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아니, 갑자기 왜?"
이세기가 갑자기 도망치는 주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벼락같이 소리치는 천문석.
"이세기! 주호를 잡아라!"
이세기는 생각 전에 몸부터 움직였다.
휘이이잉-
바람을 몸에 두르고 주호를 쫓는 이세기.
천문석은 주호를 쫓아 계단을 뛰어내리며 바라카스에게 외쳤다.
"발도 스님! 바로 따라오세요! 주호 이 새끼. 수련장 안으로 혼자 튈 생각입니다!"
타다닥-
다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천문석과 당황한 얼굴로 그 뒤를 쫓는 바라카스.
추격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1각 동안은 초절정 고수인 이세기가 통로를 달리는 주호를 잡은 것이다.
"놔라! 약속대로 대환단 줬잖아! 빨리 가라!"
주호는 천문석이 다가오자 다급히 외쳤다.
천문석은 주호의 내심을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비밀 수련장에 엉겨 붙을 생각 없다. 우리는 바로 떠날 테니까. 대답만 해라."
"뭐?"
정곡을 찔린 주호가 반문하는 순간.
천문석은 주호의 두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질문 했다.
"여기 다른 출구 있냐?"
"아까 석비가 유일한 입구이자 출구다."
대답을 듣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외쳤다.
"이세기. 발도 스님! 바로 따라오세요! 여기에 있으면 안 됩니다!"
다급히 입구 계단을 향해 달리는 천문석.
이세기와 바라카스는 바로 천문석을 따라 달렸고 화강암 통로에는 주호만 홀로 남겨졌다.
“어···?”
질문하나만 던지고 도망치듯 달려가 버린 천문석.
주호가 돌변한 상황에 어이없어할 때.
멀리서 천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호! 너 거기 있으면 익사한다!"
"뭐?"
순간 느껴지는 진동!
쿠르르릉-
주호가 자신도 모르게 천장을 보는 순간.
돌가루가 우수수 쏟아졌다.
"쿨럭- 이건 무슨···."
톡-
기침하는 주호의 얼굴에 떨어지는 물방울.
"이거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란 주호가 주위를 살필 때.
후두두둑-
천장에서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
“설마?”
주호가 감을 잡은 순간.
쿠르르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통로가 진동하고.
쏴아아아-
바닥 곳곳에서 물이 솟구쳤다.
경악한 주호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주철! 이 미친놈!!"
주철은 가문 대대로 내려온 비밀 수련장을 수몰시키려 하고 있었다!
---
쏴아아아-
"주철! 이 미친놈!"
통로에서 거센 물 흐르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오는 순간.
이세기는 천문석을 봤다.
"돌멩이. 이거 혹시?"
"맞아. 밖에 놈들 짓이다."
천문석은 물소리가 들려오는 통로 방향을 봤다.
주호의 말대로 이 통로로 뚫고 들어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주철 총관의 목적은 주호를 잡는 게 아니었다.
처음 비밀통로로 들어갈 때는 방관 했으나,
나올 때는 화살에 대포까지 사용해서 공세를 펼친 주철.
주철의 의도는 명확했다.
비밀 수련장 안으로 주호를 밀어 넣는 것.
주호가 그렇게 안전을 자신하던 비밀 수련장 자체가 덫이었다!
비밀 수련장을 뚫고 들어올 필요는 없었다.
아주 작은 틈만 만들면 된다.
비밀 수련장은 거대한 청해 호수 아래에 있었고,
이곳에 틈이 생긴다면 호수의 엄청난 물이 모든걸 끝장내줄 테니까.
타다다닥-
이때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
곧 물에 빠져 엉망이 된 주호가 나타났다.
"왔냐?"
"..."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인사했고.
주호는 묵묵부답 일행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일행은 곧 비밀통로 입구에 도착했다.
어느새 포격이 그쳤는지 아무런 소리도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 입구.
천문석은 이세기를 보며 말했다.
"위치가 있으니 여기까지는 물이 안 올라올 거야."
"공기가 문제군."
"맞아. 공기가 문제지. 주호. 여기 환기 통로 어디냐? 거기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저 아래에 있다. 당연히 사람은 통과 못 하고."
물이 차오르는 계단을 가리키는 주호.
천문석은 어쩐지 멍한 표정의 발도 스님을 봤다.
"발도 스님. 혹시 여기서 빠져나갈 좋은 방법 있으신가요?"
바라카스는 문득 고개를 들더니 가로저었다.
천문석은 몸을 돌려 입구를 가린 석문을 바라봤다.
대포 소리는 이미 멈췄다.
그러나 이 석문 뒤에는 장전을 마친 대포와 화살을 잰 궁수가 있다.
