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천문석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휘유우우우-
맹금류 특유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
환한 달 아래를 나는 흑기당의 매!
흑사회의 도박선과 함께 도망친 지 이미 한 시진이 지났다.
한 시진 동안 흑기당의 매는 화살은 닿지도 않을 높이를 날며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저거 괜찮을까요?"
문득 들려오는 키를 잡은 젊은 무사의 불안한 목소리.
젊은 무사는 하늘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는 매를 보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계획이 있다."
천문석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주위를 확인했다.
흑사회의 도박선은 돛을 펼친 채 질주하고,
이 뒤에 자신이 탄 쾌속선이 바짝 붙어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육지에 도착할 것이다.
문제는 뒤에서 따라붙는 흑기당의 쾌속선!
섬으로 주위가 막힌 곳을 벗어난 이상 수군 때문에 더는 대포를 쓸 수가 없었고.
흑기당의 쾌속선과의 거리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육지에 도착하기 전에 뒤를 잡히고,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이거 싸우면 빠져나갈 수는 있는 거야?'
천문석은 선미 갑판에서 빠르게 가까워지는 흑기당의 쾌속선을 하나하나 살피며 적의 수준을 가늠했다.
순간 시야를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극음도 이열!
팔짱을 낀 이열이 천문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천문석과 이열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번개같이 뽑혀서 허공을 가르는 칼!
절정에 달한 무인의 기세가 칼에서 쏘아졌다.
"...!"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고,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는다.
절정 무인의 기세에 위축되는 동시에 반발하듯 끓어오르는 마음!
들끓는 마음속에서 생경한 외침이 들려왔다.
'당장에 검을 뽑아! 저 가소로운 놈을 일격에 쳐 죽여라!'
실제로 들리는듯한 생생한 외침에,
심화가 끓어오르고 머리에 열기가 올랐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붉게 변하고,
마음속에서 광포한 분노가 돌연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하늘을 찢어발기는,
아수라의 검무를 펼치고 싶은 충동!
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고,
두 눈이 붉게 변하는 순간.
천문석은 여상하게 말했다.
"이건 또 뭐야?"
천문석은 롱소드에 손을 올리고 지권인의 수인을 짚었다.
퐁, 퐁, 퐁-
하늘 고래의 소리와 진동이 몸에 닿는 순간.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던 들끓는 분노가 흩어진다.
천문석은 지권인의 수인으로 잔념(殘念)을 흩어버리며, 심상 공간을 관조했다.
순간 혀를 차는 천문석.
하늘은 기연과 마장을 같이 내린다.
검혼이 심어진 롱소드를 깨우는 기연.
이 기연에 어느새 마장이 스며들어있었다.
심마(心魔).
살아있는듯 생생하게 마음속에서 들려온 광포한 음성은 심마였다.
어느새 천문석의 심상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마가 깃들어 있었다.
심마란 실체가 없는 또 다른 자신의 이면이기에 다루는 게 극도로 힘들다.
그러나 천문석에게는 이 정도 심마는 별것이 아니었다.
천마 신공에 비한다면 작은 돌멩이 같은 심마다.
천문석은 마음속에 스며든 심마의 처리를 뒤로 미루고,
극음도 이열과 흑기당주 당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
최소 한 번은 싸워야 빠져나갈 수 있다.
검혼이 담긴 롱소드를 사용하면.
흑기당주 당무는 20 합.
극음도 이열이라면 100합이면 승부가 갈린다.
이열과 당무가 같이 덤비면?
아슬아슬했다.
천문석의 시선이 흑사회의 도박선으로 향했다.
갑판에 서서 부하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여량위.
여량위가 자신과 같이 싸운다면?
당무를 상대로 여량위가 시간만 끌어줘도 필승이다!
'문제는 여량위와 같이 싸우면 모든걸 들킨다는 건데···.'
천문석이 삑삑이 검강 롱소드를 보며 고심하는 순간.
콰아아앙-
거친 충돌음이 들려왔다.
천문석이 깜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곳을 확인했다.
빈 놀잇배!
처음 흑사회의 도박선으로 갈 때 봤던 놀잇배 십여 척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흑기당의 쾌속선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쿵, 콰앙-
콰지지직-
으아악-
"미친놈들아! 뭐 하는 짓이야!?"
...
삽시간에 충돌하는 쾌속선과 놀잇배들!
작고 가벼운 놀잇배는 충돌 순간에 박살 났지만,
쾌속선의 속도를 뚝뚝 떨어뜨렸다.
이때 들려오는 울분에 찬 목소리!
"여량위! 뭐 하는 짓이냐!?"
흑기당주 당무가 검을 든 채 분노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고개를 돌려 여량위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당무를 노려보는 여량위.
여량위가 놀잇배를 움직여.
쾌속선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문득 천문석과 여량위의 눈이 마주쳤다.
여량위는 절도있게 고개를 숙이며 당당히 외쳤다.
"부두에 닿으면 바로 마차를 타고 빠져나가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
천문석은 말문이 턱 막혔다.
흑사회주 여량위는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을 돕고 있었다.
이때 다시 한번 들려오는 분노한 외침 소리.
"흑사회주! 네가 제정신이냐!"
이번에는 극음도 이열이 여량위를 노려보며 외쳤다.
여량위는 코웃음을 쳤다.
"하- 이 역도 놈이!"
"뭐!? 역도.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너겠지! 이 역도 놈아!"
흑사회주 여량위는 내공을 담아 소리치고 손을 휘저어 명령했다!
"계속 배를 모아들여라! 통나무와 불화살을 준비해라!"
흑기당의 쾌속선을 향해서 끝없이 몰려드는 빈 놀잇배들.
