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이열과 극음도의 무사들.
그리고 마제사 밖에서 대기 중이던 흑기당주 당무와 흑기당의 정예 무사들도 설산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떠나가자 혹시나 해서 비무장에 남아있던 무림인과 구경꾼들까지 떠나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철검장의 무사들도 일제히 설산으로 이동했다.
마제사의 비무장은 텅 비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무장 안쪽 마제사의 내원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갔다고?”
“네. 주지 스님. 모두 떠난 걸 확인했습니다.”
“그럼 얼른 가자!”
곧 산적 같은 얼굴의 스님과 수십 명의 스님들이 나타났다.
마제사의 주지 스님은 텅 빈 비무장을 보며 눈을 빛냈다.
질 좋은 나무로 만든 비무대.
두꺼운 방수천으로 만든 천막.
천막 안 곳곳에 놓인 튼튼한 의자, 화로와 숯, 음식까지.
모든 게 그대로 있었다!
이 정도면 한겨울 추위에 고생하는 산속 마을의 집들을 보수하고 일주일은 따뜻하고 배불리 지낼 수 있었다.
마제사의 주지는 재빨리 지시했다.
"부처님의 은덕이다! 얼른 모조리 뜯어서 옮겨라!"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주지 스님을 보는 스님들.
"아니···. 이걸 저희가 마음대로 뜯어도 되는 겁니까?"
"나중에 철검장에서 찾아와서 한소리 하면···."
...
주지 스님은 주저하는 중의 엉덩이를 뻥 걷어차며 벽력같이 외쳤다.
"빨리 움직여라! 제일 굼뜬 놈은! 눈이 그치자마자! 소 대신 쟁기를 끌게 해주마!"
순간 주저하던 스님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곳의 스님들 모두 인근 마을을 돌며 강철 쟁기를 끌어본 경험이 있었다.
마제사의 명물.
거대한 강철 쟁기를 소 대신 끄는 중!
억센 새끼줄에 피부가 터져나가고,
한겨울에도 비 오듯 쏟아지는 땀과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고통스러운 육체!
기겁한 스님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비무대를 뜯고,
천막을 걷어내며 화로와 숯, 남은 음식을 챙기기 시작했다.
마제사의 주지는 내심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바삐 움직이는 중들을 봤다.
'흐흐흐-'
이미 내일부터 산속 화전민 마을을 시작으로 봄이 올 때까지 49개 마을에서 밭갈이해줄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마제사의 중들에게 봄이 되고 씨를 뿌릴 때까지 편안히 방안에서 염불할 일은 없었다.
'중이 몸이 고된 것을 피하려 하다니! 쯧쯧쯧-'
마제사의 주지는 내심 혀를 차며 별빛 아래 환하게 빛나는 설산을 바라봤다.
그 눈은 설산에 있으나 마음속에 담긴 것은 어제 갑자기 찾아온 천문석이라는 시주였다.
마제사의 주지는 어제 일을 떠올렸다.
돈 냄새가 짙게 풍기는 시주가 왔다고 해서 희희낙락 접객당으로 달려갔더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존재가 앉아 있었다.
“...!”
처음 보는 순간.
인간이 아닌 재앙신이 지상에 강림한 줄로만 알았다.
육백(肉魄)은 이 대지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그 영과 혼에는 너무나 아득하여 그 깊이조차 알 수 없는 심연이 깃들어있다!
자신도 모르게 심연을 얼핏 보는 순간.
선연과 악연.
인과의 사슬이 어지럽게 얽혀 몸을 휘감고.
해와 별.
천기마저 흐릿해져 눈과 귀가 어두워진다.
일순 전신이 파르르 떨리고,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리던 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기사에.
드디어 '말세가 왔구나!' 부르르 떠는 순간.
탁-
눈앞에 놓인 그것!
알겠다는 듯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천문석이 척하니 내놓던 그것은.
은자였다.
하하하-
어제 일을 생각하던 마제사의 주지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산이 높을수록 골도 깊고.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은 가까운 법!
턱 하니 탁자 앞에 놓인 은자를 보는 순간!
그때서야 마제사의 주지는 아득한 심연을 품은 눈앞 인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하-
큰 웃음 한 번에 회상을 떨친 마제사의 주지는 끝없이 펼쳐진 별을 살펴 천기를 헤아렸다.
천문석이라는 시주가 달려간 설산 위에 펼쳐진 별들.
수많은 별빛이 하늘에 그려내는 천기는 그 어느 때보다 분명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마제사의 주지는 연신 불호를 되뇌며.
천문석의 평안을 기원했다.
그러나 마제사의 주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선연과 악연.
기연과 마장.
높이 자라려면 단단한 마디가 필요하고.
