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59화 (160/1,336)

#159

휘유우-

날카로운 매 울음소리가 울리는 순간 나무 위에서 매를 살피던 이세기가 말했다.

"서쪽 숲에는 사람이 없다. 별다른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바로 움직이자."

천문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팔다리에 부목을 댄 주호를 어깨에 들쳐업고 앞장섰다.

"저거 믿을 수 있는 거냐? 매잡이도 아닌데 흑기당의 매를 조종한다고?"

주호가 매를 조종하는 이세기를 가리키며 어이없어하자.

주위로 기감을 퍼트리며 설명하는 천문석.

"이세기 쟤는 원래 저래. 보는 순간 할수 있을지 없을지 감이 오고. 감이 오면 금방 해낸다."

허-

주호가 침음성을 흘리며 가까워지는 이세기를 살폈다.

'이거야말로 이야기 속 천무지체가 아닌가!'

"주 대협은 내가 업을게. 몸 상태는 내가 낫다."

천문석은 두 말없이 이세기에게 주호를 건넸다.

주호를 건네받아 어깨에 들쳐업는 이세기.

“야, 내가 짐이냐?”

주호가 어이없어할 때,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주호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까다롭기는. 그것보다 대환단 진짜 있는 거 맞지?"

"맞다."

"비밀 수련장까지 데려다주면 끝이다. 우리는 대환단 받고 떠나고. 그 뒤는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그때 가서 다시 질척이면 안 된다?"

“약속대로 모든 게 이뤄질 것이다.”

어느새 자신감을 찾은 주호는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천문석은 앞장서 길을 열었다.

사방으로 기감을 퍼트리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한다.

처음 천문석은 절벽에 자리한 동굴 은신처에 주호를 숨기고 이세기와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주호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대환단!'

주호를 비밀 수련장에 데려다주는 대가로 소림사의 대환단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천문석은 주호의 약속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지금 주호의 상태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는 떠오를 듯 말 듯 한 ‘깨달음’이 깜빡이고,

기경팔맥의 내력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심마’가 깃들어 있다.

깨달음과 심마!

주호는 지금 초절정의 벽을 넘을 때와 비슷한 상태였다.

깨달음과 심마는,

곧 기연과 마장이다.

주호는 처절한 격전을 겪으며 상상도 하지 못한 기연을 만났다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주호가 느끼는 기연과 마장의 정체는.

천문석이 주호의 몸에 심은 창천무흔의 무리와 심마였다.

다시 한번 백척간두,

벽 앞에서 섰다고 기뻐하고 있을 주호.

그러나 진실은 이 기연과 마장 모두 천문석이 심은 가짜였다.

얼핏 주호의 얼굴을 살피니,

상기된 얼굴로 내부를 관조하며 심법을 운공하고 있었다.

비밀 수련장에서 대환단을 먹고,

마장을 뚫고 다시 한번 도약하려는 주호의 생각이 빤히 보였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자신을 떨쳐내려 할 것이다.

그러나 대환단을 먹고 마장을 넘어서도 얻는 건 창천무흔의 무리.

천하에서 오직 한 명,

아니 한 명과 한 자루 검만이 쓸 수 있는 무리였다.

지금 주호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비무를 시작하고 수없이 낚인 것처럼.

주호는 다시 한번 천문석에게 낚인 것이다.

"..."

천문석은 이제는 주호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호도 눈탱이를 치기 위해 준비하는 중.

지금 천문석과 주호는 검이 아닌 계략과 모략, 잔머리로 비무를 벌이고 있었다.

이 또한 승패가 갈리는 승부.

반드시 승리해 '대환단'을 얻어내야 했다!

천문석과 이세기, 주호는 빠른 속도로 숲을 헤쳐 나갔다.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질 때쯤.

휘유우-

하늘에서 매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이세기가 소리죽여 말했다.

"잠시 숨자. 사람들이 다가온다."

