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마제사를 벗어난 깊은 산속.
휘이이잉-
점점 거세지는 바람 속을 달리는 주호와 천문석이 달리고 있었다.
천문석은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앞서 달리는 주호를 봤다.
'아니,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마제사를 떠난 지 이미 한 시진, 2시간가량이 지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달리고 있는 주호.
처음 대화했을 때도 느낀 거지만.
단혈철검 주호 이 녀석 사파 인물답지 않게 아주 치밀했다.
관음천수도를 뽑아먹기 위해 인적없는 곳으로 갈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2시간 동안 달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런 미친놈!'
그러나 인적 없는 곳으로 가는 건 천문석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
천문석은 회심의 미소를 띤 채 주호를 쫓아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 앞에는 눈이 단단히 얼어붙은 숲속의 평지가 나타났다.
화전을 만들려던 곳인지 듬성듬성 잘려나간 나무 둥치와 부서진 나무 조각이 흩어진 얼어붙은 평지.
주호는 이곳 평지에 멈춰선 채 외쳤다.
“금권. 여기서 승부를 가리는 게 어떻겠는가?”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확인했다.
인적없는 설산,
숲속의 평지.
주호와 일대일로 마주한 상황.
딱 좋았다.
관음천수도로 주호를 낚으며 생각했던 그대로의 장소다!
천문석은 바로 외쳤다.
“좋습니다! 주 대협. 여기서 승부를 가립시다!”
주호는 철검을 천천히 뽑으며 물었다.
"금권 대협. 그대의 이름과 사문을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지금껏 묻지 않은 이름과 사문을 이제야 묻다니.
천문석은 주호의 생각을 바로 알아챘다.
'혹시 후환이 있을지 모르니 확인하려는 구나!'
천문석은 일인 전승의 신비 문파라고 하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지금은 이름을 들어도 모르겠지만,
조만간 천하의 무림인 모두가 알게 될 이름.
천검 이세기가 천하 18성을 깨부수고,
천하 십절의 검절로 우뚝 올라서려는 그때 강호를 떨어 울릴 이름.
눈앞의 주호가 내상이 나은 후에도 후환에 전전긍긍하며 대외활동을 딱 끊을 이름.
그 이름이 생각났다!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름과 사문을 말했다.
"이름은 천문석. 사문은 '하늘에 묻는다.'입니다."
천문석은 무림 던전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진실을 말하며 어쩐지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름이 천문석. 사문이 하늘에 묻는다?"
천문석의 예상대로 주호는 고개만 갸웃할 뿐 자신과 마도 18문의 새로운 천마를 연결짓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지금 새로운 천마에 대해 강호에 알려진 사실은 사문의 이름뿐이다.
관음천수도에 담긴 아득한 무리를 펼쳤지만,
그 무리를 펼치는 자신의 내공은 이성의 일기일원공이다.
천마신공을 펼치는 마도 지존 천마와는 격이 완전히 다르다.
문득 전생의 자신, 전생 천마가 떠올랐다.
줘도 안 익힐 천마신공,
시켜줘도 사양할 천마.
그러나 전생 천마 천문석은 수많은 사건·사고를 겪으며 엄청나게 강해졌다.
불세출의 천재 이세기 조차 전생 천마 앞에서는 빛이 바랠 정도로.
주호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 ‘천문석’이란 이름 석 자가 천하를 진동시킬 때에야 자신과 천마를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일인은 아닌지, 혹시나 동문 사형제는 아닐지 전전긍긍 앓아눕게 되리라!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그러나 지금의 주호는 그냥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철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 승부가 바로 시작됐다.
---
훙-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강검!
주호는 폭풍 같은 기세를 담아 철검을 뿌렸다.
쾅-
주호의 철검과 천문석의 롱소드가 맞부딪히는 순간.
검신을 타고 퍼져나가는 경력!
파아앙-
폭발하는 경력으로 대지에 쌓인 눈이 흩날리는 순간에도 주호의 강검은 정신없이 쏟아졌다.
쾅, 쾅, 쾅-
천문석은 쉴 새 없이 관음천수도의 초식을 펼쳐 간신히 주호의 검을 피하고 막아냈다.
거센 폭풍처럼 몰아치는 강검의 맥을 끊는 관음천수도!
아득한 무리가 담긴 관음천수도의 일 초, 일 초가 펼쳐져.
주호의 강검을 누그러트리고 흘리고 다시 되돌려 보내고 있었다.
"...!"
관음천수도의 초식에 순식간에 몰입하는 주호!
주호의 탐욕스러운 눈이 관음천수도의 일 초 일 초를 탐닉했다.
이 순간 천문석은 눈을 빛냈다.
처음 검을 맞댄 순간,
천문석은 주호의 생각을 알아챘다.
폭풍 같은 강검을 뿌리는 것 같지만,
실상 주호의 강검에는 살기가 없었다.
주호는 처음부터 비무가 아닌 관음천수도의 초식을 훔칠 생각이었다.
