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천문석은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능선으로 달렸다.
은자 100만 냥!
엄청난 돈이지만 어차피 무림 던전 안에서만 쓸 수 있는 게임 머니.
천문석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 돈이면 돈 벌기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하던 장일 총관이 입을 떡 벌릴 것이다.
게다가 지맥이 마를 때를 대비한 다른 장원도 세울 수 있다!
"...어?"
이 순간 간질거리는 뇌리!
천문석은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뭐지?'
순간 머릿속에서 주르륵 나열되는 사실들.
-무림 던전의 기반 장가장.
-돈 벌기 힘들다고 말하던 장일 총관.
-무림 던전 안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은자.
은자는 일종의 게임 머니다.
게임 머니, 게임 머니, 게임 머니···.
무언가 벼락 치듯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순간.
천문석은 능선에 올랐고,
반사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시바! 쟤들은 뭐야!?"
휘이이잉-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는 능선.
검은 무복을 입은 십여 명의 무사들이 능선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
"여기에 있다! 빨리 와라!"
순간 천문석에게 끌려가던 주호가 다급히 외쳤다.
"쟤들 철검장 무사냐?"
천문석이 묻는 순간,
번뜩이는 눈으로 웃음을 터트리는 주호.
"맞다! 하하하-"
"..."
천문석은 웃는 주호를 한심한 눈으로 봤다.
"하- 이 허술한 새끼!"
"뭐?"
천문석은 대답 없이 눈뽕을 맞고 허우적대는 주철 총관을 가리켰다.
순간 굳어지는 주호.
주호도 바로 깨달았다.
심복 중의 심복, 총관이 배신했다!
그런데 철검장의 무사들은 배신하지 않았을까?
"어때? 쟤들 너한테 충성하냐? 너 거기에 목숨 걸 수 있어?"
"..."
묵묵부답.
주호는 복잡한 눈으로 다가오는 무사들을 봤다.
천문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현생의 서울 사태, 학교 격전, 현장 면접, 키즈 카페, 쿠팡맨.
-전생의 마굴 돌파, 마도 대전, 장강 격전, 거지 떼 소탕, 남해 보물 추격전···.
전생과 현생.
수많은 위기상황을 헤쳐나온 잔머리가 맹렬히 회전한다.
핑-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
"야! 주호 내가 시키는 대로 외쳐!"
"뭐?"
천문석은 반문하는 주호의 축 늘어진 어깨를 때렸다.
퍽-
으아아아악!
주호의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오고,
능선을 달리는 철검장 무사들의 시전이 주호에게 모이는 순간.
천문석은 내력을 실어 이들에게 외쳤다.
"주철 총관이 배신했다! 역도를 제압했으니 바로 잡아라!"
그리고 주호를 번쩍 들어 올리는 천문석!
주호도 거친 사파 무림을 헤쳐나온 남자.
천문석의 외침을 듣는 순간 바로 그 의도를 깨달았다.
달려오는 철검장 무사들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상황!
배신자가 아니면 주철 총관을 잡으러 달려갈 것이다.
배신자면 제압당한 주철 총관을 구하러 달려갈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막힌 길은 열린다!
'하 이런 미친 잔머리라니!?'
감탄한 주호는 바로 외쳤다.
"모두 배신자 주철 총관을 잡아라!"
주호가 피 끓는 외침을 토하는 순간.
달려오던 철검장의 무사들이 일제히 능선을 넘어 설원으로 달렸다.
이들의 목적지는 설원 한가운데 아직도 허우적대는 주철 총관!
무사들이 사라지고 길이 열린 능선!
천문석은 재빨리 주호를 들쳐 엎고 능선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후읍, 후으읍-
천문석은 호흡을 고르며 힘을 끌어 올렸다.
주호와 처음 비무를 시작하고 12시간!
12시간 동안 눈 속을 도망치고,
마침내 치열하게 싸워 주호의 팔다리를 아작내고 패배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무림 던전을 지켰다는 희열도 잠시.
자신이 아작낸 주호를 둘러업고 도망치고 있다니!
