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60화 (161/1,336)

#160

원 대륙에 나타난 현인신, 상(上).

상은 인간과 요마령괴의 경계를 그어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고.

영혼육백을 태우는 빛으로 삼천세계를 잇는 세계의 나무를 키워냈다.

세계의 나무 위를 유랑하는 허공도에 기거하시던 상은.

어느 날 문득 허공도(虛空島)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현인신을 모시던 대부분의 샤들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전에도 가끔 사라지시던 분.

이번에도 어딘가에서 재밌게 놀다가 돌아오시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몇몇 샤들은 상과 허공도를 찾아 세계의 나무를 헤매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샤가 된 지 얼마 안 된 신입들이었다.

그러나 바라카스는 신입조차 아니었다.

바라카스 발도는 샤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

너무나 유명한 발도 가문 선조의 뒤를 이어 샤가 된 이였다.

상께 이름 불리지 못한 샤.

그렇기에 바라카스 발도에게는 상을 찾는 게 너무나 중요했다.

"..."

이름을 말한 바라카스 발도는 재빨리 천기를 살폈다.

이름을 말한다는 것은 세계에 자신을 알리는 행위.

존재가 알려지고 인과가 얽히면,

영혼육백, 존재의 본질이 세계의 흐름 영맥과 지맥에 이어진다.

'하- 1년은 공덕을 더 쌓아야 무리 없이 넘어가겠구나.'

천기를 살핀 바라카스가 내심 한탄할 때.

천문석은 의아한 얼굴로 바라카스를 보고 있었다.

바라카스 발도.

바라카스가 속명이고 발도가 법명인가?

발도 스님.

천축 출신이신가?’

그러나 속명과 법명이 특이한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천문석은 눈앞의 발도 스님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뛰어난 무공 실력.

-마제사의 주지라는 신분.

-돈은 좀 밝히지만 깔끔한 일 처리.

그중에서도 마제사의 주지 스님이라는 신분이 가장 중요했다.

험상궂은 얼굴만 봐서는 딱 산적이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산적 같은 얼굴의 마제사 주지 스님.

너무나 분명한 특징으로 인근 지역에서는 이 주지 스님을 몰라보는 사람이 없었다!

눈앞의 스님은 초절정의 무인 셋이 있지만,

셋 모두 하자가 있는 지금 일행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그래서 천문석은 즉시 경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바라카스 발도! 속명과 법명 모두 아주 멋지고 좋으시네요! 발도 스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천문석의 질문을 듣는 순간,

바라카스는 검이 날아올 때보다 더 놀랐다.

불길함!

어이없을 정도로 불길함이 느껴졌다!

"시주! 나는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

바라카스가 재빨리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마사 입구는 어느새 한 청년에 의해 막혀있었다.

청년의 잘생긴 얼굴을 보는 순간 바라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이세기!?"

"스님. 저를 아시나요?"

이세기가 의아해하자,

불쑥 튀어나오는 바라카스의 본심.

"허- 시주 말이 정말이었군! 진짜 보는 순간 더럽게 잘 생···."

“발도 스님!”

천문석은 재빨리 외쳐 감탄하는 바라카스의 말을 막았다.

"역시 이세기! 산속 스님도 알고 계시네! 발도 스님. 이쪽으로!"

천문석은 발도 스님을 끌어 마사 안쪽으로 들어가며 목소리를 낮춰 항의했다.

"발도 스님. 아니 일 처리를 이렇게 하면 어떡하십니까?"

"...그게 무슨?"

순간 이세기를 가리키는 천문석.

"안보이세요? 쟤가 나타났잖아요."

"그럴 리가 없는데···. 시주. 저 이세기 시주를 어디서 만난 거요?"

"제가 있는 곳에 쟤가 나타났습니다! 한 달은 뺑뺑이를 돌린다면서요!"

바라카스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시주가 설산으로 튀었으니 그렇지. 아니. 그보다 비무하기로 하고 왜 설산으로 도망친  거요? 구경꾼들이 모두 다 욕하고 집에 가서 우리도 피해가 막심해! 준비한 떡과 술을 반도 못 팔았다니까!"