하-
천문석은 내심 웃음을 터트리며 주호가 원하는 대로 관음천수도의 절초를 잇달아 펼쳐냈다.
무겁고 느리게 펼쳐지나,
쾌검보다 빠르게 공간을 점한다.
깃털처럼 부드럽게 떨어지나,
검이 맞닿는 순간 만근거력을 쏟아낸다.
문득 검을 펼쳐 일 점을 찍는 순간.
한 방울의 물이 개울이 되고,
개울이 거센 급류를 이룬다.
그리고 거센 급류가 폭포가 되어 대지를 깎아낸다!
콰아앙-
도도하게 흐르는 관음천수도의 일 초 일 초!
단혈철검 주호는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 검은 형식적으로 휘두르며 초식을 훔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관음천수도의 정수는 초식을 훔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현묘한 초식도 결국은 방편!
강을 건넌 후에는 버리고 훌쩍 떠나갈 배에 지나지 않는다.
관음천수도의 정수는 하루하루 정성을 다해 쌓아 올린 기반 위에 벼락 치듯 떨어져 내리는 깨달음이 있어야 얻을 수 있었다.
돈오(頓悟)!
관음을 보는 깨달음이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관음천수도.
하늘과 땅.
천지 사물 어디에나 관음은 있다.
그러나 '관음'의 향이 짙게 서려 있는 극음도를 수십 년 동안 익힌 이열조차 보지 못한 게 '관음'이었다.
관음천수도는 사자련의 주호가 훔쳐 배울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순간 천문석의 시선이 주호의 얼굴로 향했다.
희열로 가득 찬 얼굴,
욕망에 충혈된 붉은 눈!
주호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관음천수도의 겉모습, 현묘한 초식에 홀려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화려한 꽃잎에 홀려 나무를 잊었구나!'
천문석은 이제 때가 됐음을 깨달았다.
검강!
파천의 힘에 일기일원공을 실어 주호의 기경팔맥을 뒤집어 놓는다!
3년!
주호가 3년만 자리보전하게 하면 충분하다!
이 순간 천문석은 펄쩍, 뒤로 뛰며 감탄성을 터트렸다.
"과연 단혈철검 주 대협! 명불허전입니다!"
주호는 순간적으로 얼굴색을 바꾸고 천문석을 칭찬했다.
"금권 대협! 그대의 검도 훌륭하다! 그 젊은 나이에 나와 막상막하로 싸우다니! 하-"
'막상막하? 음흉하기는!'
주호는 천문석의 밑천을 긁어내려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내심 웃으며 천천히 롱소드를 들어 올렸다.
"주 대협께 제 비장의 절초! 모든 정수가 담긴 검을 펼쳐 보이겠습니다!"
순간 주호의 탐욕스러운 눈이 천문석의 검에 꽂혔다.
"좋다! 모든 것을 펼쳐봐라! 나 주호! 반격하지 않고 금권 대협 그대의 검을 받아주겠다!"
주호가 외치는 순간.
가볍게 포권하는 천문석.
주호에게 닿는 데 필요한 간격은 단지 세 걸음!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을 끌어올리며 생사팔문의 보법을 밟았다.
첫걸음에 하늘 고래의 심상을 일으키고!
퐁, 퐁, 퐁-
두 걸음에 창천무흔, 천검의 검혼을 깨운다!
휘이이잉-
그리고 마지막 세 걸음.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롱소드가 검명을 토하는 순간.
우우우웅-
25자루 검의 잔상이 생겨났다.
천천히 대기를 가르며 그 수를 늘리는 검의 잔상!
푸른 겨울 하늘에 섬뜩한 예기를 흘리는 수천의 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
주호의 부릅떠진 눈이 롱소드에 못 박히고
육감이 모두 열려 천문석의 숨결마저 훔쳐낸다.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주호!
이 순간 천문석은 외쳤다.
“주 대협. 제 모든 것이 담긴 절초입니다!”
그리고 천 개의 검이 떨어지는 순간!
천문석의 두 손이 번개같이 맞부딪혔다.
콰아아앙-
폭발하는 빛과 굉음!
천문석의 굉천수가 무아지경에 빠진 주호의 눈앞에서 터졌다!
---
띠이이이-
돌연한 폭음에 사라진 소리!
으아아악-
갑자기 터진 섬광에 새하얗게 타들어 간 시야!
초절정 고수의 반응속도는 그야말로 찰나.
바로 눈앞에서 화살이 쏘아져도 피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무공을 훔쳐내기 위해 육감을 열고 무아지경에 빠져든 게 패착이 됐다.
천문석이 노렸던 대로!
불의의 일격을 맞은 주호는 굉천수의 섬광과 폭음에 일순 시력과 청력을 상실했다.
"금권!"
주호가 분노한 외침을 토하는 순간,
초절정에 달한 육감이 경고를 보내왔다.
'죽는다!'
팟-
순간 주호는 땅을 밟고 뒤로 뛰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육감의 경고!
'체면을 차릴 때가 아니다!'
주호는 번개같이 뒤로 뛰며 철검에 모든 내력을 쏟아부었다!