큰 인물이 되려면 큰 시련이 필요한 법.
천문석이란 시주의 앞에 놓인 업을 덜어내는 건.
원대륙에서 넘어온 자신 같은 가짜 중의 기원으로는 택도 없었다.
그럼에도 마제사의 주지는 기원했다.
숙박료와 두부 전골값.
그리고 일을 해준 대가로 받은 두둑한 은자.
게다가 불상에 금칠하겠다는 명목으로 황금 가면까지 크게 뚝 잘라 받았다.
정직과 신뢰의 마제사는 언제나 받은 만큼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렇기에 온 힘과 마음을 다해 기원한다.
'천지신명과 부처님! 그리고 도대체 어디에서 재밌게 놀고 계시는지 모르겠는 상(上)이시여! 천문석 시주가 좀 덜 구르도록 보살펴 주시지요.'
마제사의 주지가 일심으로 기원하는 순간.
설산 위에 끝없이 펼쳐진 별들이 대답이라도 하듯 일제히 어두워졌다.
“...”
마제사의 주지 스님.
원대륙에서 돌연 사라진 상(上)을 찾아 마제사까지 흘러들어온 바라카스 발도는 깊이 탄식했다.
"하- 역시 안 되네. 시주 난 최선을 다했네!"
그리고 벼락같은 노성을 질렀다.
"거기 화로 조심해라! 팔아서 식량으로 바꿀 거니까! 조심조심! 흠집 하나 생기지 않게 움직여라!"
---
휘이이잉-
등 뒤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북풍을 맞으며 능선을 넘는 순간.
눈앞에 설원이 나타났다.
갑자기 바람이 뚝 그친 설원.
매서운 북풍이 봉우리와 능선에 막힌 이 설원에서는 온기마저 느껴졌다.
천문석은 설원을 보는 순간 ‘여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
짧게 숨을 내쉬고 수통에 담긴 마지막 물을 마신다.
그리고 천문석은 몸을 돌렸다.
헉, 허억-
새하얀 입김을 뿜으며 뒤이어 능선을 넘어오는 주호가 보였다.
"단혈철검 주호!"
천문석이 외친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주호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천문석은 주호의 전신을 살폈다.
질질 끌리는 발과 가쁜 호흡.
내공으로 체온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지,
머리와 어깨 곳곳에 쌓인 눈과 얼음!
6시진 동안 설원을 달린 주호의 체력과 내공은 거의 바닥났다.
때가 됐다.
긴 하루를 끝내고 결말을 지을 때가!
천문석은 롱소드로 주호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제 결말을 지을 때다! 정정당당히 승부하자! 주호!"
퐁, 퐁, 퐁-
"..."
그러나 주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뭐야, 쟤 왜 저래?’
천문석이 의아해하는 순간.
주호가 시큰둥한 얼굴로 외쳤다.
"너, 안 도망가냐?"
"...아."
천문석은 이제야 깨달았다.
정정당당히 싸우자고 말하고 몇 번이나 도망쳤다.
당연히 주호는 시큰둥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번에는 진짜다. 단혈철검 주호! 진짜로 승부를 내자!"
"..."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전투가 시작되면 알게 될 일!
천문석은 롱소드를 뽑아 들고 보여주기 위한 검강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호를 향해 달렸다.
퍽, 퍽, 퍽-
무릎 높이로 쌓인 눈에 확 줄어드는 속력.
물과 건량, 구리통의 열기로 체력을 보전했지만.
추위 속 계속된 전투와 도주에 천문석의 체력도 깎여나갔다.
게다가 최대한 내력을 회복했음에도,
12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와 도주에 크게 소모된 내력.
남은 일기일원공의 내력이 많지 않았다.
천문석은 경공을 사용하지 않고 눈을 밟고 뛰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천문석을 보던 주호가 마침내 철검을 뽑아 드는 게 보였다.
그리고 철검에 생겨나는 검강!
주호는 여전히 검강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너무나 미약하다!
그리고 격돌의 순간!
천문석은 발에 내력을 심어 눈을 차올렸다.
촤아아악-
촤아아악-
이 순간 동시에 눈을 차올리는 주호!
폭발하는 눈 무더기가 서로 충돌하는 순간.
롱소드와 철검이 눈 속에서 튀어나왔다.
깡-
맑은 쇳소리가 터지고.
롱소드와 철검에 어린 검강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검강을 유지 못 하는구나!'
'이 새끼 드디어 내력이 소진됐구나!'
깡, 깡, 깡, 깡-
순간 내력이 사라진 롱소드와 철검이 얽히며 맑은 검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천문석은 순식간에 주호를 압도했다.
처음부터 검술 자체는 천문석의 우위
게다가 지금은 체력도 위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천문석의 검.