뭔가 일이 자꾸 꼬이고 있었다.
“지금 만나고 있다.”
주호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천문석과 주호의 시선이 동시에 설원으로 향했다.
설원에서 철검장의 총관 주철과 철검장의 무사 십여 명이 만나고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서 이후의 대처가 달라진다.
철검장의 무사들이 주철 총관과 싸우면 주호에게 충성한다는 의미!
바로 단혈철검 주호를 버려두고 도망치면 된다.
이때 십여 명의 철검장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드는 게 보였다.
"역시! 내 부하들! 충성을 다하는···."
희열에 찬 주호가 외치는 순간.
무사들은 일제히 검을 땅에 박고 부복하며 외쳤다.
"대공자!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
순간 천문석과 주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
"한심한 새끼. 하-"
천문석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총관에 이어 부하들에게도 배신당한 주호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폐관 수련하고 나왔더니 개판이 됐네. 시바···."
천문석은 주호의 분노어린 외침을 흘려들으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마제사에 있던 철검장의 무사들은 모두 100여 명.
지금 눈앞의 배신자 10여 명 말고도 무사들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녀석이 배신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군인 줄 알고 넘겼다가 주호가 칼침이라도 맞고 죽으면 무림 던전은 끝장이다!
'이렇게 된 이상, 산 아래 도시까지 도망친다!'
천문석이 마음의 결심을 하고 달리려 할 때.
절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금권 대협! 내 말을 들어라!"
주철.
어느새 시야를 회복한 주철이 천문석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위기 상황에 적의 말을 들을···.
"...!"
바로 도망치려던 천문석은 돌처럼 굳었다.
달이 구름에서 나오며,
환한 달빛 아래 드러난 설산.
설산 곳곳 능선을 향해 달려오는,
수십 개의 검은 점들이 보였다.
이 점 하나하나가 엄정한 기세를 쏟아내는 철검장의 무사들이다!
도망칠 길이 막혔다.
"하, 시바- 이거 어떻게 하냐?"
단혈철검 주호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몸을 돌려 주철에게 포권을 취했다.
"주철 대협!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경청하겠습니다!"
---
천문석이 포권을 취하자,
주철 총관도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금권 대협! 철검장은 원래 내 것이다!"
"뭐, 그게 무슨 말도···!"
반문하려는 주호의 팔을 누르는 천문석.
흐으윽-
주호가 침음성을 삼킬 때,
주철 총관의 절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원래 철검장은 장자인 아버지께서 물려받을 장원이었다! 그런데 소림사에 출가했던 주호가 갑자기 돌아와 장자이자 적자였던 아버지를!"
순간 격동으로 몸을 떠는 주철!
천문석은 목소리를 낮춰 주호에게 물었다.
"야. 뭐야? 쟤 아버지를 네가 쓱싹 한 거야? 너 형을 죽인 거였어?"
주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철이 외쳤다.
"아버지를 무참히 이기고! 철검장을 차지했다!"
천문석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목소리에 어린 절절한 분노!
피비린내 나는 사연이 이어지리라!
"..."
그러나 들려오지 않는 목소리.
"...그게 끝이야?"
천문석이 묻는 순간.
주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미친놈아! 형과 형수 모두 유유자적 잘살고 있는데! 복수는 무슨 복수야!?"
"네가 소림사에서 대환단을 훔쳐먹고 돌아오지만 않았으면! 이미 내 것이 됐을 철검장이다! 오늘 내가 철검장의 정기를 바로 세우겠다!"
이 순간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소림 대환단!"
주호 이 새끼!
어쩐지 내력이 더럽게 세더라니!
진짜 대환단을 훔쳐 먹었던 거였어?!
천문석이 경악하는 순간,
목덜미를 잡고 몸을 떠는 주호!
"이런 미친놈이! 가문의 비밀을···!"
주호는 부르르 떨다가 축 늘어져 버렸다.
극심한 분노에 심마가 자극을 받아 기절한 것!
주철은 섬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기절한 주호를 가리키며 잇달아 외쳤다.
