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이름이 뭐였더라!?"
천문석이 기억이 날락말락 한 전생의 기억을 더듬을 때.
깜짝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이세기님! 어째서!"
문득 고개를 드니 여량위의 놀란 얼굴이 보였다.
어느새 천문석의 쾌속선은 흑사회의 범선을 따라잡았다.
천문석은 잡념을 지우고 재빨리 여량위에게 명령했다.
"여량위! 무고한 피를 볼 필요는 없다! 극음도 이열은 내가 상대하겠다! 너는 흑기당의 놈들을 붙잡고만 있어라! 피를 볼 필요는 없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량위가 허리 숙여 외친 순간,
천문석은 활대 줄을 고정하며 젊은 무사에게 외쳤다.
"흑기당의 쾌속선 앞을 천천히 돌아 아까 소금 벌판으로 돌아간다. 너무 가까이 붙으면 안 된다! 아까 여량위를 설득했을 때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거다."
젊은 무사는 천문석의 계획을 바로 눈치챘다.
"극음도만 빼내서 상대하실 생각이신가요?"
“하- 이 눈치 빠른 녀석!”
천문석은 감탄하며 문득 드는 생각에 물었다.
“혹시 모르니까. 복면 쓰고 있을래?”
"저 같은 졸자가 복면을 쓰면 더 눈에 띄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묘해서 가리면 더 눈이 가는 법이니까.
천문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쾌속선 선수에 서서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휘이이이-
한겨울 칼바람이 전신을 휘감을 때,
천문석은 어떻게 극음도 이열 혼자만 꿰어 낼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흑기당의 쾌속선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곳곳이 부서진 쾌속선 선수에 서 있는 극음도 이열이 보였다.
극음도 이열의 살기 어린 시선!
얼핏 봐도 엄청나게 화나 있는 게 느껴진다.
분노한 이열이 외치려는 순간.
천문석은 재빨리 선수를 쳤다.
"이열! 네가 진정한 극음도의 후계자라면, 나랑 ‘정정당당’하게 일대일로 승부를 가리자!"
"뭐라고! 정정당당!?"
천문석이 외친 순간, 이열 옆에 서 있던 당무가 폭발했다.
"야! 대포 쏘고! 놀잇배로 충돌하고! 통나무 던지고! 불화살까지 쏴놓고는! 뭐?! 정정당당! 여기 이 배가 안 보이냐!?"
당무는 곳곳이 부서지고 불에 탄 쾌속선을 가리키며 분통을 터트렸다.
천문석은 순간적으로 쾌속선에 생겨난 흔적들을 훑었다.
격전을 치른듯한 쾌속선.
구멍 뚫린 돛과 어쩐지 기울어진 것 같은 갑판.
선체 곳곳에 화살과 나뭇조각이 박혔고 검은 그을음이 가득 묻었다.
여량위가 흑기당의 쾌속선을 저지하며 만든 흔적들이었다.
이때 양동이를 들고 물을 퍼 나르는 흑기당 무사들이 보였다.
“...물도 새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말한 천문석은 새삼 감탄했다.
'여량위. 참 열심히도 막았구나···.'
“야! 네놈이 정정당당을 말하면 안 되지!”
천문석이 새삼 감탄하고 있을 때.
당무의 울분에 찬 외침이 다시금 들려왔다.
천문석은 내심 찔렸으나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뭐야? 정정당당히 싸우기 싫어? 나 그럼 그냥 간다?"
이 순간 천문석의 롱소드에서 펼쳐지는 극음도의 정수!
휘이잉-
롱소드에 달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천문석이 극음도를 펼치자,
극음도 이열의 눈이 롱소드에 박혔다.
이때 당무가 외쳤다.
"당장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일제히 들이쳐서 단숨에 요절을···!"
이열은 손을 들어 당무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천문석을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세기!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천문석은 롱소드를 까닥이며 대답했다.
