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계속 도망쳐놓고는! 뭔 약속을 어겨?!"
주호가 분통을 터트리는 순간.
천문석은 주호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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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상대해주마! 중간에 비무를 멈출 일은 없다!"
"네 입에서 살려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이 비무의 승패가 갈리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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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저렇게 말하기는 했다.
그러나 저건 당연히 정상적인 비무일 때 이야기 아닌가.
어떤 미친놈이 비무가 시작되고 5시진 동안 도망친단 말인가!
그것도 한겨울 설산에서!
이때 천문석이 외쳤다.
"단혈철검 주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조차 지키지 않는! '신의' 없는 자란 말인가?!"
신의 없다는 말은 강호에서 정사마를 가리지 않는 최악의 평가!
주호는 머리끝까지 열기가 뻗치는 걸 느꼈다.
저 미친 새끼는 지금 5시진째 설원 위를 도망쳐다니며,
퐁, 퐁, 퐁-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검으로 도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을 싸서 굳힌 눈 뭉치까지 던졌다!!
그런 놈이 자신에게 ‘신의’가 없다고?!
“야, 이 새끼야! 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되지! 너 아까 눈 뭉치! 기억 안 나냐!”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천문석.
그러나 다음 순간 천문석은 뻔뻔하게 반문했다.
"눈 뭉치 뭐? 눈 뭉치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
"뭐? 야, 이 쌍···!"
분통을 터트리려던 주호는 깨달았다.
“...!”
자신이 그 눈 뭉치에 맞았다는 게 강호에 알려지는 순간.
단혈철검 주호가 초절정 고수,
강호에서 빛나는 찬란한 별, 천하 18성의 위치에 올랐다는 사실은 모두 묻힌다.
강호 전체에 ...맞은 주호라고 소문이 퍼질 것이다!
“...”
주호는 어지간한 악명은 신경도 안 쓰는 사파 무사다.
그러나 우습게 보이는 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
이때 들려오는 천문석의 얄미운 목소리와 웃음소리.
"뭐야? 아까 눈 뭉치에 뭐가 묻었었어? 궁금한데 말해주면 안 되냐? 풉-"
"...죽인다. ...너 이 새끼. 내가 너만은 반드시 죽인다!"
주호는 비무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지웠다.
살인멸구!
저놈과 자신 둘 중에 하나만 산에서 내려간다!
“만 갈래로 찢어주마!”
주호는 내력을 끌어올려 천문석을 뒤쫓았고.
천문석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다시 달렸다.
천문석과 주호는 설원을 지나 설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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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석과 주호가 설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마제사 비무장에서 기다리던 무림 명숙들과 구경꾼들은 어이없어하고 있었다.
단혈철검 주호와 금권 대협이 비무대가 있는 마제사에서 사라진 지 벌써 5시진이 넘게 흘렀다!
5시진!
어지간한 무림 대회도 끝났을 시간이다.
하늘에 달이 뜨고 비무장에 환한 등이 걸렸으나.
두 사람은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철검장 무사들은 여전히 구경꾼들이 비무장을 벗어나는 걸 통제하고 있었다.
이때 금권 대협의 초식을 곱씹던 무림 명숙들의 눈이 마주쳤다.
"..."
"..."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몸을 일으키는 명숙들.
"이제 나는 돌아가 보겠네."
구경꾼들과 철검장에서 초대한 명숙들을 같이 대우할 수는 없는 일.
철검장의 주철 총관이 앞으로 나서서 정중히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요. 곧 장주님께서 돌아오실 겁니다."
그러나 무림 명숙은 단호히 대답했다.
"사람을 초대하고. 주인을 자리를 비우다니! 이런 무례가 어디 있는가!"
무림 명숙은 기세를 일으키며 정문을 향해 걸어갔고.
명분에서 밀린 철검장의 무사들은 감히 그 앞을 막지 못했다.
한 명이 움직이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다른 무림 명숙들도 몸을 일으키고,
그 뒤를 기다림에 지친 구경꾼들이 뒤따랐다.
우르르 마제사의 정문 밖으로 쏟아져 나가는 손님들과 구경꾼들.
마제사의 비무장은 순식간에 텅 비어갔다.
“총관님 어떻게 할까요?”
철검장 무사 조장들의 물음에,
주철 총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명령했다.
