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이제 모든 것을 마무리할 때!
천문석은 롱소드를 뽑았다.
그리고 아득한 그리움을 담아 마음으로 검혼을 불렀다.
‘와라-’
퐁, 퐁, 퐁-
하늘 고래의 소리와 진동이 퍼져나가고.
휘이이잉-
천검의 검혼이 호응한다.
이 순간 단혈장을 계속 맞으면서도 아끼고 아낀.
마지막 일기일원공을 긁어낸다.
천문석의 손에 어리는 한 호흡의 진기!
이때 경련하던 주호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향했다.
"...!"
주호가 입을 여는 순간.
천문석은 벼락같은 고함을 질러 주호의 목소리를 지웠다.
"주호! 이 비무의 승패는 내가 결정한다! 약속을 잊지 마라!"
주호의 파르르 떨리는 눈이 이세기에게로 움직였다.
"..."
말없이 천문석과 주호를 보고 있는 이세기.
이세기는 이 처절한 승부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천문석은 힘겹게 다리를 끌며 주호에게 걸어갔다.
쓰윽, 쓱-
쓰윽, 쓱-
설원 위로 흔적을 만들며 움직이는 천문석.
천문석은 주호에게 다가가며 내심 혀를 찼다.
내공이 모자랐다.
마지막 박투가 치명적이었다.
연이어 쏟아진 단혈장을 버틸 때 내력이 훅 까였다.
지금 남은 내공으로는 내가중수법을 펼쳐도 엄청난 진원을 지닌 주호에게 제대로 된 내상을 입히지 못한다.
영육과 혼백의 사이.
심상 공간에 자리한 기경팔맥을 뒤집으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이때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심마!’
천문석은 손에 어린 한 호흡의 진기를 변화시켰다.
내부를 뒤집는 파괴적인 '경력'이 아닌 '기연'과 '마장'을 담는다.
기연은 검혼에 담긴 창천무흔의 무리!
마장은 어느새 마음에 스며들었던 심마!
천문석은 ‘심마’를 창천무흔의 무리로 감싼 일수를 준비했다.
적을 파괴하는 공격이 아닌,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기 위한 기연과 마장을 담은 일수!
그러나 심마를 극복할 때까지 제대로 내력을 쓰지 못하는 것은 같다.
이 순간 천문석의 손이 별처럼 빛나고.
쓰윽-
마지막 열 걸음을 걷는 순간.
퉁-
소리도 없이 떨어진 천문석의 일 수가 주호의 가슴을 때렸다!
"...!"
이 순간 주호는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듯한 감각을 느꼈다.
천지와 하나로 이어지는 듯한 감각!
경악한 주호가 눈을 부릅뜨는 순간,
하늘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천지가 무너지는듯한 현기증.
기경팔맥을 거꾸로 흐르는 진기!
주호는 기경팔맥에 심어진 ‘심마’를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피를 토하고 기절했다.
"더럽게 질기더니. 심마에는 한 방에 가는구나!"
역시 사파 녀석들은 심마에 대한 내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하하-
천문석은 기절한 주호를 보며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야 할 말을 했다.
"단혈철검 주호. 내가 졌다!"
---
'무림 던전을 지켰다!'
마지막 말을 내뱉는 순간 긴장이 탁 풀린 천문석.
천문석은 몸에 힘을 빼고 설원 위에 픽 쓰러졌다.
대자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천문석은 만감이 교차했다.
짧은 시간 계획을 짜고 준비하고 실행했다.
많은 변수가 있었지만, 계획대로 주호에게 지고 무림 던전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커다란 위업을 이뤘지만.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드는 생각은 하나.
'뒤질 것 같다!'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한 몸.
텅 빈 내력에 상실감마저 느껴진다.
이렇게 빡센 전투는 오랜만,
아니 이번 생에는 처음이었다.
역시 무림인 그것도 사파 무사는 더럽게 질척질척 끈질겼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터졌으나 결국 자신의 계획대로 됐다!
하하하-
천문석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릴 때.
얼굴 위로 문득 드리워지는 형체.
무표정한 얼굴의 이세기가 수통을 내밀고있었다.
천문석은 수통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순간 가슴속에서 목을 타고 올라오는 화끈한 열기!
천문석이 독한 화주에 부르르 몸을 떠는 순간.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멩이. 너 무공은 언제 배운 거야?"
"하아- 이야기가 엄청 길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
아차!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의 이세기!
