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다리를 절뚝이며 간신히 걸었던 주호.
그러나 문이 열리자 주호는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
경악한 이세기가 입구로 달려가려는 순간.
천문석은 재빨리 옷을 잡아 제지했다.
“그쪽이 아냐!”
천문석은 당황한 이세기에게 말을 쏟아냈다.
"동쪽이다! 기감을 퍼트리면서 동쪽을 훑어라! 주호 찾으면 신호하고!"
"뭐, 그게 무슨?"
"빨리 움직여! 혹시 내 목소리 들리면 바로 달려와라! 우선순위는 주호를 잡는 거다!"
반문하는 이세기에게 외친 천문석은 롱소드를 뽑아 들고 서쪽으로 달렸다.
구르르릉-
이때 들려오는 입구 닫히는 소리.
천문석은 주호가 들어가 바위 무더기를 살폈다.
어느새 발도 스님도 사라졌다.
계획대로 주호가 문을 닫기 전에 발도 스님이 뒤에 따라붙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
천문석은 달리며 롱소드를 뽑아 휘둘렀다.
퐁, 퐁, 퐁-
하늘 고래의 소리와 진동이 퍼져나가고,
레이더를 보듯 진동이 닿는 곳의 상황이 파악된다.
'어디냐? 주호!'
주호가 갑자기 도주한 상황.
그러나 천문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천문석은 처음부터 주호가 비밀 수련장으로 발도 스님을 데려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호 같이 심계가 깊은 사파 고수가 대환단이 있는 비밀 수련장 입구를 이렇게 쉽게 노출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이곳은 꼬리를 떼기 위해서 거쳐 가는 곳.
진짜 입구는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사냥개가 붙었다.
다급한 토끼는 어디로 도망칠까?
자신이 판 굴을 타고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추적이 계속된다면,
결국,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
보물방, 비밀 수련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때 롱소드에서 생경한 감각이 느껴졌다.
30미터 앞의 나무,
나무 둥치가 문이 열리듯 들썩이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천문석은 바로 대지를 훑듯이 손을 움직여 돌을 낚아챘다. 그리고 나무를 향해 돌을 날렸다.
휘이잉, 쾅-
돌이 거대한 침엽수에 박히는 순간.
구르르르-
거대한 침엽수가 요동치며 잎과 가지에 쌓인 눈이 쏟아졌다.
후드드득-
이때 들썩이는 둥치에서 튀어나온 인형.
인형은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다급히 달려갔다.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호!"
천문석은 주호를 쫓으며 내력에 목소리를 실어 외쳤다.
"여기다! 숲 서쪽! 호수 방향으로 달린다!"
순간 힐끗 천문석을 확인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는 주호!
주호는 부목을 댄 발로 미친듯이 달렸고.
천문석과 주호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금권 개새끼야! 쫓아오니까 어떠냐!?"
주호의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천문석은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았다.
절뚝이지 않는 두 다리,
생각보다 배는 빠른 속도!
주호, 이 녀석.
밤새 내공을 회복하고 상처를 치료했구나!
천문석은 다급히 외쳤다.
"야. 주호! 약속 지켜야지! 신의를 지켜라!"
"약속? 네 녀석이 약속을 입에 담아?! 그래! 약속은 당연히 지켜야지!"
주호는 눈을 번뜩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약속대로 대환단을 주겠다! 100년 후! 내 무덤에서 찾아가라! 하하하-"
이때 돌연 숲이 끝나고 절벽이 나타났다.
낮은 언덕들로 둘러싸인 화강암 절벽.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절벽 위에는 멀리서는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석비가 있었다.
천문석은 직감했다.
석비, 저기가 입구구나!
이때 주호의 검이 날아가 석비의 한 부위를 때렸다.
쾅-
내공이 실린 검에 맞자,
부르르 진동하는 석비!
“열려라!”
주호가 내공을 실어 외치는 순간.
쿠르르르-
바위 갈리는 소리를 내며 석비가 빙글 회전하고, 땅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비밀 수련장 입구!
주호는 엄청난 속도로 입구를 향해 달렸다.
"안돼!"
천문석이 절박하게 외치는 순간.
주호는 가슴이 뻥 뚫리는듯한 통쾌한 웃음을 토해냈다.
하하하하하-
인생 최악의 비무!
한겨울 설원을 6시진 넘게 쫓으며!
수도 없이 낚이고, 입에 담기도 힘든 온갖 치사한 공격을 당했다!