구인창!
천문석은 검으로 펼치는 구인창으로 순식간에 주호의 철검을 날려버렸다.
깡-
휘이이잉, 푹-
주호의 철검이 멀리 날아가 떨어지는 순간 그 얼굴에 생겨나는 절망!
다급히 몸을 돌려 철검을 향해 주호가 달려가는 순간.
천문석은 오른손의 롱소드로 검혼을 깨우고.
왼손의 주먹에는 일기일원공의 내력을 담았다.
기경팔맥을 뒤흔들 내가중수법!
이걸로 끝낸다!
천문석은 단숨에 설원을 박차고 뛰어 주호의 등으로 주먹을 날렸다.
후우우-
내가중수법이 실린 주먹이 주호의 등을 때리려는 순간.
탁-
주호는 번개같이 몸을 돌려 붉은 손으로 떨어지는 천문석의 주먹을 잡았다.
"드디어 잡았구나!"
피 끓는 외침이 터지고,
번쩍 붉은 섬광이 쏟아지는 주호의 눈!
주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천문석을 보며 섬뜩하게 웃었다.
이 순간 들려오는 파공음!
쒜에엑-
주호의 붉은 왼 주먹이 철퇴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
"늦었다!"
주호가 외치는 순간.
굉음이 터지고 붉은 피가 솟구쳤다.
쾅, 쿵-
그리고 동시에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비명!
으아악-
커어억-
주호는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천문석은 한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주호의 붉은 주먹이 가슴에 떨어지는 순간,
천문석은 이마로 상대의 코를 들이박아 버렸다!
초절정 고수가 펼치기에는 처절한 일수.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호는 여전히 내력을 쥐어짜네 천문석의 왼손을 움켜잡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거리!
천문석은 바로 롱소드를 검집에 박고 주먹을 휘둘렀다.
쾅-
천문석의 오른 주먹이 턱을 때리는 순간.
정강이를 후리는 주호의 발!
동시에 서로를 타격한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출수했다.
천문석의 발이 상대의 발목을 후리는 순간.
이번에는 어깨로 떨어지는 주호의 손날!
쾅-
다시 한번 서로를 동시에 타격하는 순간.
으억-
커억-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다시금 출수했다.
쾅, 쾅, 쾅-
지근 거리.
두 사람의 주먹과 발이 서로를 향해 쏟아졌다.
어느새 내력이 사라진 공격!
서로 한계에 몰린 두 사람은 상대의 공격을 몸으로 버티며 쉴 새 없이 공격을 쏟아냈다.
후두둑-
공격이 서로에게 적중하는 매 순간,
눈을 녹이는 뜨거운 피가 설원에 쏟아졌다.
어느새 두 사람 주위의 설원이 붉게 물들었을 때.
천문석의 가슴과 주호의 겨드랑이에 서로의 지법이 동시에 닿았다.
찌르르르-
단단한 가슴뼈가 으스러진 듯 울릴 때.
천문석은 이를 악물고 다시 주먹을 날렸다.
이때 깨달았다.
겨드랑이를 맞은 주호의 팔이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으아악-
주호가 악을 쓰는 순간,
천문석의 주먹이 주호의 턱에 적중했다.
쾅-
주호의 강철같은 손이 마침내 풀리고,
끈 풀린 연처럼 허공을 날아 눈 위로 쓰러지는 주호!
흐어억-
주호가 억눌린 숨을 토하며 대자로 쓰러질 때.
천문석도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며 휘청거렸다.
6시진동안 체력과 내공이 깎였는데도 막상막하로 싸운 주호!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천문석이었다.
근성!
체력이 깎이고 내공이 거의 바닥난 두 사람의 승패를 가른 건 근성이었다.
주호가 아무리 사파의 밑바닥에서 초절정까지 올라왔다고 해도.
천문석이 전생에서 현생까지 겪은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굴에서 육체의 한계를!
키즈카페에서 정신의 한계를 돌파했다!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니까! 하하하-"
천문석은 통쾌하게 웃으며 주호를 향해 발을 움직였다.
이제 마무리할 때였다.
쓰러진 주호에게 최소 일 년은 누워있을 내상을 입혀야 했다!
"...쿨럭- 이런 징글징글한···. 미친놈···."
주호가 엉망이 된 얼굴로 피를 토하며 말하는 순간.
천문석은 바닥을 보이는 일기일원공을 긁어내 권에 담으며 웃었다.
"주호. 한 일 년만 푹 쉬어라."
이때 능선 너머에서 바람을 뚫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로 여기에 마제사가 있는···.”
...
“...의심하는 게 아니라. 분명 조금 전에도 확실하다고···.”
...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지금 2시진째 산을 헤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