"30년! 30년 동안! 저 악적 밑에서 총관으로 구르고! 권한 없는 대공자로 지내며 복수를 꿈꿨다!"
"내 것인 철검장을 되찾기 위해서! 30년 동안 총관으로 인내하며 기다렸는데!"
"주호! 이 악적이! 폐관 수련에서 초절정에 올랐다고? 그 바늘구멍을 통과하다니!"
하하하-
주철은 돌연 하늘을 향해 광소를 터트렸다.
"그러나 하늘이 도우셔서 마침내. 나 주철이 악적 주호를 처치하고! 철검장을 되찾게 됐다! 이제 네 악행을 하늘에 고하겠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하늘을 향해 쏟아내는 주철의 분노!
"하나! 적자가 아닌 서자가 장원을 차지한 죄!"
"둘! 감히 서자가 적손을 업신여긴 죄!"
...
"..."
천문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
'미친놈! 그런 이유로 작은아버지를 재낀 거야? 아니, 총관 좀 한 게 어때서? 권력 없는 대공자면 편하게 놀러 다니고 더 좋지!'
문득 전생의 어린 시절 마종문 입문 시험에 붙어보겠다고 동생들과 마보를 서던 기억이 떠올랐다.
단지 입에 풀칠하려고 하루 8시진 쉴 새 없이 일하는 사람이 태반인 시대다.
천문석은 주철의 분노에 전혀 공감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차피 처음부터 시간을 버는 게 목적.
천문석은 공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재빨리 일기일원공을 운공했다!
퐁, 퐁, 퐁-
하늘 고래의 소리와 진동이 퍼져나가고.
휘이이이-
롱소드에 담긴 천검의 검혼이 우는 순간.
일기일원공이 움직인다.
그러나 모이지 않는 내력!
12시간에 달하는 추격전과 격전을 벌이고.
마지막 순간 주호의 기경팔맥에 심마를 심었다.
그리고 다시 주철과 싸우며 내력이 완전히 말라붙었다.
단 한 방울의 내력도 없이 바짝 말라버린 기해혈!
‘하, 시바-’
탄식하는 순간 천문석은 문득 시선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돌아가는 눈!
-기절해 축 늘어진 주호.
-분노어린 외침을 토해내는 주철.
-검을 뽑아 들고 무릎 꿇은 무사들.
모두가 아니다.
이때 느껴졌다.
휘이이-
문득 불어오는 바람.
후드득-
바람에 흩날려 몸에 닿는 눈.
환하게 빛나는 달과 별.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설산.
이 모든 곳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너무나 익숙한 시선.
영맥!
천지간에 가득한 기의 흐름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시선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선연한 감각이 전신을 타고 돈다!
천강흔!
천강흔이 드러나는 순간,
영맥과 천문석의 혼백이 이어졌다.
순간 천문석은 마음을 실어 불렀다.
와라-
쿵-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천지간에 가득한 기의 흐름 영맥이 호응한다!
영맥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기!
무림 던전 안에서 쌓은 기는,
던전에서 나가는 순간 허깨비처럼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당장 뒤지게 생긴 상황.
가릴 때가 아니었다!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을 운공해 쏟아지는 기를 기경팔맥으로 도인했다!
툭-
순간 바짝 마른 기해혈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진기!
툭, 투둑-
뜬금없이 내리는 소나기처럼 한 방울 두 방울씩 진기가 쏟아질 때.
섬뜩한 안광이 느껴졌다!
어느새 말을 멈춘 주철이 천문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포권을 취하고 아무렇게나 말을 쏟아냈다.
"주철 대협! 대단하십니다!"
"30년 동안 와신상담! 곱씹은 복수를 해내시다니!"
"군자복수 십년불만! 그런데 무려 30년을 참으시고 복수하시다니!"
"주철 대협의 그 끈기와 인내력! 불굴의 정신이야말로 군자의 풍모!"
...
천문석이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며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자.
주철이 주저 없이 성큼성큼 걸어 거리를 좁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