게다가 저 금권 저놈 때문에 반란까지 일어났다!
‘마침내, 마침내! 저 새끼에게 복수하는구나!’
주호는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담아 토해냈다.
"다시는 보지 말자! 금권 개새끼야! 하하하-"
그리고 비밀 수련장 입구에 도착하는 순간.
돌연 멈춰 서서 몸을 돌리는 주호!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어제부터 이어진 그 개고생!
자신에게 당한 천문석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가야만 했다.
"야! 금권 새끼야! 난 이제 간다! 하하···."
그러나 천문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뚝 그치는 웃음소리.
“...!”
주호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달리지 않고 천천히 걸어오는 천문석!
그리고 천문석의 한심해 하는 얼굴.
“어, 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는 순간.
쭈뼛 솟구치는 전신의 털!
주호는 반사적으로 입구로 몸을 던졌다.
휘이이잉-
이 순간 주호의 몸을 감싸는 일진광풍!
으아악!
주호는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단혈장을 펼쳤다.
그러나 밤새 내력을 회복했으나 심마로 인해 평소의 3할도 안 되는 내공!
탁, 탁-
단혈장의 공격은 아무 위력이 없었다.
그리고 바람 속에서 들려오는 정중한 목소리.
"주 대협.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주호는 누가 자신을 잡았는지 바로 알아챘다.
이세기!
또 다른 비무 상대, 천문석의 친구 이세기였다.
어느새 달려온 이세기가 바람을 몸에 휘감고 자신의 몸을 낚아채 하늘을 날고 있었다.
주호는 다시 한번 이세기를 공격하려 했으나.
“...!”
거대한 바위에 눌린 듯 미동도 하지 않는 팔!
이세기는 어느새 주호의 마혈을 잡고 있었다.
결국, 주호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비밀 수련장 입구에 내려졌다.
탁-
"..."
주호가 돌처럼 굳어있을 때.
바라카스와 천문석이 천천히 입구로 걸어왔다.
"아미타불. 여기군요."
"발도 스님. 우선 들어가죠. 이세기 들어가자."
천문석이 앞장서서 비밀 통로 입구로 들어가고.
그 뒤를 주호를 잡은 이세기와 바라카스가 뒤따랐다.
"등이 있네?"
천문석은 등에 불을 붙인 후.
문득 고개를 돌려 이세기에게 잡힌 주호를 바라봤다.
“...”
무공과 나이,
무림에서의 신분.
모든 면에서 단혈철검 주호가 현생 알바 천문석을 압도한다.
다른 곳에서 무림인으로 주호를 만났다면 천문석은 극존칭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연이은 추격과 격전 갑자기 일어난 반란까지 겪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천문석과 주호는 인지하지도 못한 채 서로 말을 텄다.
게다가 천문석이 주호를 도와주면서 어느새 입장이 역전됐다.
지금까지는 천문석이 ‘갑’, 주호가 ‘을’ 정도 됐다.
그러나 주호가 뒤통수를 치며 상황이 변했다.
한 배분은 높은 노강호가 약속을 어기고 후배의 뒤통수를 쳤다.
이제는 천문석이 ‘갑’, 주호가 ‘정’ 정도로 떨어졌다.
‘갑’ 천문석이 계속 말없이 쳐다보자,
‘정’ 주호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돼 시선을 돌렸다.
단혈철검 주호.
사자련의 지부장이자 철검장의 가주.
한 가문의 가주가 뒤통수를 치다가 실패했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들려오는 천문석의 한심해하는 목소리.
“하- 이 얍삽한 새끼.”
"..."
참을 수 없는 모욕!
6시진이 넘게 도망친 놈한테 이런 모욕까지 당하다니!
그러나 주호는 자괴감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사파 무림에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자신이 또다시 당하다니!
'시바. 시바. 개시바! 네놈 새끼는 무인이 아니라 사기꾼이냐!?'
"야, 단혈철검 주호! 신의를 저버렸으니까. 지금 당장 죽여도 할 말 없지?"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바라카스와 이세기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시주 얍삽하다고 죽이는 건 좀."
"그래. 주 대협. 연세도 있으셔서 정신이 흐려지신 것 같은데.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생각해주는 듯 멕이는 두 사람.
'시바···. 새끼들···.'
주호가 분루를 삼킬 때,
천문석의 얄미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내가 발도 스님이랑 잘생긴 내 친구 봐서 참는다. 대환단 한 개 더 내놓고. 딱밤 세 대만 맞자."
"...대환단 없는···."