얼핏 본 대포는 십여 문, 궁수의 수도 100명은 족히 됐다.
게다가 포수와 궁수 모두 통일된 ‘옷’을 입었다.
'군복.'
주철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병사를 동원했다.
좁은 입구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능숙한 병사들의 엄청난 화력이 쏟아진다.
일행 중 그 공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이세기뿐이었다.
그러나 이세기조차 무사히 빠져나갈 수는 없다.
이 입구는 나가는 순간 죽는 사지다.
그러나 이 입구를 제외한 사방은 화강암 암반으로 막혔고 뒤에서는 물이 차오르고 있다.
화강암 암반에 검강으로 길을 뚫는다면?
길을 뚫기도 전에 공기가 떨어져 질식할 것이다.
"..."
천문석은 무림 던전에 들어온 후 수많은 위기를 임기응변과 잔머리로 헤쳐나왔다.
그러나 이 순간 천문석은 직감했다.
지금 필요한 건 임기응변이나 잔머리가 아닌 진정한 실력이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이럴 때가 반드시 온다.
임기응변이 아닌,
진정한 실력으로 온 힘을 다해서 부딪혀야 할 때가.
천문석은 결심했다.
진인사대천명.
모든 힘을 끌어내 이곳을 뚫고 나간다!
천문석은 단호한 결심이 담긴 눈으로 일행 한 명 한 명을 훑었다.
발도 스님.
단혈철검 주호.
훗날 천검으로 불리게 될 이세기.
그리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한테 여기서 탈출할 계획이 있다!”
일행의 시선이 모이는 순간,
천문석은 확신 어린 어조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된다!”
설명이 끝나자 돌아오는 반응들.
"...시주. 그게 되겠습니까?"
"하- 그 병신같은 계획은 뭐냐?"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야, 나보다 좋은 계획 있으면 말해봐라.”
“...”
일행은 반신반의했으나.
결국, 천문석의 계획에 동의했다.
“그럼 모두 계획대로 움직이자. 이세기!”
---
설원에서 천문석과 주호를 놓친 후,
사색이 되어 무사들과 함께 추적에 나섰던 주철 총관.
그러나 주철 총관이 설산 깊숙이 들어가려는 순간 매 울음소리를 들려왔다.
휘유우우-
매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주철은 직감했다.
흑기당의 추적용 매다!
홍청방의 정보에 따르면 흑기당 뒤에는 마도 18문의 일문 극음도가 있었다.
흑기당과 극음도 둘이 꼬리로 붙었다.
주철은 이렇게 무작정 쫓아서는 천문석과 주호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설령 잡는다 해도 극음도가 중간에 끼어들면 끝장이다.
적이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해서 한발 먼저 움직여야 한다.
천문석은 심계가 대단했다.
그놈이 어째선지 주호를 구하고,
엄청난 무위를 보여준 정체불명의 고수까지 가세했다.
'천문석은 어디로 갔을까?'
생각 순간 떠오르는 이름.
장가장.
천문석이 주호를 데리고 무림맹에서 뒤를 봐주는 장가장으로 들어갔다면 끝장이다.
그러나 주호는 사자련의 지부장이다.
사자련의 단혈철검 주호가 아무리 위기라도 무림맹의 그늘로 도망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순간 문득 떠오르는 이름.
'가문의 비밀 수련장!'
주철은 확신했다.
단혈철검 주호는 비밀 수련장으로 갈 것이다!
호수 아래 있어 안전하고 입구를 여는 방법도 대대로 가주에게만 전해진다.
게다가 그 안에는 몇 년은 버틸 식량과 치료약, 영약까지 쌓여 있었다.
그리고 소림사 대환단!
철검장 어디에도 대환단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환단이 있을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가문의 비밀 수련장!
주호가 대환단을 포기할 리 없으니,
당연히 비밀 수련장으로 달려갔을 거다.
주철이 결론을 내고 무사들을 움직이려는 순간.
호위 무사의 은밀한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대공자님. 철검장의 무사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삼삼오오 나타나기 시작하는 철검장의 무사들.
이 무사들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따돌린 단혈철검 주호, 가주를 따르는 무사들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주철은 현기증마저 느꼈다.
주호가 비밀 수련장으로 도망치고,
하늘에는 극음도와 한패인 흑기당의 매가 날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포섭하지 못한 철검장의 무사들까지 나타나고 있다!
위기의 순간.
주철은 번뜩이는 영감이 떠올랐다.
주철은 재빨리 지시했다.
"금권 대협이 비겁하게 가주님을 기습 공격하고 납치했다! 설산 안쪽. 산맥 방향으로 달려라!"
"알겠습니다!"
