대할 수 없는 강적들이다.
당장 도망쳐야 했다.
"야, 바로 튀자!"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롱소드를 잡고 검혼을 일으켰다.
그러나 대답 없는 롱소드.
"아, 사라졌지···."
천문석이 돌연한 상실감에 한숨 쉬는 순간 이세기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이세기.
그러나 천문석은 차마 이세기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이세기는 수백의 적 앞에 검 한 자루만 들고 홀로 나섰다.
자신의 말만 믿고.
천문석은 하늘을 봤다.
먹구름이 사라지고 환해진 하늘.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단어, 기연과 마장.
"이게 마장입니까?"
천문석은 하늘을 향해 물었으나 무심한 하늘은 답하지 않았다.
하-
천문석은 한번 웃음에 미련을 털어내고 이세기의 어깨를 쳤다.
"야 됐어. 우선 빠져나가자. 네가 앞장서서 길을 열어야 한다. 목적지는 서녕시다. 우선 마차부터 찾자.
이세기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천문석은 바라카스를 봤다.
"시주···. 내가 꼭 물어야 할 게 있네!"
천문석은 손을 저어 바라카스의 말을 끊었다.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뒤에 흑기당과 극음도가 붙었습니다. 발도 스님이 주호를 챙겨 주세요."
"...알겠네."
일행은 마차가 놓아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언덕을 지나 침엽수 숲을 지나가는 네 명.
선두의 이세기가 기감을 퍼트리며 길을 열고 중앙에는 주호를 들쳐업는 바라카스가 후미에는 천문석이 달렸다.
일행은 곧 침엽수림을 통과해 마차를 묶어뒀던 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마차는 사라지고 말과 마차가 있던 장소에는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만 남아있었다.
"도망치면서 마차를 가지고 튀었구나!"
도망치던 병사와 무사 중 누군가가 마차를 가지고 튄 것이다.
이때 다시 한번 들려오는 흑기당의 매 울음소리.
휘유우우-
일행은 재빨리 잎이 무성한 침엽수림 안으로 들어갔다.
흑기당의 매는 크게 원을 한번 그리다가 무언가를 봤는지 북동쪽으로 멀어져 갔다.
"다시 나타나면 매를 잡을까?"
이세기의 말에 천문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선은 그냥 이동하자.”
지금 일행은 설산이 아닌 평지에 있다.
매가 떨어지면 흑기당과 극음도 녀석들이 직선으로 쫓을 테고 이동수단이 없는 지금은 그 추적을 뿌리치기 어렵다.
"그보다 너 지금 상태가 어떠냐?"
잠시 말없이 내부를 관조하더니 입을 여는 이세기.
"네 검으로 경지가 두 단계는 오른 것 같은데···. 내력이 그대로야. ...다시 한번 내공을 격발시킬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자칫 잘못하다가 주화입마라도 오면 끝장이다.
"그런데 두 단계라고?"
천문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천검의 검혼을 제대로 흡수했으면 이 정도일 리가 없었다.
"네가 준 검을 잡았을 때하고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 무언가 내 안으로 빨려 들어오면서 선명했던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만 같다. 그리고 감각이 좀 이상해. 뭔가 세상에서 유리되는 느낌이···."
이세기는 내부를 관조하며 설명했다.
천문석은 이세기의 몸 상태가 짐작됐다.
천검의 검혼을 흡수했지만,
아직 완전히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수준이 떨어진 것.
지금의 이세기는 극음도의 정예 무사들을 정면에서 압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이세기가 발목이 잡힌 사이 다른 놈들이 들이치면,
발도 스님은 도망쳐도 자신과 주호는 100이면 100 죽는다!
지금 최선은 장가장까지 최대한 빨리 도망치는 것이다.
"발도 스님. 여기서 서녕시까지 얼마나 걸리죠? 가능한 매에게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숲을 따라 이어진 길로 달리면 2시진은 달려야 하는데···."
4시간!
설산을 달리고 마차를 몰며 밤과 새벽을 꼬박 새웠다.
