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장일은 천문석의 심각한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던전 클리어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설령 비무를 치른다고 하여도 단혈철검 주호는 천하 18성···."
"주호가 천하 18성의 고수입니까?"
천문석이 깜짝 놀라자,
웃으며 고개를 젓는 장일.
"천하 18성 바로 아래. 절정 고수입니다. 강기를 만들어내는 절정 고수와 강호 초출 젊은 청년이 비무를 벌여 청년이 승리한 다라···."
하하하-
장일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무협 소설에서나 나오는 일이죠. 이곳 무림 던전에서 절정은 진짜 엄청난 경지입니다."
"..."
장일의 단정에도 어째선지 불안감이 더 커졌다.
당장 자신도 절정 고수 극음도 이열을 꺾었다.
이때 장일이 천문석의 표정을 보며 설명을 이었다.
"절정. 강기를 만들어내는 경지는 정말 대단 경지입니다. 강기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강기뿐!"
"..."
"젊은 청년이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고 해도 20대의 나이에 절정의 경지에 달했을 리는 없습니다. 당연히 절정 고수 주호를 이길 수도 없죠."
'불세출의 천재!'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천문석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불세출의 천재라 불릴 한 무인의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이세기!'
이 순간 이세기가 처음 강호에 이름을 떨쳤던 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자신이 마도 18문의 천마가 된 그 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강호에 등장한 이세기.
이세기는 푸른 호수에서 검은 뱀을 잡고,
뒤이어 사자련의 고수와 싸워 이긴다.
강호 초출, 20대의 청년이 사자련의 고수.
그것도 강기를 사용하는 절정 고수를 이긴 대사건!
이 사건으로 이세기의 이름은 강호를 진동시킨다.
순간 전생의 기억과 지금 상황이 하나하나 겹쳐졌다.
-전생의 천문석이 천마가 된 마도 쟁투가 일어난 시기.
-청해 호수에서의 추격전 끝에 여량위와 흑사회(검은 뱀)가 도망쳤다.
-그리고 검이 들어간 별호를 가지고 한 글자 이름을 가진 사자련의 절정 고수와 비무를 벌인다.
순간 거대한 요철이 맞추어지듯이 조각난 사실들이 하나로 맞물린다.
‘단혈철검. 주호!’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일에게 한가지 질문을 했다.
"혹시 단혈철검 주호에게 비무를 청했다는 청년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장일의 얼굴에 생겨나는 웃음.
"이게 특이하더군요. 아침에 이야기했던 뒷골목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는 것 기억하시죠? 무사들이 정보를 모아 왔는데···. 이 청년 그 헛소문에 나오는 사람과 이름이 같더군요. 아무래도 동일인물 같습니다."
더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천문석은 굳은 얼굴로 이름을 말했다.
"그 청년 이름이 '이세기' 입니까?"
장일은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어떻게 아셨나요? 저도 방금 들은 이야기인데?"
"..."
천문석은 깨달았다.
이세기의 첫 행보.
푸른 호수에서 검은 뱀을 잡고,
사자련의 고수와 대결을 벌여 이긴다.
청해 호수의 검은 뱀, 흑사회는 이미 사라졌다.
이제 사자련의 고수 단혈철검 주호와의 비무가 이뤄지려 하고 있었다.
이 비무에서 모두의 예상과 달리 사자련의 절정 고수 단혈철검 주호는 패배한다.
당연했다.
단혈철검 주호가 강기를 사용하는 절정 고수라지만 상대는 이세기다.
이세기.
천하 18성의 대부분을 꺾고 무림에 천하 십절의 시대를 여는 불세출의 천재!
천검(天劍)이자,
천하십절의 검절(劍絶).
그리고 훗날의 무림 맹주.
이세기!
무림 던전 4일째 오후.
천문석이 적당히 빈둥거리며 남궁세가 망나니 소가주처럼 은자를 뿌리다가 던전을 나가겠다고 결심한 이 날.
이세기의 강호 초출 이벤트가 시작됐다.
이세기의 목표는 무림 던전의 보스 단혈철검 주호.
[천검 이세기 vs 단혈철검 주호]
무림 던전 자체가 사라질 위기가 발생했다!
천문석은 탄식했다.
'하- 이세기 이 새끼! 왜 하필 주호를!'
---
분명 마가 낀 거다.
한 사건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일이 터진단 말인가!?
그러나 탄식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수습책을 생각할 때!