"야. 너 내가 도망쳐준 걸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내가 사정이 좀 있어서 그렇지. 내가 진심으로 싸우면!"
“싸우면?”
"넌 나한테 100초 지적도 안 된다!"
천문석은 롱소드로 이열을 가리키며 선언했다!
“하- 너 같이 경박한 놈에게 어떻게 극음도의 정수가 이어졌는지···.”
이열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세기 약속해라! 패배한다면 극음도의 정수를 내놓겠다고! 약속만 한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
"극음도의 정수? 이런 거 말야?"
천문석은 롱소드를 흔들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순간 롱소드에서 흩날리는 얼음 송이들.
휘이이잉-
바람을 타고 허공을 가르는 얼음 송이가 달빛을 받아 별처럼 반짝인다.
롱소드에서 쏟아지는 별 무리!
마치 검으로 별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은 엄청난 광경에,
이를 갈던 당무와 흑기당의 무사들마저 넋을 놓고 천문석의 검을 봤다.
문득 별 하나가 호수에 떨어져,
빛나는 얼음덩어리로 변한다.
"...!"
이 순간 이열의 눈이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빛나는 별빛에 담긴 아득히 높은 극음도의 정수!
지금 봐도 아연할 정도로 드높은 무리다.
그러나 저 드높은 무리가 담긴 극음도를 펼치는 이세기의 내력은 자신의 이 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할의 내력만으로 저 정도다!
'저 무리를 자신이 펼친다면?'
극음도는 숙적 화염도를 압도하고 마도 18문의 수좌로 우뚝 설 것이다!
이열은 상상만으로도 전율했다.
‘반드시,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이열은 마음속으로 맹세하며 천문석에게 외쳤다.
"그래! 그것을 내놔라!"
‘뭐야. 극음도의 정수 때문에 쫓아온 거였어?’
순간 천문석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냥 주고 끝낼까?’
어차피 극음도의 정수를 얻어 봤자다.
마도 18문의 일문으로 잘 나가는 극음도, 화염도 등등의 전성기는 이제 곧 끝난다.
새로운 천마, 천문석.
지금이야 우연이 천마가 된 허수아비쯤으로 여기겠지만.
곧 어이없는 우연과 필연, 사건 사고로 전생의 천문석은 엄청나게 강해진다.
그리고 역대 천마 중 최강이라 불릴,
전생 천마 천문석의 철권통치가 시작된다!
이제 곧 절정고수 이열도 부르기 쉽도록,
목에 이름표를 걸고 다니는 처지가 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파에서는 불세출의 천재 이세기가 나타난다.
천하 18성의 고수 대부분을 박살 내고,
천하 십절의 검절로 우뚝 서는 천검 이세기!
차후 강호는 천마 천문석, 천검 이세기로 양분된다.
이때 천문석의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흐릿한 얼굴.
‘...다른 강자가 더 있었나···?’
천문석은 잠시 고민했으나 곧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열이 절정고수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강호를 돌아다닐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즉 극음도의 정수를 줘봤자 천마에게 쥐어박히는 건 마찬가지!
게다가 극음도의 정수라고 해봤자 관음천수도의 부스러기 같은 것이다!
그냥 줘도 별로 아까울 게 없었다.
'이거 그냥 주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천문석의 마음이 기울어지는 순간.
생각에 잠긴 천문석을 초조하게 살피던 이열이 외쳤다.
"승부에 극음도의 정수를 걸겠다면! 당연히 나도 그에 상응하는 걸 걸겠다!"
이열은 품에서 두툼한 책을 꺼내며 외쳤다.
"천지염마도(天地炎魔刀)!"
"염마도!?"
경악한 당무의 외침이 터지자.
흑기당 무사들은 깜짝 놀라 이열의 손에 들린 비급을 바라봤다.
모두의 시선에 맺힌 뜨거운 열망!
이열은 비급을 들어 올린 채 당당히 외쳤다.
"천지마도 주곤의 염마도다! 이 비급을 승부에 걸겠다!"
