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
은근슬쩍 도망치려는 계획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천문석은 걸음을 멈추고 기절한 주호를 가리켰다.
"주철! 난 초절정인 주호를 아작낸 사람이다! 감히 나랑 싸우려 하느냐!"
문득 발걸음을 멈추는 주철.
'먹혔냐?'
천문석이 기대를 담아 주철을 보는 순간,
주철이 웃음을 터트리며 무언가를 던졌다.
하하하-
툭-
천문석의 발 앞에 떨어진 건 은자였다.
피 묻은 은자.
천문석이 의아한 눈으로 은자를 보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청해 호수!”
“...!”
청해 호수에서 암기 삼아 던졌던 은자다!
"대단하긴 하더군 6시진이 넘도록 초절정 고수를 뒤에 달고 도망치다니! 홍청방에서 들은 것 이상이다. 가짜 극음도!"
홍청방!
가짜 극음도!
돌연 튀어나온 이름에 천문석은 깨달았다.
'홍청방! 이놈들이 정보를 팔았구나!'
"이상하지 않았나? 100명이 넘는 철검장의 무사가 있었는데. 6시진 동안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게?"
주철은 천문석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상상 이상이었다. 주호의 힘만 좀 빼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주호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다니!"
하하하-
주철의 웃음이 터지는 순간 사방에서 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네가 시간을 끄는 걸 모를 줄 알았나?"
"..."
"네 덕분에 무사들이 모일 시간을 벌었다. 하하하-"
다시 한번 웃음이 터지는 순간.
능선과 바위 뒤에서 몸을 일으키는 수십 명의 무사!
산 아래서 달려오던 무사들이 다가 아니었다.
이 순간 주철이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들며 외쳤다.
"적손 주철이! 오늘 철검장의 정기를 바로 세우겠다!"
주위를 둘러싼 무사들이 부복하며 일제히 외쳤다.
"철검장의 정기를 세우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
사방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외침들.
"..."
천문석이 말없이 서 있자.
주철은 수십 명의 무사를 돌아보며 외쳤다.
"주호가 폐관에서 나왔을 때 철검장은 이미 내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초절정의 벽을 넘으며 모든 계획이 흔들릴 뻔했지만."
"그것도 금권 대협. 네 덕분에 해결됐다!"
"고맙다. 하하하-"
이때 천문석이 슬쩍 끼어들었다.
“고마우면 이제 가도 될까?”
천문석이 능청스럽게 묻는 순간.
주철은 광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냉정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다.”
천문석은 기절한 주호를 툭 건드렸다.
"주호. 놓고 가도 안 되냐?"
주철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죽인 사자련의 단혈철검 주호 말이냐?"
기절한 주호를 이미 죽은 사람 취급하는 주철.
천문석은 주철의 생각을 알아챘다.
명분!
뒤이은 주철의 말은 천문석의 생각대로였다.
"넌 비무에서 패배한 후에 아량을 베풀어준 장주님을 기습해서 죽인 거다. 그리고 이 무사들도 네가 죽였지."
"..."
"난 돌아가신 장주님과 무사들의 복수를 하고! 복수를 완수한 대공자로 정정당당히 철검장을 이어받는다!"
"..."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은가?"
---
'그럴듯하기는.'
천문석은 내심 주철을 비웃었다.
무림에서 명분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명분보다 중요한 게 있었으니.
힘!
철검장이 서녕시의 패자였던 건,
단혈철검 주호가 장주였기 때문이다.
멍청하게 뒤통수를 맞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더럽게 질척질척 끈질겼던 주호!
주호의 이기기 위한 집념과 끈기만큼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그에 반해 눈뽕좀 맞았다고 빌빌거리던 주철 총관.
주철 총관에게는.
폭발적인 투지도.
끝까지 들러붙는 집념도.
더럽게 질척이는 사파 특유의 기질도 없다.
사자련은 강자존의 율법이 지배하는 사파 연합!
주철이 철검장주가 되면.
철검장은 머잖아 흑기당, 응룡채 같은 흑도 방파에 먹히게 될 것이다.
이때 주철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제 끝내자!"
순간 사방에서 들려오는 금속 소리!
스르렁-
수십 명의 철검장 무사들이 일제히 검과 도를 뽑아 천문석에게 겨눴다.
끓어 오르는 살기,
폭발할 듯 고조되는 긴장감!
"..."
그러나 천문석은 검조차 뽑지 않고 서 있었다.
"포기한 건가? 금권 대협? 발악이라도 해봐야지? 청해 호수에서처럼 말야?"
주철이 비웃는 순간.
천문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살기 어린 수십 명의 무사에게 둘러싸인 위기 상황!
그러나 천문석은 이들을 가소롭다는 듯이 보며 절대 고수처럼 웃었다.