갑자기 강하게 나오는 바라카스의 외침에,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그게 사실 도망이라기보다는 전략적 후퇴···. 하여튼 일이 이렇게 됐으니. 발도 스님이 한 번 더 도와주세요."

순간 바라카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불호.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천문석은 이미 눈 앞의 마제사 주지 스님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

불호를 세 번 외는 건 강한 거절의 의사 표현!

“비무장에 있던 물건들 낼름 한 거 모른 척 해드리겠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시주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소?”

얼굴에 철판을 까는 발도 스님.

천문석은 재빨리 다른 조건을 걸었다.

"은자···."

"아미타불···."

액수를 말하기도 전에 시작된 불호.

천문석은 품 안에서 잘 접힌 천을 꺼내 펼쳐 발도 스님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아미타···. 뭐 은자 100냥?!"

바라카스가 경악하는 순간.

흔들리던 천이 멈췄다.

그리고 들려오는 천문석의 음흉한 목소리.

"흐흐흐- 발도 스님. 자세히 보세요."

바라카스는 눈을 깜빡이며 천에 적힌 문구를 살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은자 100냥이 아닌, 은자 100만···.

“뭐 100만냥이라고!?”

하하하-

천문석이 자신만만하게 웃는 순간,

바라카스는 부릅뜬 눈으로 천을 몇 번이고 살폈다.

"이런 미친! 이거 피잖아? 혹시 시주가 주호를 쓱싹하고 그냥 막 적은 게···."

바라카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쏟아지는 순간.

천문석은 지급문서 위에 피로 찍은 수결을 가리켰다.

"이거 주호가 직접 적고 수결까지 찍은 겁니다. 그렇지 않나? 주호!"

손으로 마사 입구를 가리키는 천문석.

바라카스의 시선이 마사 입구로 움직이고.

이세기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일그러진 얼굴로 천문석을 노려보는,

팔다리에 부목을 대고 전신에 피 칠갑을 한 남자.

미처 알아보지 못한 이 남자의 정체는.

단혈철검 주호,

거지꼴을 한 주호였다!

으드득-

"야, 대답 안 하냐? 계속 비협조적이면. 그냥 버리고 간다!"

천문석이 협박하는 순간,

주호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내가 직접 적은 게 맞다."

"아무런 강박 없는 자유의지로 적은 거 맞지?"

"맞다!"

천문석은 씨익 웃으며 은자 100만 냥짜리 지급문서를 흔들었다.

"...!"

지급문서를 따라 움직이는 발도 스님의 눈!

천문석은 툭 내뱉듯이 말했다.

"1만냥!"

이 순간 바라카스 발도는 홀린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일 도와주시는 겁니다."

"정직과 신뢰의 마제사! 최선을 다해서 돕겠네!"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순간.

바라카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이건!"

경악한 바라카스가 다급히 마사에서 나가 하늘을 볼 때.

"바라카스 발도, 바라카스 발도, 바라카스 발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이름을 되뇌는 천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카스는 천문석이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천기가 변하는 것을 깨달았다!

원인과 결과!

인과의 실이 자신과 천문석을 잇고 있었다!

바라카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멀리 치워버린 재앙과 스스로 엮이다니!

높이 자라기 위한 단단한 마디,

큰 인물이 되기 위한 커다란 시련!

불과 몇 시간 전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말할 때는 덤덤했다.

그러나 거기에 자신이 엮여 들어가니,

순간 하늘이 노래지듯 현기증이 일었다!

'1만 냥에 눈이 어두워져 내가 무슨 짓을!'

경악한 바라카스 발도는 재빨리 기원했다.

천지신명과 부처님.

하늘과 땅의 만신이시여.

그리고 특히 어디서 재밌게 놀고 계시는지 모르겠는 상(上)이시여!

제발 이 인과의 실, 재앙의 사슬을 끊어주십시오!

바라카스 발도가 기원하는 순간,

끝없이 펼쳐져 천기를 그려내는 별들이 일제히 어두워졌다.

"...!"

바라카스 발도가 충격에 휘청거릴 때 어깨를 잡는 손길.

"앗! 발도 스님! 조심하셔야죠."

천문석이었다.

"..."