"...!"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경악성.
모두의 시선이 염마도의 비급에 꽂혀 있을 때.
천문석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이열을 봤다.
'염마도? 이런 미친놈!'
이열은 지금 마공 비급을 승부에 걸겠다고 한 것이다!
천마 신공을 익혔다가 천강의 불꽃에 훅 간 자신에게 말이다!
이 순간 극음도의 정수를 그냥 넘기겠다는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염마도를 당장 거절하려 할 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마공 비급을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무와 흑기당의 무사들!
'이거 혹시···?'
천문석은 뇌리를 스치는 생각을 바로 입 밖으로 외쳤다.
"비급 말고 돈을 거는 건 어떠냐?"
"뭐···?"
순간 극음도 이열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돈이라고?"
"은자를 가지고 다니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종이에다가 얼마 줄지 쓰고 수결만 해주면 된다."
"..."
극음도 이열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무림인이 비급을 마다하고 돈을 원하다니!
이런 무인 같지도 않은 놈에게 극음도의 정수가 이어지다니!
순간 이열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돈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주마! 당무!"
이열의 외침에 당무는 즉각 종이와 붓을 대령했다.
일필휘지로 문서를 만들고 수결하는 이열.
이열은 문서에 내공을 실어 천문석에게 던졌다.
파아앙-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오는 종이!
천문석은 이열이 던진 종이를 롱소드로 받았다.
탁-
손에 들고 종이를 펼치는 순간 보이는 숫자.
삼만(三萬).
은자 3만 냥!
깜짝 놀란 천문석이 고개를 들자, 이열이 당당히 외쳤다.
"중원 어느 전장에서라도 은자 삼만 냥을 내줄 것이다! 극음도의 후계자인 내가 보증한다!"
천문석은 삼만 냥짜리 지급 문서를 잘 접어 품 안의 책 속에 넣었다.
어차피 이 안에서만 쓸 수 있는 돈이지만,
이 정도 돈이면 생각만 했던 과거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장원, 객잔, 상가, 농지를 사는 그런 생산적인 꿈 말이다.
흐흐흐-
천문석이 흐뭇하게 웃으며 품 안의 지급 문서를 쓰다듬을 때.
이열이 외쳤다.
"이세기 이제 승부를 가리자!"
"좋다! 승부를 가리자!"
천문석과 이열이 탄 쾌속선 두 척이 소금 벌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쏴아아악-
청해 호수의 서쪽, 소금 벌판에 두 척의 쾌속선이 도착하고.
천문석과 이열이 쾌속선에서 내려 소금 벌판 안으로 들어갔다.
이 순간 흑사회의 도박선과 흑기당의 쾌속선들이 호수 위에 나란히 섰다.
긴장한 얼굴로 적을 힐끗거리며,
소금 벌판으로 나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흑사회와 흑기당의 무사들.
문득 당무가 여량위를 향해 외쳤다.
"여량위! 네 어리석은 선택의 대가를 곧 치를 것이다!"
하-
여량위는 웃음을 터트리며 주먹을 흔들었다.
"당무, 당무! 눈이 있으나 보지를 못하는구나! 너야말로 곧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여량위가 외치는 순간,
도박선 위의 흑사회 무사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이들은 이세기가 만들어낸 검강을 봤다.
검강!
이세기는 천하 18성급의 절대 고수다!
극음도의 후계자에게 패배할 리가 없는 것이다.
흑사회와 흑기당 모두 서로를 비웃으며,
자신이 모신 이가 승리할 것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 천문석은 소금 벌판으로 걸어가며,
젊은 무사에게 재빨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
"...이렇게 하면 된다. 알았지?"
"네!? 아니 검강을 쓰시면 금방 이기실 텐데···. 그런 준비가 필요할까요?"
천문석은 의아해하는 젊은 무사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야,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혹시 무슨 절맥 같은 건가요? 하늘이 천재에게 내린다는 그런 것?!"