“반은 이곳에 남고. 반은 흩어져서 장주님을 찾는다! 이곳의 손님이 모두 빠지면 남은 반도 설산으로 움직인다.”
곧 철검장의 무사 중 50여 명이 마제사를 떠나 설산으로 달려갔다.
이제 비무장에는 철검장의 무사 50여 명과 여전히 삼엄한 기세를 뿌리는 극음도의 무사들.
그리고 열 명이 채 안 될 무림 명숙과 구경꾼들과 장가장의 총관 장일이 있었다.
장일 총관은 땅문서와 권리문서가 담긴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담장 너머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설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문석이 주호를 쫓아 달려간 설산을.
"아니···. 왜 아직도 안 와."
장일 총관이 걱정스레 말하는 순간.
장가장의 무사가 다가와 물었다.
"철검장 주철 총관이 직접 움직였습니다. 사찰밖에 대기 중인 무사들과 빈객분들을 움직일까요?"
장일 총관은 잠시 비어가는 비무장을 살피며 고민했다.
철권 대협이 만들어낸 장가장.
장가장은 무림맹을 등에 업은 강호의 장원이었으나.
그동안 강호의 은원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대외활동을 극도로 자제해왔다.
장가장의 진정한 목적이 헌터들의 각성이기 때문이다.
각성 스팟인 무림 던전 내 안정적인 거점 역할을 하는 장가장에 불필요한 이목이 쏠려서는 안 됐다.
그래서 그동안 웅크리고 있었던 건데···.
천문석.
철권 대협의 철패를 가진 천문석이 비무를 벌이며 일이 꼬였다.
단혈철검 주호와 함께 사라진 지 5시진.
그러나 여전히 천문석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장일은 문득 불안해졌다.
천문석이 혹시라도 단혈철검 주호를 이긴다면?
무림 던전은 그 날로 끝장이다!
던전은 클리어되고,
이세계로 이어지는 무림 던전 입구는 24시간 안에 완전히 닫힌다!
이번 기수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무림 던전이 사라지는 거다.
그렇다고 단혈철검 주호가 이겨도 문제다.
주호는 사자련에 속한 철검장의 장주.
철권 대협의 이름을 빌려 비무첩을 보낸 천문석이 진다면 장가장의 세력은 크게 위축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력이 위축돼도 장원만 지킬 수 있으면 각성 헌터를 키워낼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사파 무인 주호의 손에 천문석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단 한 명의 피해도 없이 무공 각성자, 각성 헌터를 키워내던 무림 던전에서 최초의 인명피해가 발생하는 거다.
그것도 철권 대협의 철패를 가져온 사람이 죽는다.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장일 총관이 다시금 후회할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일. 뭘 그리 고민하냐?"
"...!"
깜짝 놀란 장일이 번쩍 고개를 드는 순간!
눈앞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있었다.
무복 위에 두꺼운 호복을 입은 여무사.
위연화!
이번 기수 예비 각성자를 인솔해 들어온 인솔자 위연화였다.
"위연화! 네가 여기는 어떻게!?"
"장원에 없길래. 물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위연화는 잠시 장일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비무를 벌였다고? 그것도 단혈철검 주호랑? 내일이 7일째인데 장원을 비운 거야?"
위연화가 묻는 순간.
장일은 깜짝 놀랐다.
7일!
내일이 이번 회차 기수들이 무림 던전에서 나가는 마지막 날이었다!
그걸 잊고 있었다니!
장일이 경악한 순간,
위연화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번 기수는 어떠냐? 몇 명이나 각성했어?"
"...!"
다시 한번 말문이 막힌 장일.
갑자기 터진 비무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이것도 잊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아무도 각성몽을 꾸지 못했다.
절박한 예비 각성자들에게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말하고 잊고 있었다니!
이 순간 장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천문석을 찾고 예비 각성자들도 확인해야 했다.
장일은 장가장의 무사에게 지시했다.
"흔적을 쫓을 준비를 하고 빈객분들과 무사들을 준비시켜라. 바로 쫓는다!"
그리고 위연화를 보는 장일.
"위연화. 바로 장가장으로 가서 비고에서 영약을 꺼내라. 예비 각성자들에게 영약을 먹여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비고에서 영약을 꺼내라고?"