천문석은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장일 총관에게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천문석의 말이 끝나자 장일 총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 이세기란 청년과 단혈철검 주호의 비무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히 알아봐 달라고요?"
"네. 시간, 장소. 참관인 모든걸 알아야 합니다. 아, 가능하면 제가 참관인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네? 참관인으로 말인가요? 설령 비무가 벌어져도 승부는 금세 끝나서 볼만한 게 없으실 텐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장일 총관.
장일 총관은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장일 총관뿐만이 아니다.
비무첩을 받은 사자련의 단혈철검 주호도 심각성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강호 초출 청년의 비무를 받아들였다가,
자기 나이 반도 안 되는 이세기한테 깨지지!
순간 치솟는 분노.
단혈철검 주호 이 멍청한 녀석!
사자련에서 잔뼈가 굵은 절정 고수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비무를 받아들이다니!
원래 사파 고수는 험난한 강호에서 몇 배는 더 조심해야 하는 법!
멍청한 주호 때문에 자신이 구르게 생겼다!
천문석은 장일 총관에게 몇 번이나 부탁했고.
장일 총관은 의아한 얼굴로 결국 최선을 다해서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장주실에 혼자 남은 천문석은 방안을 걸으며 머리를 굴렸다.
무림 던전이 클리어될 위기상황!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이세기가 패배하는 것!
그러나 이세기가 괜히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렸던 게 아니다.
창천문.
구파일방은커녕 강호 50대 문파에 간당간당 걸릴 창천문의 창천검을 다른 차원의 무공으로 끌어올린 게 이세기다.
창천문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 고수, 천검 이세기.
천문석은 전생에 이세기와 처음 겨뤘을 때부터 역산해 지금 이세기의 수준을 가늠했다.
아무리 낮춰 생각해도 지금의 이세기는 초절정은 넘겼을 거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탄식.
"하- 20대에 초절정이라니! 이런 미친놈···!"
자신처럼 검강 롱소드를 사용한 편법이 아닌 우직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이세기라면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속도로 초절정의 경지에 도달했을 거다.
그리고 이세기가 초절정이라면,
단혈철검 주호가 이길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이세기의 창천검은 상대하기가 지극히 까다롭다.
드높은 창공을 달리는 흔적 없는 바람.
뭔가 싸한 바람을 느꼈을 때는 이미 검에 베인 후!
이세기가 주호와 같은 절정의 경지라고 해도,
단혈철검 주호가 승리할 가능성은 채 1할이 안 된다.
검강을 쓸 필요도 없다.
창천무흔!
이 종적 없는 검술만으로도 이세기는 주호를 압도한다.
하-
천문석은 탄식을 흘리며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내가 이세기와 먼저 싸워서 주호와 대결하지 못하게 한다면?
천문석은 이세기를 초절정의 초입이라고 가정하고 스스로와 견주어 봤다.
삑삑이 검강 롱소드를 쓴다면?
강기는 내력의 흐름을 보다 강하고 정순하게 만든다.
유형화된 강기, 검강이라면 이성의 일기일원공만으로도 어중간한 초절정의 고수는 순간적으로 압도할 것이다.
자신이 절정 고수 극음도 이열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이긴 것처럼.
그러나 상대는 천검 이세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성의 일기일원공,
삑삑이 검강 롱소드를 사용하는 편법으로는 이세기를 상대로 30합도 버틸 수가 없다.
“...아 빌어먹을!”
30합 버티는 게 고작 이라니!
지금 생각하니 이세기야말로 진정한 사기캐였다.
이때 천문석은 문득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것에는 결국 끝이 있는 법.
무림 던전이 클리어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이 또한 운명 아닐까?
그러나 생각과 동시에 오전에 본 예비 각성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림 던전에 들어와 어떻게든 각성하기 위해 땀 흘리며 노력하는 6명의 예비 각성자들.
그리고 뒤이어 장철 헌터의 모습이 생각난다.
장철 헌터는 이곳 무림 던전에 장가장이라는 기반을 만들고도 자신의 권리를 내놓았다.
더 많은 각성 헌터가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던전 밖 게이트 너머 한국은 안정됐지만,
이것은 헌터들의 피와 생명으로 이룬 안정이다.
여전히 각성 헌터의 수는 모자랐다.
지금까지 이곳 무림 던전에서 많은 사람이 각성했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각성하고 헌터가 될 것이다.