젊은 무사는 재빨리 주위를 살피더니 흥미진진한 얼굴로 외쳤다.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하여튼 말한 대로 준비하고···."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언덕 위를 봤다.
살기 어린 분위기에 다가오지 못한 채,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복면 쓴 거한이 보였다.
왕웅.
은자를 받아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왕웅이었다.
천문석은 젊은 무사에게 지시했다.
"쟤한테 은자 주머니 하나 줘라. 쟤 울겠다."
"...생명도 구해줬는데. 그걸로 그냥 퉁치시죠?"
하, 이 냉철한 녀석!
"전표를 넘겨. 어차피 흑사회 전표는 바꾸는 게 부담되잖아? 왕웅은 추적당하지 않게 바꾸는 방법을 알 거다."
"아···."
탄성을 터트리는 젊은 무사.
이때 이열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세기! 이제 승부를 내자!"
문득 고개를 돌리니 10장 앞으로 가까워진 이열의 모습이 보였다.
천문석은 천천히 롱소드를 뽑으며 마지막 지시를 했다.
"이제 가라. 조심하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젊은 무사는 몸을 돌려 멀리 언덕 위,
흑사회가 준비한 마차가 줄줄이 늘어선 곳을 향해서 달려갔다.
그리고 천문석과 이열이 드디어 마주 섰다.
일대일 승부.
지난밤 도박선에서 시작된 긴 하루의 마무리가 마침내 시작됐다.
---
이열은 날렵한 칼을 뽑아 들며 외쳤다.
"이세기 맹세해라!"
천문석은 이열이 요구하는 맹세가 뭔지 바로 알아챘다.
도망치지 말고 승부에 임하고,
패배하면 극음도의 정수를 넘기라는 요구!
'하, 이 가소로운 녀석!'
내심 헛웃음이 터졌으나,
이미 수결이 찍힌 은자 3만 냥짜리 지급 문서까지 먼저 받았다.
천문석은 이열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맹세했다.
"이세기. 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도망치지 않고 싸우겠다. 그리고 네가 이긴다면! 완전한 극음도의 정수를 넘기겠다."
극음도 이열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기수식을 펼쳤다.
이열의 도가 움직이는 공간을 따라 흩날리는 냉기!
기수식이 끝나는 순간.
도신에 언뜻 맺힌 강기의 빛!
파스스슥-
도신에서 생겨난 강기는 곧 사라졌지만,
이열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표정이 드러났다.
"이 강기를 보고도 싸우겠다면! 3초! 선수 3초를 양보하겠다!"
선수 3초.
고수가 하수를 배려하는 암묵적인 강호의 규칙.
자신보다 하수인 상대의 배려에,
천문석은 눈을 반짝이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고맙다!"
천문석은 롱소드를 어깨에 걸고 뛰었다.
보법도 뭣도 아닌 거친 뜀박질,
천문석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바삭, 바삭, 바사삭-
소금 벌판의 단단한 소금 덩어리가 산산이 부서져 눈발처럼 흩날렸다.
새하얀 소금 알갱이를 두르고 돌진하는 천문석.
천문석은 단숨에 이열에게로 뛰어 롱소드를 내려쳤다!
휘이잉-
섬뜩한 굉음을 내며 벼락처럼 떨어지는 롱소드!
그러나 절정 고수 이열에게는 한심할 정도로 늦은 검격!
"느리다!"
이열은 비웃음을 띤 채,
가볍게 보법을 펼쳐 롱소드를 피했다.
이 순간 이열의 눈앞.
롱소드를 내려치던 천문석의 두 손이 맞닿았다.
콰아앙-
우레가 터지고,
엄청난 섬광이 폭발했다.
일순 대낮처럼 밝아지는 대지.
굉천수(轟天手)!
하늘을 놀라게 하는 굉천수의 일수가 터졌다.
선빵 필승!
천문석은 이열의 눈에 굉천수, 눈뽕부터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