하하하하-
그리고 길게 이어지던 웃음이 뚝 그치는 순간.
천문석은 광오한 눈으로 주위를 쓱 돌아보며 툭 내뱉었다.
"감사해라."
"뭐?"
돌연한 말에 주철이 반문할 때.
천문석은 무명 소졸을 내려다보는 절정고수 같은 자세를 잡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 진짜 천문석. 아니 그게 진짜는 아니지. 가짜···. 아니 사실 가짜도 아니지. 또 다른···. 아니 이게 또 다른 나는 맞나?"
천문석은 갑자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 녀석?’
주철은 해괴한 눈으로 천문석을 봤다.
가짜 극음도,
가짜 이세기.
장가장의 금권 대협.
천문석.
흑사회주를 감쪽같이 속이고 청해 호수의 난장판을 만든 천문석.
천문석은 직접 보니 홍청방에서 들은 정보보다 더 미친놈이었다.
"저···. 어떻게 할까요?"
이때 무사 한 명이 횡설수설하는 천문석과 기절한 주호를 가리키며 물었다.
순간 주철을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공격 명령을 내리려 할 때!
갈!
천문석이 돌연 사자후를 터트리며 외쳤다.
"감히 나에게 검을 겨누다니! 그러나 아량을 베풀어주겠다! 이번엔 봐줄 테니. 그냥 가라!"
수십 명의 무사에 둘러싸인 채 내뱉는 광오한 외침!
절정의 고수라 해도 이 정도 무사들을 상대하면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런 광오한 외침이라니!
사방에서 어이없어하는 눈빛이 쏟아질 때.
천문석은 기절한 주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호는 심마에 빠져 내공을 잃었다. 이제 은혜도 없고 원한도 없다."
"..."
"그러니까 얼른 돌아가서 철검장이나 먹어라!"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주철은 검을 뽑아 겨누고 잇달아 외쳤다.
"허튼소리!"
"모두! 함부로 움직여 포위를 풀지 마라!"
"머리가 기막히게 좋고! 도망은 더 잘 치는 놈이다!"
"손을 조심해라! 엄청난 섬광을 터트리는 무공을 쓴다!"
"어떻게든! 지금 여기서 끝장내야 한다!"
"존명!"
...
사방에서 들려오는 외침과 살기에 설원이 진동할 때.
주철은 기세를 끌어올리며 천문석을 향해 걸었다.
쿵, 쿵, 쿵-
천문석은 검조차 뽑지 않은 채,
내부를 관조하며 주철을 바라봤다.
툭, 투둑-
한 방울, 두 방울씩 느리게 차오르는 일기일원공의 내력.
지금 쓸 수 있는 내공은 한 줌.
천검의 검혼이 담긴 검강 롱소드라 해도,
연료인 내공이 없으면 제대로 된 힘을 내지 못한다.
지금 주철과 검을 맞대면 기술로 어떻게든 버텨도 내력이 다하는 순간에 진다.
게다가 수십 명의 무사가 주위를 둘러싸고 퇴로를 철통같이 막고 있었다.
돌진했다가 발이 잡히는 순간 포위되어 차륜전에 말라 죽는다.
혼자인 주호와 싸울 때와 달리 도망칠 수도 없다.
사면초가!
절체절명의 위기!
그러나 천문석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내가 이 손을 내리면!"
"...내리면? 산사태라도 일어나냐? 하하하-"
주철이 웃음을 터트리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웃음 소리.
하하하-
순간 천문석은 하늘을 향해 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다른 웃음을 지웠을 때.
돌연 웃음을 멈춘 천문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가 시간을 끄는 걸 모를 줄 알았나?"
"뭐? 그게 무슨···?"
"나도 부하를 기다렸다고! 새끼야!"
천문석은 손을 내리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빡빡이! 출동해라!"
휘이이이잉-
이 순간 설원에 일진광풍이 불어왔다!
---
휘이이잉-
시작된 곳 없이 불어오고,
끝난 곳 없이 사라지는 바람.
문득 바람을 느낀 순간에는,
이미 섬뜩한 예기가 몸을 스친 후다.
휘이이잉-
흔적 없는 바람이 설원을 달리는 순간.
사방에서 비명이 쏟아졌다!
컥, 헉, 흑-
선연한 붉은 피가 솟구치는 순간.
바람을 타고 흐르는 강철의 섬광!
흔적 없는 바람,
종적 없는 검.
창천무흔!
단 한 번의 쇳소리 소리조차 울리지 않는다.
섬뜩한 예기를 느낀 순간에는 이미 바람이 몸을 타고 지나갔고,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팔과 다리, 어깨와 손목에서 피가 솟구친다!
주위를 포위한 무사들이 일진광풍에 흐트러지고.