일주일에 7명 일 년 52주면 364명.
이 중에 60% 정도 각성한다면 한 해에 200여 명의 각성 헌터가 이 무림 던전을 통해 태어난다.
그리고 새롭게 각성 헌터가 된 이들은 선배 헌터가 그러했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수많은 사람을 구할 것이다.
어떻게든 이 무림 던전을 지켜야 했다!
"하- 어떻게 하지!?"
자신도 모르게 말한 순간,
한가지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천문석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대적인 강함!
1. 주호 <<< 이세기
2. 천문석 << 이세기
3. 천문석 > 주호
천문석은 깨달았다.
이세기를 이길 필요는 없다.
어차피 던전 클리어 조건, 던전 보스는 단혈철검 주호다!
사기캐 이세기를 빼버리자 해답이 보였다.
'즉 단혈철검 주호가 어떻게든 패하지만 않으면 된다! 패하지만 않으면!'
"...!"
천문석은 즉각 장일 총관을 불러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신 건가요!?"
얼굴이 기괴하게 변한 장일 총관.
장일은 천문석을 미친놈 보듯이 보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진심이십니까?! 단혈철검 주호에게 뭘 보내라고요?!"
천문석은 장철 헌터에게 받은 철패를 내밀며 진지하게 말했다.
"철권 대협의 장가장 이름으로 단혈철검 주호에게 비무첩을 보내주십시오. 무조건 이세기보다 빠르게 늦어도 같은 날에는 비무를 치러야 합니다."
"아니! 주호와 비무할 사람이 없는데···."
"그 비무에 나갈 사람은···."
장주실을 돌아보자 벽에 걸린 가면이 보였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는 황금 가면.
“금면... 아니 금권 대협이라고 해주세요.”
"..."
장일 총관이 말문이 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천문석은 한 가지 부탁을 더 했다.
"그리고 주변 지역 지도랑 건량과 물을 담은 배낭을 준비해 주십시오."
"..."
장일 총관은 천문석을 설득하려 했으나,
천문석에게는 철권 대협의 철패가 있었다.
결국, 모든 건 천문석의 뜻대로 됐다.
홀로 장주실에 남은 천문석.
천문석은 황금 가면을 손에 든 채 계획을 가다듬었다.
천문석의 계획은 간단했다.
1. 이세기보다 먼저 단혈철검 주호와 비무를 벌인다.
2. 주호에게 이세기와의 비무를 포기할 정도의 상처를 입히고 나는 승부를 포기한다.
인위적인 무승부,
양패구상을 만드는 것!
혹시 이게 안 될 것 같은 경우에는.
이세기가 비무를 포기하고 떠날 때까지,
던전 보스 단혈철검 주호를 끌고 도망 다닌다.
말대 안되는 계획.
그러나 천문석에게는 이걸 가능하게 할 물건이 있었다!
천문석의 시선이 검대에 걸린 롱소드로 향했다.
'삑삑이 검강 롱소드!'
이미 극음도 이열과의 결전에서 드러났듯이.
신성한 비무에서 '퐁, 퐁, 퐁-' 거리는 미친놈을 참을 무인은 없었다.
이 롱소드로 퐁, 퐁, 퐁- 거리는 순간!
극도로 분노한 단혈철검 주호는 어그로가 끌린 몬스터처럼 천문석을 쫓아올 것이다!
분노한 주호는 단숨에 천문석을 요절내고 싶겠지만.
단혈철검 주호는 절정.
이 롱소드를 사용하는 천문석은 초절정이다.
[천문석 > 주호]
천문석과 주호.
서로 간의 우열은 분명하다.
주호는 패배하지 못한 채,
자신과 싸워야 할 것이다!
이세기가 사라질 때까지!
여기서 변수는 이세기다!
천문석은 한참 동안 이세기라는 변수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 후 경신법을 다듬기 시작했다.
이번 계획의 핵심은 주호를 상대로 이겨서도 져서도 안 된다는 것!
그냥 빠르게 도망쳐서는 안 된다.
도망치는 중에도 주호를 빡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천문석에게는 주호를 빡치게 만드는 회피법+도주법이 있었다.
나려타곤의 업그레이드.
'데굴데굴 구르기!'
퐁, 퐁, 퐁-
천문석은 검강 롱소드를 잡은 채 데굴데굴 구르기를 더욱 섬세하게 가다듬기 시작했다.
< 비정규직 천마 - #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