체력을 한계까지 쥐어짜 냈는데 4시간 동안 더 달려야 한다니.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로 달리죠!"
천문석의 외침과 함께.
일행은 관도를 따라 이어진 숲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 후.
말 울음소리와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이잉-
쿠르르르-
뒤를 잡혔구나!
모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
만감이 담긴 절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드디어, 드디어! 찾았구나! 으아아-"
---
"어?"
어쩐지 귀에 익은 외침을 듣는 순간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보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봤다.
"장일 총관님?!"
얼굴이 초췌해진 장일 총관이 커다란 수레 두 대를 이어서 몰아오고 있었다.
"밤새 찾았습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찾아서 다행입니다! 바로 수레에 타세요!"
천문석은 이세기와 바라카스에게 재빨리 말했다.
"이세기, 발도 스님. 수레에 타세요. 같은 편입니다!"
쿠르르르-
수레가 속도를 줄이는 순간,
이세기와 발도 스님이 뒤쪽 수레로 단숨에 올라갔다.
기절한 주호를 짐칸에 내리고,
이세기가 수레를 분리한 후 고삐를 잡아 능숙하게 몰기 시작했다.
천문석도 몸을 날려 장일 총관이 있는 수레에 올라탔다.
"장일 총관님. 추적이 붙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빈객분들이 흑기당의 매와 극음도의 무사들을 설산 방향으로 유인하고 있습니다!"
긴장된 표정으로 말하는 장일 총관.
다행히 장일 총관은 이미 상황을 알고 대비하고 있었다.
한숨 돌릴만한 상황.
그러나 무림 던전의 관리자인 장일 총관에게 꼭 전해야 할 사실이 있었다.
무림 던전의 클리어 사실.
"..."
차마 입이 열리지 않는 상황.
이때 장일 총관이 슬쩍 뒤쪽 수레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바로 빠져나가서야 합니다. 던전이 클리어됐습니다."
"알고 계셨나요?"
"하늘이 닫히고 몸이 세계에서 유리되는 느낌, 던전 클리어 감각을 느꼈습니다. 지금쯤 위연화와 예비 각성자들도 모두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무슨 일인지 의아했는데. 주호가 저 지경이니···."
장일 총관은 뒤쪽 수레에 실린 주호를 힐끗 보며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됐는데 갑자기,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서···."
"괜찮습니다.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은 게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시네요. 단혈철검 주호를 이기시다니. 던전 보스로 ...하면서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굳었던 장일 총관의 얼굴이 펴지고 경탄 어린 시선이 천문석에게 쏟아졌다.
하하-
천문석은 허탈하게 웃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주호 이 멍청한 놈이 대환단을 얻기 위해서 패배를 시인할 줄은!
'하, 이런 재앙의 화신 같은 놈!'
천문석이 내심 분통을 터트릴 때,
장일 총관이 뒤에서 따라오는 수레를 힐끗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제 가능한 한 빨리 입구로 나가셔야 합니다. 언제 입구가 사라질지 모릅니다."
"혹시 입구가 사라지면 안에 갇히게 되는 건가요?"
천문석이 긴장된 얼굴로 묻자 고개를 젓는 장일 총관.
"그건 아닙니다. 설명하기 복잡한데···. 던전의 입구가 사라지는 순간 이 안에 있으면 밖으로 그러니까 이세계와 지구로 튕겨 나갑니다."
천문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이 클리어되고 혹시나 이 안에 갇히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이때 들려오는 장일 총관의 목소리.
"그런데 랜덤입니다."
"네?"
"튕겨 나가는 위치가 랜덤입니다."
"...설마 이세계의 대수림이나 지구의 태평양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건가요?"
"아뇨. 그런 위치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천문석이 내심 안심할 때,
장일 총관의 말이 이어졌다.
"보통은 마력장이 강한 곳에 떨어집니다."
"...!"
마력장이 강한 곳이면, 게이트, 마경, 균열, 던전이잖아!?
천문석이 어이없어하자,
장일 총관이 씨익 웃었다.