-주호를 따르는 무사들을 흑기당의 미끼 삼아 설산 안쪽으로 보내고.
"모아놓은 흑도 방파 무사들을 관도에 깔아라."
"그놈들은 머릿수만 채운 거라 별 쓸모가···."
-허접스러운 흑도 방파 무사들을 사방에 깔아 적의 눈을 가린다.
"대포와 궁수의 준비는 끝났나?"
"청해 호수에 띄운 군선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리 준비한 수군을 움직여 비밀 수련장을 주호의 무덤으로 만든다!
모든 건 주철의 계획대로 진행됐다.
주호에게 충성하는 무사들이 흑기당과 극음도를 유인할 때.
주철과 핵심 무사들이 말을 달려 수군의 배를 타고 비밀 수련장 입구 언덕 위에 진형을 쳤다.
생각대로 주호와 천문석이 나타났을 때 얼마나 가슴 졸였던가!
일행에 스님이 있다는 것은 예상외였지만,
계획대로 주호와 천문석은 비밀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밀 수련장을 폭파하려 할 때.
갑자기 튀어나온 천문석!
계획대로 문이 열리는 순간 화살을 쏟아부었는데.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오고 엄청난 섬광과 우렛소리가 터졌다.
주철은 직감했다.
가짜 극음도, 천문석의 기술이다!
몇 번이나 이야기하고 대비했는데도,
천문석의 섬광에 병사들은 일순 공격을 멈췄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당하다니!"
주철은 분통을 터트리며 주위를 살폈다.
섬광을 맞고 빌빌거리는 궁수와 포수들!
엄청난 뇌물을 먹여 동원한 궁수와 포수들 모두 몇 번이나 주의시킨 섬광을 보고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대포를 쏘라고 지시했으나 이미 늦었다.
포수들이 다급히 재장전하려는 사이.
어느새 입구는 닫혔고,
주호와 천문석은 안으로 도망쳤다!
주철은 분통을 터트리며 천문석과 주호가 숨어든 비밀 수련장 입구를 봤다.
화강암 암반 위에 세워진 부러진 석비!
저 안에 주호가 있었다.
"하- 쉽게 끝낼 수 있었는데···."
주철은 탄식했으나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 주호가 여기서 끝장나는 건 마찬가지다.
이때 호수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콰아아-
콰아아아-
절벽 너머 호수에서는 엄청난 물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하하하-
순간 주철은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주호는 비밀 수련장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도망쳤겠지만, 그곳이야말로 사지였다.
가문의 비밀 수련장에 있는 영약과 비급 그리고 대환단이 아까웠지만.
자신이 장주가 되는 게 우선이었다.
주철은 엄청난 뇌물을 먹여 준비한 수군 병사들을 바라봤다.
100여 명의 궁수와 10여 문의 대포!
적은 독 안에 든 쥐다.
그리고 이 독 안에는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참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순간.
모든 화력을 동원해서 끝장내주마!
이 순간.
쿠르르르-
중간이 뚝 부러져 나간 석비가 진동했다.
이 순간 병사들 사이사이 간부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모두 준비해라!"
"준비해라!"
"앞을 보지 마라!"
"보지 마라!"
"명령이 들려오는 순간 정해진 위치에 화살 공격을 퍼붓는다!"
“알겠습니다!”
“포수는 대기하며 명령을 기다린다!”
“알겠습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
끄드드득-
화살을 재고 한계까지 활을 당기고.
화르르륵-
대포 옆에 횃불을 들고 선다.
궁수와 포수 모두 시선이 향한 방향은 뒤!
섬광에 시력을 잃지 않기 위해 모두가 뒤를 볼 때.
몇몇 철검장의 정예 무사들은 눈을 부릅뜨고 석비를 봤다.
이들이 외치는 순간.
활과 대포!
화살 비가 쏟아지고,
뒤이어 대포가 일제 포격을 가할 것이다.
엄청난 화력이 입구에 집중된다!
쿠르륵-
이 순간 요동치던 석비가 진동을 멈추고.
그르륵-
천천히 회전해 입구가 열렸다.
순간 터져 나오는 외침!
"화살을 쏴라!"
후드드득-
수많은 화살이 비처럼 쏟아질 때.
주철 총관은 이번에야말로 잡았다고 확신했다.
피할 수 없는 엄청난 수의 화살!
그러나 멈춰서 화살을 막으려고 하면 대포가 쏟아진다.
막아야만 하는 화살.
피해야만 하는 대포.
설령 단혈철검 주호가 멀쩡했어도 이 순차 공격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마침내 주호를 잡겠구나!'
주철 총관이 확신하는 순간.
콰아아앙-
"내가 마도 지존, 천마다!"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엄청난 외침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