주철이 대경실색한 순간.
휘이이잉-
주철에게 몰아치는 바람!
순간 주철은 강기를 끌어올린 검을 사방으로 펼쳤다.
파스스슥-
강기가 자라난 검에 걸리는 것은 하나도 없으나,
절정의 경지에 닿은 기감은 끝없는 위기를 경고한다!
천지 사방!
미친 듯 불어오는 검에서 수백 수천 자루, 검의 예기가 느껴진다!
"...!"
문득 가슴에서 느껴지는 섬뜩함!
주철은 다급히 검을 세우며 몸을 뒤로 뺐다.
휘이-
이 순간 미약하기 그지없는 산들바람이 옷섶을 스치고.
툭-
무복이 잘려나간다!
"누구냐!?"
경악한 주철이 외치는 순간.
천문석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천하 십절의 검절이자 천검!"
"더럽게 잘생긴 새끼!"
"빡빡이! 이세기다!”
"뭐?"
주철이 반문하는 순간,
바람에서 들려오는 당황한 외침.
"야! 뭔 헛소리냐!"
이세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천문석은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것이 애들 싸움에 형을 부르는 기분인가?!
천검 이세기가 출동한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천문석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주철에게 외쳤다.
"넌 이제 큰일 난 거다! 움직이는 산사태이자 자연재해가 왔다!"
카캬카-
---
휘이잉-
순간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고,
어느새 천문석 앞에 선 이세기.
"야, 나 돌아올 거는 어떻게 알았어?"
이세기가 묻는 순간.
천문석의 머리에 떠오르는 기억.
한겨울 산속 사당에 놓인 쌀가마니와 두툼한 거적 그리고 장작들.
어린 시절에도 이세기는 몇 번이나 몰래 사당을 찾아와.
동생들이 추운 겨울과 혹독한 봄을 날 식량과 장작을 놓고 갔었다.
냉정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그 마음속에 절절한 정이 있던 이세기.
그런 이세기의 생각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스님은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돌아왔냐?"
천문석의 물음에 허탈하게 웃는 이세기.
"하- 너 진짜 돌멩이구나."
"천문석이라고 불러."
"그래. 천문석. 어, 천문? ...이거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내심 찔끔한 천문석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보다 바로 길을 뚫자!"
이세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내가 앞."
"나는 뒤."
"달린다!"
"달린다!"
두 사람이 동시에 외치는 순간.
이세기가 검을 뻗으며 주철을 향해 돌진했다.
파아앙-
거센 바람에 비산하는 눈!
눈이 쏟아지고.
쿠르르릉-
천둥이라도 떨어질 듯 대기가 요동치는 순간!
쾅, 쾅, 쾅, 쾅-
이세기의 검과 주철의 검이 연이어 격돌했다.
매 순간 퍼져나가는 엄청난 충격파!
단지 4번 검을 맞댄 순간.
주철의 팔은 충격에 파르르 떨렸다.
이 순간.
섬전같이 뻗어오는 이세기의 검!
쿠르르릉-
대기를 긁는 굉음이 터지는 순간.
주철은 감히 검을 받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길이 열리자,
이세기가 외쳤다.
"뚫는다!"
순간 이세기가 달리고 주호를 어깨에 걸친 천문석이 바로 뒤에 붙었다!
단숨에 주철을 지나쳐 무사들에게 돌진하는 이세기와 천문석!
"막아라!"
당황한 주철이 외쳤으나.
상대는 이세기!
휘이이이잉-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귀가 먹먹해지는 순간.
콰아앙-
설원에 가득 쌓인 눈이 폭발하듯 비산했다.
엄청난 눈에 시야가 가려지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바람!
쿠르르르릉-
대기를 떨어 울리는 진동과 천지 사방에서 느껴지는 예기!
시야를 가리는 눈 속에서,
검으로 이뤄진 폭풍이 몰아쳤다.
상상조차 못 한 광경에,
무사들은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리고 비산하는 눈이 사라졌을 때.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오는 설원에는 이세기와 천문석, 주호는 이미 없었다.
거인이 난동이라도 부린 듯,
군데군데 땅이 파이고 곳곳에 언덕처럼 눈이 쌓인 설원.
설원에는 눈을 뒤집어쓴 주철과 철검장의 무사들만 남겨졌다.
주호가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 순간.
주철과 철검장의 무사들은 전신을 덜덜 떨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범하는 강상죄(綱常罪)!
사자련에서 강상죄, 반란을 일으킨 이들을 살려둘 리가 없었다.
주호가 설산에서 빠져나가면 모두가 죽은 목숨!
"쫓아라!"
주철의 다급한 외침이 터지는 순간.
안색이 하얗게 질린 철검장의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떻게든 주호를 잡아 입을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