"야! 너 돌멩이 맞지!?"
"..."
천문석은 깨달았다.
낚였다!
---
천문석은 우선 헛웃음부터 터트렸다.
허, 허, 허-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되는대로 쏟아내는 말.
"그게 무슨 소리요? 사람 이름이 돌멩이라니?"
"..."
"소협께서 뭔가 크게 착각을 하신 것 같은데···."
"..."
"누구랑 착각하셨는지 몰라도. 저는 소협을 이번 생에 처음···."
이세기는 돌연 내공을 실어 벼락 치듯 외쳤다.
"객잔 주인! 무림 고수!"
"당연히 객잔 주인······."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과 수백 수천 번 이야기했던 장래의 꿈.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다가 굳어졌다.
이세기는 이제는 완전히 확신에 찬 눈으로 말을 쏟아냈다.
“돌멩이! 객잔 주인이 꿈이던 진짜 돌멩이가 맞구나!”
“천문석? 단혈철검이 부르던 그 이름은 뭐야?”
“아니 그보다 무공이라니. 무림인이 된 거냐? 스님을 따라가더니···. 그 스님이 무림 고수였던 거냐?”
"..."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천문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
더는 발뺌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세기는 완전히 확신에 찬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아니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지금은 천문석과 이세기가 만날 시기가 아니었다.
이세기는 천하 18성의 대부분을 박살 내고 천하 십절의 시대가 열린 후.
몇 번의 헛걸음을 하고서야 마도 18문의 지존이 된 천문석에게 도전하게 된다.
그때가 어린 시절 헤어졌던 천문석과 이세기가 다시 만나는 때이다.
그게 전생의 사실이었다.
혹시나 과거가 틀어질까 봐,
이세기를 직접 만나 주호와의 비무를 포기시킨다는 쉬운 방법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세기와 딱 마주치고 정체마저 들켜 버렸다.
'이거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천문석은 의문을 품는 순간,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어차피 이곳 무림 던전은 허상이다.
과거의 세계를 모사하는 주머니 차원.
'그럼 상관없는 건가?'
그러나 무림 던전을 직접 겪은 천문석은 이 모든 게 허상일 뿐이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별들에서 전해지는 아득한 천기!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사람!
젊은 무사 이원.
흑사회주 여량위.
단혈철검 주호.
마제사 주지 스님.
...
생각할수록 의문만 많아질 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하-
결국, 한숨을 내쉰 천문석은 더는 머리를 굴리는 걸 포기하고 이세기를 봤다.
더는 발뺌 할수 없었다.
"그래 맞다. 내가 돌멩이다. 빡빡이! 눈치 더럽게 빠르구나!"
천문석이 실토하는 순간,
이세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너였구나! 네가 무림인이 되다니! 분명 객잔이나 장원주인이 될 줄 알았는데! 돌멩이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리고 빡빡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스승님이랑 떠날 때. 너 지붕에 몰래 숨어서 봤더라. 머리를 빡빡 밀고."
이세기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진짜 돌멩이구나. 하- 그때 뭔가 이상한 기척이 느껴지더라니. 내가 있는걸 봤었구나."
"꼭 그런 건 아닌데 그거랑 비슷한 일이 있었어."
"그보다 어서 내려가자. 내가 크게 한턱낼게."
이세기는 웃으며 천문석의 손을 잡아당겼다.
천문석은 이세기의 손을 잡고 단숨에 일어났다.
으드득-
순간 전신의 뼈마디가 울렸다.
역시 초절정은 초절정!
12시간 동안 뺑뺑이를 돌려 체력과 내공이 거의 바닥난 상태의 주호와 싸웠는데도 간신히 이겼다.
"너, 괜찮냐?"
"괜찮아 움직일만하다. 그보다 너 얼른 튀어라."
"뭐?"
이세기가 여기서 얼쩡거리다가 철검장이랑 엮이면 자신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천문석은 이세기에게 적당히 둘러대려는 순간.
휘유우우-
하늘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울음소리!
밤하늘 높은 곳에서 매 한 마리가 원을 그리고 있었다.
---
흑기당!
천문석은 매를 보는 순간 직감했다.
극음도 이열과 흑기당이 뒤에 붙었구나!
하필이면 격전을 치르고 체력과 내공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 나타나다니!
'싸워 이길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한 순간.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림 던전의 유지라는 목표는 이뤘다.