일행이 바위 뒤로 몸을 숨기자,

다급히 달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타다탁-

바위 뒤에 숨은 천문석은 이세기를 봤다.

내공이 일류만도 못한 이세기.

이세기가 천문석이 주호의 조건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원래대로라면 이세기는 청해 호수의 섬에서 영물, 검은 뱀을 잡고 내단을 취했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일으킨 나비 효과로 섬에서 일찍 떠난 이세기는 영물의 내단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

다시 섬으로 돌아가 검은 뱀이 나올 때까지 찾으라고 말했지만,

영물과의 조우는 천시와 지리가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천재일회의 기회!

섬에 돌아간다고 해도,

이세기가 영물의 내단을 얻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천하 18성을 꺾고 천하 십절의 시대를 열기는커녕 비무행 도중에 죽을 가능성이 컸다.

던전 속 세계는 허상일 뿐이라지만.

다시 만난 자신의 친우, 이세기가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탁-

이때 마지막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다시 출발할 때,

천문석은 이세기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너 진짜로 같이 갈 거야? 이번 일 아주 위험해질 수도 있다."

"내 친구 돌멩이 일인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그리고 나 초절정이다. 걱정할 거 없다."

이세기는 웃으며 대답했고.

천문석은 순간 실소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세기와 주호.

그리고 자신.

세 명이 같은 편, 한 일행이 됐다.

초절정 고수 셋.

어지간한 문파도 밀어 버릴 엄청난 전력이다.

그러나.

자신은 연이은 격전에 내공이 거의 말랐고,

이세기는 낮은 내력 때문에 1각, 15분 초절정이다.

주호는 팔다리가 아작나 부목을 대고,

기경팔맥에는 심마가 심어진 채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초절정 셋이 모였는데 하나같이 하자가 있다니!

너무나 공교로운 상황이다.

그러나 천문석은 어쩐지 등 뒤가 든든했다.

자신의 뒤에 있는 건,

설령 목숨을 잃는다 하여도 배신하지 않을 친우.

빡빡이 이세기였으니까.

하-

웃음을 터트린 천문석은 앞장서 길을 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목적지인 마제사에 도착했다.

---

천문석이 12시간 동안 도망친 설산은 거대한 산이었다.

게다가 설산과 이어지는 드넓은 산맥까지 생각하면,

100명 아니 천명의 무사가 있다고 해도 완전한 봉쇄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림인이라 하여도 다닐 수 있는 길은 제한되어 있었다.

이세기가 매를 날려 정찰한 바에 따르면 주요 길목과 능선, 골짜기에는 모두 무사들이 배치됐다.

천문석과 이세기 둘이라면 쉽게 뚫을 수 있지만, 극심한 부상을 입은 주호와 같이 이동해야 했다.

잠시 어깨에 들쳐업고 이동하는 것은 가능해도,

청해 호수에 있다는 비밀 수련장까지 추적을 달고 업은 채 이동하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오늘은 무림 던전의 마지막 날!

천문석은 해가 뜨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낸 후.

이세기에게 대환단을 전해주고 던전에서 나갈 생각이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마차를 타고 관도를 강행 돌파한다!

그래서 천문석은 일행을 마제사로 인도했다.

마제사에는 자신이 타고 온 마차가 있었으니까.

탁-

가볍게 마제사의 담을 넘어 전각 그림자 아래로 숨는 천문석과 이세기, 주호.

이세기의 매가 정찰하고,

천문석이 기감을 퍼트려 확인한 대로.

마제사 안에는 무림인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하- 언제 비무대를 뜯어낸 거야?"

천문석은 감탄했다.

비무대와 천막, 화로···.

마제사 앞마당에 설치된 모든 기물이 깔끔하게 치워졌다.

“마사로 안내할게. 바로 이동하자.”

천문석이 앞장서 걷자,

이세기가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가 비무장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너 왜 제시간에 비무장에 안 온 거냐? 너 안 와서 쟤랑 먼저 비무 하는 바람에 개고생했잖아!"