"발도 스님. 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옷 위에 승복 걸치고 오세요. 염주랑 목탁도 챙기시고요."

"..."

바라카스 발도가 말없이 서 있자,

천문석이 깜박했다는 듯이 발도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아! 저랑 같이 가시죠. 해주실 일이 많으니 같이 가면서 제가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우선은 하인 옷이랑 권문세가 귀공자 옷이 필요한데. 향화객 중에 옷을 빌릴만한···."

하-

바라카스는 깊은 탄식을 흘리며 천문석과 움직였다.

잠시 후 마제사에서 마차가 출발 준비를 마쳤다.

천문석은 하인 복장을 하고 마부석에 앉고.

이세기는 권문세가 귀공자 차림으로,

발도 스님은 승복을 걸치고 목탁과 염주를 든 채 마차 안에 탔다.

그리고 주호는.

"나보고 여기 들어가라고? 거적까지 두르고?"

마차 안, 좌석 아래 공간을 가리키며 어이없어했다.

천문석은 삐딱하게 선 채 대답했다.

"싫으면 우리 그냥 간다? 여기서 그냥 계약 끝낼까?"

"...시바, 시바···."

결국, 주호는 거적을 둘둘 감고 좌석 아래 공간으로 들어갔다.

천문석은 숯과 장작, 주머니를 빈 공간에 채워 넣으며 말했다.

"넌 숨도 크게 쉬지 마라."

"..."

"그리고 이세기, 발도 스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시죠?"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천문석은 마차 문을 닫고 마부석에 앉아서 외쳤다.

"출발합니다!"

히이잉-

구르르릉-

말 울음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마차.

마차는 금세 마제사 정문을 통과해 산 아래로 이어지는 관도로 들어섰다.

눈이 깨끗이 치워진 관도를 달리며,

천문석은 문득 웃었다.

"운이 좋군!"

포위망을 강행 돌파할 생각이었는데,

마제사의 주지, 발도 스님의 도움을 받게 됐다!

인근 지역의 누구나 알아보는 마제사 주지 스님의 도움을 받게 된 순간.

천문석은 계획을 바로 수정했다.

강행돌파는 취소다!

하인, 귀공자, 스님.

이 세 명의 조합으로 포위망을 은근슬쩍 빠져나가,

청해 호수의 비밀 수련장까지 달린다!

천문석은 고삐를 움직이며 외쳤다.

"어서 달리자. 이랴!"

카캬카-

---

카캬카-

벽 너머 마부석에서 들려오는 악당 같은 웃음소리.

"아, 돌멩이 녀석 또 저렇게 웃네. 적예 만나면 난리를 치겠는데···."

이세기는 내심 한숨을 내쉬고,

앞에 자리한 눈을 감은 스님에게 말했다.

"발도 스님? 괜찮으신가요?"

바로 돌아오는 대답.

"전혀 안 괜찮소."

"네?"

이세기가 당황한 순간,

발도는 불호를 외며 이세기가 앉은 좌석을 봤다.

“아미타불.”

저 좌석 안에는 거적에 둘러싸인 주호가 누워 있었다.

철검장주,

단혈철검 주호.

서녕시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던 주호.

분명 어제 낮까지는 멀쩡했던 주호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채,

한쪽 팔과 한쪽 발이 결딴난 거지꼴로 나타났다.

이 모든 건···.

발도의 눈이 마차 벽 너머 마부석 방향으로 향했다.

천문석!

주호가 천문석이라는 이름의 재앙과 얽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엉망이 된 주호의 이 모습에,

눈앞의 이세기라는 시주와 자신의 얼굴이 투영된다.

어두워진 천기.

터질 듯 불안한 마음.

"아미타불. 아미타불···."

바라카스 발도는 3년이 넘은 시간 동안 가짜 중노릇을 하며 입에 붙은 불호를 되뇌며 결심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바로 이 세계를 떠난다!

저 움직이는 재앙과 더 얽히면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다.

천문석.

이세기, 주호.

바라카스 발도.

출신도 생각도 다르지만 한 일행이 된 네 사람이 청해 호수를 향해 달려가는 마차에 모였다.

그리고 이들이 탄 마차 앞에는 철검장에서 깔아놓은 수많은 무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