주호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순간,
천문석은 번뜩이는 눈빛으로 롱소드를 천천히 뽑았다.
스르렁-
“대환단 대신에 손가락을 잘라 줄까?”
섬뜩한 살기가 스며들 때,
주호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뭐야? 대환단이 진짜 더 있던 거야?'
그냥 찔러 봤던 천문석은 진심으로 놀랐다.
주호 이 새끼. 뭐지?
이 새끼 타고난 도둑놈이네!
도대체 대환단을 몇 개나 훔친 거야?
이 정도면 무인이 아니라 그냥 도둑놈 하는 게 나은 거 아냐!?
천문석은 연신 감탄하며 입구 석비를 닫게 하고 등을 든 주호를 앞세워 계단을 내려갔다.
네 명의 일행은 곧 계단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잠시 후 깊은 어둠 속에서 깜빡했다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앗? 주호! 딱밤 맞아야지? 딱 대라!"
“뭐?!”
따악, 따아악-
으악, 으아악-
---
수백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수평으로 길게 뻗은 통로가 나타났다.
천문석은 등불에 비친 통로를 살폈다.
단단한 화강암 통로.
뚝-
통로 천장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 떨어졌다.
밖에서 본 지형과 이동한 거리를 비교하면,
이 통로는 청해 호수 아래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탓인지 벽과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천문석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호수 아래에 이 통로를 만드는데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었을 거다.
‘철검장 이놈들 혹시 도굴꾼 가문 그런 거 아냐?’
화강암을 뚫고 만든 호수 아래 비밀 수련장이라니.
아무리 비밀 수련장이라도 보통 이렇게까지 만들지는 않는다.
주호의 말대로 이곳은 뚫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면 뭐하겠는가?
조카가 삼촌을 재끼려고 해서 도망치는 데 쓰게 됐는데.
피식 웃은 천문석은 완전히 기가 죽은 주호에게 물었다.
"야, 아직 멀었냐?"
"다 왔다. 조금만 더 걸으면 된다."
주호의 말대로였다.
길게 뻗은 화강암 통로가 곧 끝나고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주호의 시선이 마제사 주지와 이세기에게 향했다.
문을 여는 방법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뜻.
두 사람은 바로 몸을 돌려 주호를 등졌다.
주호의 시선이 이번에는 천문석에게 향했다.
"잠시 자리 좀."
천문석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뒤통수치려던 놈이 말이 많다? 너 딱밤 한 대 남은 거 알지? 지금 바로 때려줄까?"
딱-
천문석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부르르 떨리는 주호의 몸.
결국, 주호는 한숨을 내쉬며 철문을 열었다.
쿠르르릉-
마침내 일행은 철검장의 비밀 수련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천문석의 손에는 약속대로 대환단 3개가 놓였다.
---
대환단 3개!
천문석은 손에 들린 상자 세 개를 희희낙락 바라보며 외쳤다.
"...싸움 한번 없이 거저먹다니! 운이 좋군!"
주호는 천문석을 보며 탄식했다.
"시바···. 멍청한 주철 새끼! 무사들을 어떻게 깔아놨기에, 전투 한번 없이 뚫려!"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주호를 봤다.
주호의 말대로였다.
일행은 귀공자 그 자체인 이세기와 인지도 있는 마제사 주지, 발도 스님의 도움을 받아서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실 천문석이 한 일은 밤새 마차를 몬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대가로 천금으로도 살 수 없다는 소림사 대환단을 받았다.
그것도 3개나!
완전히 날로 먹은 것이다.
천문석은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운이 좋다니!'
이때 들려오는 주호의 힘 빠진 목소리.
"이제 됐지. 어서 가라. 너랑 엮이고부터 되는 일이 없다."
주호는 팔다리가 아작나고도 기운이 넘쳤었다.
그러나 대환단 3개를 넘겨주고는 맥빠진 모습으로 힘없이 말하고 있었다.
"알았어. 대환단 고맙다."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악연 중의 악연이라고 생각한 주호.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악연이 아니라 선연이었다.
-돈으로는 구할 수 없는 대환단 3개.
-사자련이 지급 보증한 은자 100만냥의 지급문서.
주호는 가진 것과 가지지 않은 것 모두를 아낌없이 천문석에게 줬다.
"아주 좋은 거래였다. 주호. 또 보자. 도움 필요하면 연락하고."
천문석이 친근하게 말하는 순간,
주호는 치를 떨며 버럭 소리 질렀다.
"다시는 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