주호는 말하다 보니 열이 뻗치는지 버럭 화를 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세기.

“주 대협.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길을 잃었습니다.”

“길만 따라오면 나오는 게 마제사인데 길을 잃었다고?”

“...설산 초입부터 길안내를 해주겠다는 분들을 만났는데···. 그 스님, 사냥꾼, 화전민, 비구니 분들이 모두 길치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말해봐라."

"...설산에서 10년 동안 사냥을 해서 손바닥 보듯이 안다고 했는데.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2시진 동안 길도 없는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중간에 간신히 도망쳐서 이번에는 평생 여기서 살았다는 화전민을 만났는데···!?"

이세기가 한탄을 늘어놓자,

주호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6시진이 넘게 설산을 달린 자신,

마찬가지로 설산 위를 헤매고 다닌 이세기.

하아-

하아-

이세기와 주호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쉴 때.

천문석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다.

“...”

12시간이 넘게 뺑뺑이를 돈 이세기와 주호.

둘 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주호는 직접.

이세기는 마제사의 주지 스님을 통해서···.

천문석은 문득 입을 열었다.

"좋게 생각해라."

"뭐?"

"좋게 생각하라고?"

이세기와 주호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향했다.

"그 덕분에 나를 만났잖아?"

"하- 그러네. 그 덕분에 돌멩이 너를 다시 만났구나!"

이세기가 탄성을 터트릴 때,

주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재앙의 화신 같은 놈이···."

"말이 심하잖아! 솔직히 내가 아니었으면, 넌 네 조카 주철이한테 벌써 쓱싹 당했어! 고마워해야지!"

천문석이 이의를 제기하자,

주호는 바로 반박했다.

"하- 네가 아니었으면! 주철 그놈이 감히 반기를 들었겠냐!?"

천문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초절정 고수 주호를 아작내놓지 않았으면,

절정에 발만 걸친 주철 총관이 감히 반기를 들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천문석은 아가리 파이팅에서 주호에게 밀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너 내 도움 필요 없어? 그냥 여기다가 버리고 갈까?"

"...!"

주호는 입을 떡 벌렸다.

'이런 치사한 새끼!'

"고맙냐? 안 고맙냐?"

순간 천문석은 주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고.

주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고맙다."

순간 천문석은 악당처럼 웃었다.

카캬카-

"너 평생. 그 고마움 잊지 마라."

주호는 부르르 떨며 다짐하고 다짐했다.

'천문석! 이런 미친또라이 새끼! 내가 벽만 넘으면 사자련의 정예를 모두 끌고 와 네 놈을 끝장내주마!'

천문석은 부르르 떠는 주호의 생각이 짐작됐다.

주호는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거다.

그러나 자신은 이제 곧 무림 던전에서 나간다.

주호는 눈에 불을 켜고 '천문석'이란 이름 석 자를 찾겠지만 현생 알바 천문석은 절대 못 찾는다.

대신 다른 천문석을 찾게 된다.

전생 천마.

마도 지존 천문석!

갑자기 튀어나온 상상도 하지 못한 존재에 기겁해서 얼어붙을 주호!

주호가 이 천문석이 자신과 동일인인지 확인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을 때!

마도 지존 천문석의 방문을 받게 될 것이다.

은자 100만 냥의 수결이 찍힌 지급문서를 든 천마의 방문을!

카캬카-

천문석이 다시 한번 악당처럼 웃을 때,

이세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너 지금도 그렇게 웃냐? 적예가 뒷골목 흑도 악당 같다고 해서. 그렇게 안 웃기로 약속했잖아."

"적예?"

천문석이 반문하는 순간,

전각이 끝나고 마사가 나타났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가 먼저 들어갈게."

퐁, 퐁, 퐁-

천문석은 하늘 고래의 진동을 이용해 자물쇠를 따려 했으나 자물쇠는 이미 열려 있었다.