콰르르릉-
광폭한 강기가 철검에서 쏟아지고,
곧 유형화된 강기, 검강이 생겨났다!
이 순간 머리와 발, 가슴과 등.
천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살기!
주호는 자신의 성명 절기 단혈십자검을 펼쳤다.
섬뜩한 열십자 검강이 머리와 발, 앞과 뒤로 뻗어 나가는 순간.
연이어 터지는 폭음.
쾅, 쾅, 쾅-
그리고 폭음을 지우는 생경한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퐁, 퐁, 퐁-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탄식.
"아니···. 무림에 초절정이 뭐 이리 흔해···."
주호는 탄식이 들려오는 곳으로 검강이 자라난 철검을 세웠다.
파스스스-
검강이 만들어낸 정순한 내력의 흐름에 순식간에 회복되는 시각과 청각!
황금 가면이 보이는 순간.
분노한 주호는 단숨에 들이치려고 했다.
그러나 돌처럼 굳어지는 주호.
주호는 황금 가면을 쓴 상대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봤다.
금권 대협.
천문석의 검에 생겨난 강기의 빛.
만져질 듯 선명한 유형화된 강기.
주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강!
금권 대협 천문석은 초절정의 고수였다!
---
"..."
천문석은 어이가 없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 번의 기회!
관음천수도에 완전히 몰입한 주호에게 굉천수로 눈뽕을 먹이고,
일기일원공이 실린 검강으로 내상을 입히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천문석의 시선이 단혈철검 주호의 손에 들린 철검으로 향했다.
만져질 듯 선명한 유형화된 강기, 검강!
단혈철검 주호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식.
"아니···. 초절정이 뭐 이리 흔해···."
무림 던전의 파워인플레이션이 아주 심각했다.
이세기의 검혼을 깨우며 무림 던전 안에서 위기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절정고수 이열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위기다.
게다가 이번에는 절정이 아닌 초절정의 고수!
이 넓은 천하에도 단지 18명,
그래서 따로 천하 18성의 고수라고 부르는 게 초절정의 고수 아닌가?!
'그런데 초절정이 여기서 왜 나와!?'
천문석은 어이없어하는 와중에도 주호를 살폈다.
경악한 얼굴,
엉거주춤 선 몸,
놀라 부릅뜬 두 눈.
주호의 눈은 자신의 롱소드에 맺힌 검강에 못 박혀있다.
단혈철검 주호도 초절정 고수를 만났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호의 철검에 맺힌 타오르는 불같이 맹렬한 검강!
'뭐야? 내력을 왜 저렇게 낭비해?'
의문을 품는 순간,
천문석은 감을 잡았다!
'주호, 이 녀석! 초절정에 오른 지 얼마 안 됐구나!'
초절정에 오르면 적어도 일 년은 자신을 돌아보며 경지를 수습해야 한다.
그런데 검강을 다루는 모습을 보니 경지를 수습하지도 않고 바로 비무를 받아들였다!
주호의 생각이 바로 짐작됐다.
'역시 사파 무인! 초절정에 오르자마자 공명심에 빠져! 천하 18성에 올랐다고 천하에 알리려 했구나!'
지금 주호는 검강을 사용하는 승부에는 초보!
'이거 잘하면···. 계획대로 내상을 입힐 수도 있겠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는 순간,
천문석은 번개같이 돌진하며 외쳤다.
"주호! 승부를 가리자!"
천문석과 주호의 검강이 격돌했다.
열십자로 얽히는 검강과 검강!
검강이 생겨난 순간 몇 배로 정순해진 내공의 흐름이 검에 실렸다!
퐁, 퐁, 퐁-
파스스슥-
강기의 빛이 폭발하고,
살기 어린 검이 서로를 노린다.
갑자기 시작된 승부,
게다가 주호는 검강을 사용하는 초절정의 고수와의 대전 경험이 없었다.
천문석은 수세에 몰린 주호를 폭풍처럼 몰아쳤다.
깡, 깡, 깡-
천문석의 검이 떨어질 때마다.
주호는 다급히 검을 막기에 급급했다.
일방적인 공격!
순식간에 십여 초의 격전이 이어지고,
점점 위축되고 패색이 짙어지는 주호.
주호는 깨달았다.
검초의 현묘함.
내공의 정순함.
그리고 주도권과 기세까지.
모두 상대가 우위!
'이대로는 진다!'
주호가 패배를 직감하는 순간.
천문석도 깨달았다.
롱소드로 펼치는 굉천수와 구인창. 초식은 우세.
검강의 흐름을 타고 정순해진 일기일원공. 내력의 질도 우세.
주도권을 잡았고 기세마저 가져왔다!
그러나 내공이 달렸다.
문득 천문석의 시선이 주호의 철검에 닿았다.
파스스슥-
여전히 불타오르는 유형화된 검강.
주호는 내력을 물 쓰듯 낭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주호의 내력보다,
자신의 일기일원공이 먼저 마르게 생겼다!
천문석은 직감했다.
‘이대로라면 30합 후에는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