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주철과 철검장의 무사들이 모두 사라진 설원.
언덕처럼 쌓인 눈 속에서 슬그머니 내밀어지는 검이 있었다.
스르륵-
눈 밖으로 검이 나오는 순간,
검 끝에서 퍼져나오는 소리와 진동.
퐁, 퐁, 퐁-
하늘 고래의 소리와 진동이 설원으로 퍼져나가고 잠시 후.
높게 쌓인 눈 속에서 한 사람이 기어 나왔다.
롱소드를 든 천문석이었다.
천문석은 몸을 낮춘 채 재빨리 하늘과 주위를 살피고는 자신이 기어 나온 구멍에 말했다.
"야, 아무도 없다. 빨리 나와라."
말이 끝나는 동시에 주호를 끌고 구멍에서 기어 나오는 이세기.
천문석과 이세기, 주호 세 사람은 포위망을 뚫고 사라진 게 아니었다.
높게 쌓인 눈 속에 기척을 죽이고 숨어 철검장의 무사들과 주철 총관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 바로 산에서 내려갈 거야?"
이세기가 묻는 순간.
주위를 살피던 천문석은 품 안에서 지도를 꺼냈다.
“아니. 주철 그놈 생각보다 치밀하다. 길은 다 막혔을 거야. 우선 물과 건량부터 찾고 생각하자. 어, 마침 가까운데 은신처가 있는데?”
천문석은 손가락으로 짚은 지도를 이세기 앞에 내밀었다.
“우선 여기로 이동해서 숨 좀 돌리자.”
천문석은 바로 움직였고.
이세기는 주호를 업은 채 뒤를 쫓았다.
순식간에 설원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
천문석은 능선을 넘으며 이세기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너 아까 이야기 다시 해봐라. 청해 호수에 왜 갔다고?"
“청해 호수의 섬에 영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런데 6일 동안 찾았는데도 아무것도 못 찾았어.”
“그 섬에선 응룡채의 거선을 타고 나온 거고?”
“맞아. 마일도. 응룡채주의 도움을 받았지. 그때 배가 지나가지 않았으면 몇 달이나 갇혀있을 뻔했다. 하하하-”
이세기가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리며 물었다.
"하- 영물을 찾아간 이유가 내공 때문이라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기.
"맞아. 내가 내공이 좀 많이 약해."
"...너 초절정, 아니 검강은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냐?"
"1각 정도?"
1각?
15분이라고!
‘이런 미친!’
천문석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천검 이세기가 출동하며 위기는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이없게도 이세기는 검의 경지에 비해 내공이 이상할 정도로 낮았다.
창천무흔!
엄청난 무위를 펼쳤으나,
그 무위에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1각.
단지 15분짜리 초절정 고수라니!
이성의 일기일원공에 허덕이는 자신과 마찬가지, 아니 더 나쁜 상황이었다.
천문석은 이세기의 전신을 살폈다.
이세기의 내공이 왜 이렇게 약한지는 바로 감이 왔다.
이세기의 사문 창천문!
이세기가 나타나기 전, 창천문에서는 초절정은커녕 절정의 무인조차 배출하지 못했다.
당연히 창천문의 내공 심법에는 특출난 점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분명 전생에 이세기랑 싸울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때 문득 떠오르는 이세기의 강호 출도 당시의 이야기.
'천검 이세기는 강호에 처음 나와 청해 호수에서 거대한 ‘검은 뱀’을 잡고! 단혈철검 주호와 싸워 이겼다!'
검은 뱀!
...설마? 이 검은 뱀이 흑사회가 아니라 진짜 검은 뱀, '영물'인 건가?
전생의 이세기는 영물의 내단을 얻어 창천문 내공 심법의 단점을 극복한 건가?
‘그럼 어째서 이번에는 영물의 내단을 얻지 못했지?’
의문을 품는 순간.
지난 며칠간의 사건들이 머릿속에서 나열됐다.
1. 흑사회의 도박선에서 난장판을 만들었다.
2. 청해 호수에서 흑사회와 응룡채가 뒤엉킨 추격전이 벌어졌다.
3. 응룡채의 거선이 원래보다 '빠르게' 이세기가 있던 섬을 지나갔다.
4. 이세기는 '영물, 검은 뱀'을 만나기 전에 응룡채의 거선을 타고 섬을 빠져나왔다.