게다가 오늘은 무림 던전에서 나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즉 여기서는 싸울 필요 없이 몸만 피하면 된다. 그리고 설산 곳곳에 깔아놓은 물자만 찾으면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뒤에 저 매가 붙었다는 건데···.
이때 이세기가 번개같이 허공으로 검을 찔렀다.
소리 없는 검이 허공을 찌르는 순간,
하늘로 퍼져나가는 바람!
휘이잉-
다음 순간 하늘에서 큰 북 치는 소리가 울리고.
둥-
높은 하늘을 날던 매가 돌연 땅으로 떨어졌다.
이 순간 연속된 검격을 날리는 이세기.
휭, 휭, 휘이잉-
매 검격 일진광풍이 몰아치고,
추락하던 매는 광풍에 휩쓸려 이세가 앞으로 떨어졌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매.
이세기가 매를 줍는 순간.
천문석은 한눈에 알아봤다.
시작도 끝도 없이 불어오는 바람,
창천무흔!
벌써 창천무흔을 펼친다고?!
"이런 재능충에 사기캐 같으니라고!"
천문석이 분통을 터트리는 순간,
이세기는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재능충? 사기캐? 그게 무슨 소리야?"
"됐고. 너 얼른 가라."
"가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천문석은 이세기가 들고 있는 매를 가리키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거 흑기당 매다. 게네들 마도 18문의 극음도랑 같이 움직이고 있어. 마주치면 곤란해지니까 빨리 튀어."
"넌, 어쩌려고? 같이 튀어야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하는 이세기.
천문석은 이세기의 어깨를 툭 쳤다.
"야. 나 돌멩이야. 도망치는 건 천하제일. 넌 어서 다음 비무행에 나서야지. 사문의 은혜를 갚아야 하잖아."
"...너 그건 어떻게!"
이세기가 경악할 때 천문석은 멀리 떨어져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비구니를 가리켰다.
"저 스님 모시고 빨리 튀라니까. 저분 위험하다!"
그리고 이세기의 등을 떠미는 천문석.
"달려라! 이세기!"
"..."
이세기는 잠시 천문석을 물끄러미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사정이 있구나. 알았다. 창천문으로 연락해라. 꼭 다시 보자! 돌멩이!"
비구니를 향해 달려가는 이세기.
천문석은 문득 드는 생각에 달려가는 이세기에게 외쳤다.
"야. 비무행 끝나도 마도 18문에 바로 갈 필요 없다. 그때 천마, 마도 18문에 없다!"
"뭐?"
이세기는 잠시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천문석을 보더니,
크게 손을 한번 흔들고 비구니와 함께 능선으로 달려갔다.
이제는 자신도 도망칠 때.
천문석은 매가 날아온 곳 반대쪽으로 달렸다.
이때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눈 속에 쓰러진 무림 던전의 클리어 조건.
단혈철검 주호!
기절한 주호가 죽기라도 하면 그동안의 고생이 허사가 된다.
천문석은 재빨리 주호에게 다가가 주호의 상태를 확인했다.
외상은 심하지만, 기식은 정상.
맥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역시 초절정 고수!
이대로 놔두면 조만간 정신을 차릴 거다.
얼어 죽지만 않으면.
천문석은 주호의 옷 안에 숯이 들어있는 구리통과 건량을 넣어줬다.
그리고 다시 몸을 흔들어 본다.
"주호! 정신 차려!"
"..."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주호.
천문석은 문득 생각난 걸 말했다.
"야! 너 당장 안 일어나면. 노란!"
순간 주호가 번쩍 눈을 떴다.
커어억-
다급한 숨을 토해내는 주호!
그러나 눈을 뜬 주호는 전신을 덜덜 떨며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천문석은 주호의 뺨을 후려갈겼다.
찰싹-
"야, 정신 차려! 움직일 수 있겠냐?"
그러나 말하자마자 깨달았다.
축 늘어진 채 앞뒤가 바뀐 주호의 다리.
게다가 눈을 떴는데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
자신이 주호의 다리를 한 바퀴 돌리고 기경팔맥에 심마까지 심었다!
'아, 적당히 할걸.'
그러나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법!.
흑기당 놈들이야 감히 사자련의 주호를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마도 18문의 일문 극음도는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이 녀석 업고라도 가야 하나?'
천문석이 고민하는 순간.
피리리리-
신호용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흑기당의 매가 이곳에 떨어졌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검은 무복을 입은 세 사람이 능선 너머에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