장일은 의아해하는 위연화에게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이번 기수 한 명도 각성을 못 했다. 오늘 밤이 마지막 기회다. 네가 가서 영약을 먹이고 진기도인을 해줘!"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위연화가 반문하는 순간 장일은 위연화에게 보따리를 건네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거 비고 깊숙이 넣어라. 장가장의 땅문서와 권리증서다."
"뭐!? 아니 이게 왜 여기 있어?!"
위연화가 기겁해서 보따리를 움켜잡는 순간.
장일은 어느새 마제사의 정문 밖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부탁한다! 위연화!"
위연화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움직였다.
의문이 많았지만, 무림 던전의 존재의의는 각성 헌터 육성!
무림 던전의 마지막 하루.
바로 영약을 먹이고 진기도인을 시켜 어떻게든 최대한 각성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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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휑해진 비무장.
아직 남아있던 무림 명숙과 구경꾼, 장가장의 무사들이 떠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극음도의 무사들은 여전히 바짝 긴장한 채 천막을 지켰다.
이 천막 안에서 극음도 이열이 초절정의 벽을 넘고 있었다.
비무장에서 남의 비무를 보다가 갑자기 벽을 넘는 기사(奇事)!
"..."
극음도의 무사들은 굳은 얼굴로 마른침을 삼키며 굳게 닫힌 천막을 살폈다.
두꺼운 천 너머로도 엄정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도 18문의 일문,
극음도에서 또 한 명의 초절정의 고수가 태어나다니!
이로써 극음도에는 두 명의 초절정의 무인이 존재한다.
두 명의 초절정의 고수라면.
숙적 화염도의 일문을 압도한다!
그리고 돌연 튀어나와 우연히 마도 18문의 지존에 오른 그자도 처리할 수 있으리라!
극음도의 무사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
천막 너머에서 전해지던 기운이 변했다.
"...!"
극음도의 무사들의 눈에 기대가 어린 순간.
팟-
굳게 닫힌 천막이 열리고 극음도 이열이 성큼 걸어 나왔다.
얼굴에 가득하던 병색은 씻은 듯 사라지고.
두 눈에는 태양처럼 빛나는 정기가 어렸다.
그리고 손에 들린 부러진 극음도에 서린 빛.
검강!
순간 극음도의 무사들은 일제히 부복하며 외쳤다.
"대공자! 대공을 성취하신 것을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
사방에서 쏟아지는 찬탄과 존경의 눈빛.
"..."
그러나 이열은 아무 대답 없이 달빛 아래 펼쳐진 설산을 바라봤다.
이때 한 무사가 달려와 검은 상자를 들어 올렸다.
"본가에서 가져온 극음도입니다. 부러진 도를 교체하시지요."
“됐다.”
이열은 부러진 극음도를 눈앞에 들어 올렸다.
검신에 새겨진 장난스러운 필체의 문장.
'관음을 보았는가?'
이 문장을 적은 이세기를 생각하는 순간,
이열의 전신은 다시 한번 격동으로 떨렸다.
천하에 누가 있어 초절정에 닿는 화두를 한 줄의 문장으로 적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세기!’
이제야 이열은 알았다.
강호를 헤매 찾아낸 염마도의 비급,
보는 순간 홀려버린 극음도의 정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승의 무공, 지고한 무리는 이미 가지고 있었다.
수십 년 일심으로 익혔으나 단 한 번도 그 속에 담긴 진정한 뜻을 보지 못했던 극음도.
그 안에 자신이 벽을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담겨 있었다.
'관음.'
그리고 화두를 던지고 그 화두를 넘어 비상하게 해준 보물.
관음을 보게 해준 이 부러진 극음도야말로 천하에 다시 없을 보물이었다.
이 순간 이열은 마공서 염마도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파르르르-
마공서 염마도가 허공에서 스스로 펼쳐지는 순간.
이열은 일 검에 마공서를 베어 버렸다.
파스스슥-
검강의 빛에 일순간 재가 되어 사라지는 마공서!
"대공자!"
"어째서! 간신히 찾은 염마도를!"
극음도의 무사들이 기겁하는 순간.
이열은 부러진 극음도로 설산을 가리키며 외쳤다.
"설산으로 간다!"
이세기!
그를 만나야 했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