‘뭐지?’

의아해하면 마사 안으로 들어가자.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

히이잉-

천문석이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말고삐를 잡은 복면 쓴 거한이 보였다.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끄는 말!

천문석은 직감했다.

말 도둑놈과 딱 마주쳤다!

---

천문석은 섬전같이 돌진하며 외쳤다.

"이렇게 재수가 좋다니!"

"이렇게 재수가 없다니!"

동시에 터져 나온 도둑놈의 외침!

천문석은 바로 롱소드를 검집째 휘둘렀다.

훙-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원심력에 롱소드 검집이 날아가는 순간.

휘리릭-

복면을 쓴 거한은 오히려 한발 앞으로 나가며 두 팔로 원을 그렸다.

"태극권?!"

천문석이 깜짝 놀라는 순간.

원을 그린 두 팔이 하나로 모이고!

탁-

날아가던 검집이 두 손 사이에 잡혔다.

천문석은 바로 돌진해 주먹부터 갈기려 했다.

이때 들려오는 익숙한 불호 소리!

"아미타불."

그리고 겁집을 잡은 맞닿은 두 손이 합장하듯 숙어졌다.

"허, 허, 허- 시주. 벌써 돌아왔는가. 오늘은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아미타불, 아미타불-"

"마제사 주지 스님?"

"맞네."

고개를 끄덕이는 복면 쓴 거한.

"아니. 이 시간에 왜 말을?"

"말이 추울 거 같아서. 잠시 산책 겸 달리게 해주려고."

"마차까지 끌고 산책이요? 그럼 복면은 왜?"

순간 거한의 손이 얼굴을 스치며 복면이 사라졌다.

그러자 산적같이 생긴 마제사 주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내 얼굴을 보면 사람들이 놀라서 말이지."

"승복은 어디 가고 무복을 입으셨네요?"

"...내가 승복이 한 벌뿐인데 빨아서···."

"..."

-자정을 넘어간 한밤.

-마구가 채워진 채 마차를 끄는 말.

-검은 복면에 검은 무복을 입고 말고삐를 잡은 주지 스님.

천문석은 완전히 감을 잡았다.

"이세기! 마사 입구를 막아라!"

"무슨 일 있냐?"

"별일 아니니까. 입구만 막아."

천문석은 이세기에게 외치고 성큼성큼 마차 문으로 걸어갔다.

"시주! 춥지 않은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객사로 가서 따뜻하게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마제사 주지가 다급히 막으려 할 때.

덜컹-

마차 문이 열리고.

어쩐지 눈에 익은 물건들이 드러났다.

새끼줄로 묶은 장작과 숯.

잘 정리된 수십 개의 주머니.

돌돌 말려있는 단단한 방수포.

문득 주머니를 하나 열어보니 쌀이 담겨 있었다.

“...”

순식간에 철거된 비무대와 비무장의 물품들.

그리고 자신의 마차에 실린 눈에 익은 물건들.

천문석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깨달았다.

낭패한 얼굴의 마제사 주지 스님을 보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단어.

'잘됐다!'

천문석은 현행범, 마제사 주지 스님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꿀꺽-

마제사 주지, 바라카스 발도가 긴장된 얼굴로 마른 침을 삼킬 때.

천문석은 입을 열었다.

"잘됐네요. 스님. 그 산책 저희랑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산책?"

"네. 청해 호수까지 가는 산책입니다."

"...내가?"

"네. 마제사 주지 스님이신···. 그러고 보니 스님 법명이?"

천문석의 질문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마제사 주지.

마제사 주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창밖을 살폈다.

천문석, 이 시주가 이름을 묻는 순간.

천문(天問).

하늘 또한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감히 하늘을 향해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법.

마제사의 주지이자 사라지신 상(上)을 찾아 세계의 나무 위를 헤매는 샤는 차마 열리지 않는 입을 열어 이름을 말했다.

"바라카스 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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