결론 : 이세기는 영물, 검은 뱀의 '내단'을 취하지 못해 창천문 심법의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즉 이세기는 지닌 내력이 무공 수준에 비할 수 없이 낮다.
"..."
천문석은 하늘을 봤다.
선연과 마장.
하늘은 이세기라는 선연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 선연에는 치명적인 단점, 마장이 있었다.
내공이 약하다는 마장이!
천문석은 이세기에게 물었다.
"너 아까 주철 철검장 총관이랑 싸우면 이길 수는 있지?"
“당연하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세기.
"100합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하하하-
천문석은 웃었다.
100합.
라면을 두 개 끓이고 햇반을 돌려도 남는 시간.
자신이 철검장 무사들의 검에 난도질당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천문석은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하늘이시여.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내공이 약한 천검 이세기라니!
이때 이세기의 어깨에 걸쳐진 주호가 천문석의 눈에 들어왔다.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
'...이세기가 그냥 단혈철검 주호랑 싸우게 둬도 됐던 거 아냐?'
천문석은 바로 질문했다.
"야. 너 초절정이랑 싸우면 이길 수 있냐? 검강 쓰고 내공이 보통보다 강한 초절정 초입의 무인!"
“초절정 초입이라고? 나도 검강을 쓸 수는 있는데···.”
이세기는 고심했다.
천문석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릴 때.
이세기의 입이 열렸다.
"강호 18성에 도전할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 내 내력으로는 초절정은 상대하기 어렵지. 100합정도 버티는 게 고작? 결국에는 지지 않을까?"
"..."
이세기의 대답을 들은 천문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은자를 펑펑 쓰며 계획을 세우고.
12시간 동안 설산을 달려 주호의 체력을 빼놓고.
흑도 조무래기처럼 치열하게 싸워 무림 던전을 지켰다.
거기에 더해 철검장의 반란 음모에 휘말려 기절한 주호를 데리고 도망치는 상황에 처했다.
"..."
이 모든 건 던전 클리어 조건인 주호가,
이세기에게 패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천검 이세기가 단혈철검 주호보다 약했다고?!'
순간 천문석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난 무엇을 위해서!
이 개고생을 한 것이란 말인가?
천문석은 이세기에게 외쳤다.
"이세기 이 새끼! 내공 수련 제대로 안 하고 뭐 했어! 너 때문에 내가 무슨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뭐?"
"됐고! 너 여기서 내려가는 데로! 바로 그 섬으로 다시 가라! 거기 검은 뱀 잡아서! 내단 먹을 때까지 절대 나오지 마라!"
"검은 뱀? 거기 6일 동안 밤낮으로 찾아도 영물은 그림자도 보이지···."
"나올 때까지 찾아!"
천문석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달렸다.
“...뭐지? 내 내공이 약한데···. 왜 자기가 화를 내? 내가 화를 내야 하는 거 아냐?”
이세기는 어이없어하며 천문석을 따라 달렸다.
“야, 같이 가!”
---
천문석과 이세기, 주호가 설원을 떠나가고 한참 후.
격전이 벌어진 설원에 흑기당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여기서 매가 떨어졌습니다!"
흑기당의 매잡이가 외치는 순간,
흑기당주 당무가 깃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날 듯이 능선을 타고 달려오는 극음도의 무사들!
곧 설원에는 극음도의 무사들과 이열이 도착했다.
극음도 이열은 설원을 돌아봤다.
수십 명이 격전을 벌였는지,
곳곳의 땅이 파이고 눈이 언덕처럼 솟은 설원!
설원 곳곳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얽혀 있고,
붉은 핏방울이 얼어붙어 있다.
"여기 시체가 있습니다!"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이열은 단숨에 달려갔다.
등 뒤에서 칼을 맞고 쓰러진 두명의 무사 시체.
"철검장의 무사입니다!"
순간 극음도 이열의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
철검장주 주호와 비무를 벌인 금권 대협!
금권 대협이 죽인 건가?
생각하는 순간,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자신을 수없이 기만했던 금권 대협.
그러나 그 무공과 드높은 무리만큼은 진짜였다.
게다가 소금 벌판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그야말로 일대종사!
그런 이가 등 뒤에서 검을 휘두를 리 없다.
지금 분명한 것은 하나,
철검장의 무사들이 금권 대협을 쫓고 있다는 것!
극음도 이열은 눈을 번뜩이며 명령했다.
"철검장을 쫓는다! 우리가 먼저 금권 대협을 찾아야 한다!"