"그러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바로 나가실 수 있도록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네?"
천문석이 반문하는 순간,
장일 총관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
멀리 도로 옆에 자리한 공터에 커다란 마차가 세워져 있고 그 주위에 십여 명의 말 탄 무사들이 있는 게 보였다.
눈에 익은 복장의 무사들, 장가장의 무사들이다.
그리고 마차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체형의 사람.
천문석은 한눈에 이 사람을 알아봤다.
예비 각성자들을 안내해 던전으로 들어온 인솔자였다!
"저 마차에 예비 각성자들이?"
“네 맞습니다. 혹시 문제가 생길까 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벌써 도착했네요. 저기 인솔자 위연화를 따라 바로 던전에서 나가시면 됩니다.”
장일 총관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시면 철권 대협, 장철 헌터님께 장가장을 장일 총관이 지키고 있겠다고 전해주세요.”
천문석은 깜짝 놀라 장일 총관을 봤다.
"...같이 나가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아니 랜덤으로 튕긴다면서요!?"
“방법이 있습니다.”
장일 총관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무리 방법이 있어도 입구가 닫힌 던전에 홀로 남겠다니···.
천문석이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자 장일 총관이 문득 입을 열었다.
"무림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네요. 어느새 저는 대한민국의 헌터가 아니라 장가장의 총관이 돼버렸습니다."
"..."
장일 총관의 의지를 느낀 천문석은 품 안에 손을 넣어 잘 접은 천을 꺼냈다.
"이거 받으세요."
"이게 무슨?"
의아해하는 장일 총관에게 천을 펼쳐 보여주는 천문석.
"은자 100만 냥!"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금액에 장일 총관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이 엄청난 액수는···. 단혈철검 주호의 수결에 사자련의 지급보증까지···!”
천문석은 짧게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주호는 개털입니다. 이건 지급보증인, 사자련에서 받아야 합니다."
"사자련에서 돈을 받아내다니 불가능합니다!"
"혹시 지필묵 있으신가요?"
"네? 뒤에 보따리에 있긴 한데···."
천문석은 보따리에서 종이와 붓을 꺼내 짧은 문장을 적고 봉투에 넣어 봉인하고 보낼 장소를 적었다.
"..."
이때 뒤에서 마차를 모는 이세기와 눈이 마주치는 천문석.
천문석은 문득 든 생각에 편지를 한 장 더 만들어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봉인된 봉투를 장일 총관에게 건네며 설명했다.
"이 편지를 봉투에 적은 장소에 보내면 빠르면 한 달, 늦어도 석 달 안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에게 주호가 쓴 지급문서를 넘기면, 은자 100만 냥을 받아올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사자련에서 돈을 받아준다고요? 무림 맹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장일 총관이 기겁했으나,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천문석은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일 처리가 아주 깔끔한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후환을 걱정할 필요 없으니. 한번 맡겨 보세요. 그 사람에게 받아오는 금액의 1할만 떼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천문석은 뒤에서 따라오는 수레를 가리켰다.
"저 뒤쪽 수레의 마제사 주지 스님께도 1만 냥을 드리세요. 그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남은 돈은 적당히 장가장에서 운영비로 쓰시고 그래도 남으면 산과 밭, 객잔 같은 부동산을 사주세요. 제가 원래 대지주, 장원주가 꿈이었거든요."
"..."
장일 총관은 어이없어했지만.
결국, 천문석의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사자련에서 돈을 받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천문석은 대답 없이 웃었다.
사자련에서 돈을 받아내는 건, 장일 총관의 말대로 무림 맹주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그게 가능했다.
특히 상대가 아주 좋았다.
사파 연합, 사자련!
사자련주부터 서열대로 차례차례 돈을 토해낼 때까지 쥐어 터질 거다.
무인은 죽을지언정 꺾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부하들 앞에서 땅바닥을 한 시간만 데굴데굴 구르면 그 생각이 분명 변할 것이다.
장일 총관은 몇 달 후 산처럼 쌓인 은자에 뒤로 넘어갈 듯 놀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