"존명!"
허리를 숙인 흑기당주 당무는 바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매를 날리고! 흑기를 펼쳐라! 전력으로 철검장을 추적한다!"
휘유우우-
순간 3마리의 매가 날아오르고,
뻣뻣한 흑기가 능선 위에 펼쳐졌다.
파라라락-
흑기당의 매잡이들이 매를 쫓아 달리는 순간.
설산 곳곳에 흑기당의 흑기가 올랐다!
흑기의 움직임을 따라 전해지는 수많은 정보.
당무는 흑기를 살피며 선두에서 달리고,
이 뒤를 이열과 극음도의 무사들이 따라 달렸다.
천문석과 이세기, 주호를 찾는,
철검장의 총관 주철과 무사들 뒤로 꼬리가 붙었다.
추적이 특기인 흑기당.
마도 18문의 일문 극음도.
그리고 초절정 고수 이열이라는 꼬리가!
---
휘유우우우-
날카로운 매 울음소리가 울리는 순간.
다급히 바위 아래로 몸을 숙이는 십여 명의 인형들.
매 울음소리가 멀어지고,
바위 위로 슬그머니 머리를 내미는 사람은.
장가장의 장일 총관이었다.
"매 날아갔다! 어서 가자!"
이때 들려오는 목소리.
"...총관님. 이렇게 하면 진짜로 찾을 수 있을까요?"
무사의 질문에 장일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흑기당 놈들이 사람을 얼마나 잘 찾는지 알잖아?"
순간 공감한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는 장가장의 무사들과 빈객들.
장일 총관의 말대로 흑도 방파 흑기당은 추적과 사람 찾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우리는 흑기당이 찾는 순간! 그때 잽싸게 빼돌리면 된다!"
장일 총관은 빈객들을 향해 머리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 저희가 시선을 끌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금권 대협 그분만 빼돌리면 됩니다!"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겁니까?"
빈객 중 한 명이 묻는 순간.
장일 총관은 손사래를 쳤다.
"아유. 싸우다니. 큰일 날 소리를! 저희는 철검장, 흑기당, 극음도 어디랑도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재빨리 금권 대협만 빼돌려서 도망치면 됩니다!"
"..."
빈객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
장일 총관은 품 안에서 넓은 천을 꺼내 사람들에게 돌렸다.
"혹시 모르니 이걸로 얼굴 가리시고 움직이죠."
"...."
복면을 쓴 장일 총관과 장가장의 무사들이 흑기당의 뒤에 붙었다.
철검장의 주철.
흑기당과 극음도.
장가장의 장일 총관과 빈객들.
깊은 밤 한겨울 설산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격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때 모두의 목표 금권 대협 천문석은.
동굴 은신처에서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
동굴 바닥에 생겨난 2자 깊이의 구덩이.
파바바박-
이 구덩이 안에는 롱소드로 능숙하게 땅을 파헤치는 천문석이 있었다.
"거기 진짜 맞냐? 아니 그보다 너 검으로 땅을 파는 거야?"
이세기가 묻는 순간,
천문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여기 맞아! 은신처 가르쳐준 스님이 돈은 좀 밝히는데. 아주 믿을만해. 그리고 한겨울에 얼어붙은 땅을 손으로 팔 수는 없잖아?"
"..."
이세기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 한겨울에 손으로 땅을 파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검사가 검으로 땅을 파는 것도 정상이 아닌 것 같은데···.
이때 들려오는 환호성!
"찾았다!"
천문석은 손으로 흙을 쓸어냈다.
그러자 드러나는 나무판자!
나무판자를 손으로 두들기자.
통, 통, 통-
속이 빈 울림이 들려왔다.
"이세기. 그쪽 손잡이 잡아라! 한 번에 들어 올리자."
천문석과 이세기는 양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나무상자를 끄집어냈다.
쿵-
동굴 바닥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리가 나는 커다란 나무상자!
천문석은 롱소드를 지렛대 삼아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끼이익, 텅-
뚜껑이 열리자 상자 안에 가득 든 물품들이 보였다.
여러 개의 수통과 보존 식량.
간이 화로와 커다란 냄비, 번철.
잘 말린 숯과 장작.
여분의 겨울옷과 가죽신.
두툼한 담요와 금창약, 붕대까지!
역시 정직과 신뢰의 마제사!
마제사에서 준비한 나무 상자답게 내용물이 아주 충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