쾌속선과 놀잇배가 충돌하며 천문석이 탄 배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하하-
여량위의 통쾌한 웃음이 터지고.
"이대로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다!"
젊은 무사의 신난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천문석은 양심이 아려왔다.
흑사회주 여량위는 지금 진짜 극음도 이열의 깊은 원한을 사고 있었다.
'아···. 왜 이리 열심히 하는 거야. 미안하게시리···.'
천문석의 난감한 시선이 여량위에게 닿았다.
그리고 한 시진!
여량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뒤를 쫓는 흑기당의 쾌속선을 저지했다.
흑기당의 쾌속선은 결국, 천문석의 뒤를 잡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쪽 부두가 나타났다.
긴 하루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호수로 쭉 뻗은 부두 뒤로 펼쳐진 새하얀 소금 벌판.
소금 벌판 위에는 십여 대의 마차가 대기 하고 있었다.
이때 들려오는 여량위의 외침.
"준비가 끝났습니다!"
천문석이 바라보자,
여량위는 머리를 숙인 채 외쳤다.
"저 마차에 타시면! 마차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동시에 출발하도록 준비했습니다! 흑기당의 매도 뒤를 쫓지 못할 겁니다!"
"하- 이제야 살았구나!"
왕웅의 탄성이 들려올 때,
천문석은 여량위에게 물었다.
"여량위! 원하는게 뭔가!?"
순간 흑사회주 여량위는 몸을 바로 세우고 포권을 취한 채 말했다.
"바라옵건대.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십시오!"
"..."
여량위는 천문석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부하들에게 외쳤다.
"우리는 마지막 임무를 마치러 간다! 기수를 돌려라!"
크게 원을 그리며 선회하는 도박선.
여량위는 갑판에 선 채 오랫동안 천문석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
완전히 선회해 방향을 돌린 도박선은,
동쪽에서 다가오는 흑기당의 쾌속선을 향해 나아갔다.
촤아아아아-
거칠게 일어나는 파도 소리에,
천문석은 허탈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자신의 계략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여량위.
여량위는 천문석이 탄 마차가 거리를 벌릴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도박선을 돌려 흑기당의 쾌속선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여량위는 내가중수법을 쓸 정도의 고수다.
그러나 상대는 절정에 달해 강기를 쓸 수 있는 극음도 이열이었다.
지금 여량위는 스스로 죽을 자리로 들어가고 있었다.
설령 여기서 용케 살아남는다고 해도.
마도 18문의 일문, 극음도의 분노가 쏟아질 것이다.
여량위와 흑사회에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 순간 천문석의 마음속에서 울컥 치솟는 무언가가 있었다.
흑사회주 여량위는 결코 선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여량위는 모든걸 던져 신의(信義)를 지켰다.
천문석의 마음이 복잡하게 뒤엉킬 때.
젊은 무사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분 괜찮을까요?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지···."
"도와주긴 뭘 도와줘!? 이 틈에 빨리 도망쳐야지!"
왕웅이 어이없다는 듯 외치는 순간.
천문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 자체가 답!
천문석은 마음의 결정을 하고 돛 줄을 잡은 왕웅에게 물었다.
"야! 너 헤엄 좀 치냐?"
"네? 제가 헤엄은 좀 치는데. 갑자기 그건 왜···."
왕웅이 공손하게 대답하는 순간.
천문석은 단숨에 왕웅을 들어 올려 부두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으아악!
비명을 지르며 호수로 떨어지는 왕웅!
"아니!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왕웅이 헤엄을 치며 묻자,
천문석은 소금 벌판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 배 목적지가 변했다! 너 저기까지 헤엄쳐갈 수 있지? 잘 가라!"
천문석은 빠르게 말을 쏟아내고 젊은 무사를 봤다.
"야, 배 돌려라! 아무래도 찝찝해서 안 되겠다! 아! 혹시 너도 내려 줄까?"
젊은 무사는 가슴을 두들기며 크게 외쳤다.
"아닙니다! 손님을 모시는 게 제 임무입니다!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크게 외친 젊은 무사는 환해진 얼굴로 바로 키를 돌렸다.
하-
적을 향해 배를 돌리라는데 웃는 녀석이라니!
젊은 무사의 환한 얼굴을 보는 순간 천문석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사마를 넘어 무림인의 마음에 반드시 담겨야 할 한가지.
신의(信義).
마음속에 신의가 담긴 이 젊은 무사는 이미 훌륭한 무림인이었다.
천문석은 돛 줄을 잡은 채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잡념을 모조리 끊어 버렸다.
사소한 것은 모두 잊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극음도 이열과 싸워 이기는 것뿐!
천문석이 마음속에 날카로운 검을 세울 때,
등 뒤에서 왕웅의 간절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세기님! 은자! 은자 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아···."
---
"..."
천문석은 헤엄치는 왕웅을 봤다.
배를 돌리면 시간에 맞추기 힘들고,
무거운 은자 주머니를 던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천문석은 왕웅에게 외쳤다.
"야, 저기 부두에서 기다려라! 아니면 나중에 다시 만나면 줄게!"
"네?! 이세기님! 그게 무슨!? 신의 없게 그러시면···."
왕웅은 투덜거리다가 깜짝 놀라 눈치를 봤다.
신의가 없다는 말은 정사마를 가리지 않는 크나큰 모독!
당장 검부터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문석은 왕웅의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당연했다.
자신은 이세기가 아니었으니까!
카캬카-
천문석은 내심 웃음 짓다가 벼락같이 한가지 생각이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세기가 강호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할 때가 자신이 천마가 되는 이 무렵이다.
어디 호수에서 거대한 검은 뱀을 잡았다는 헛소문이 퍼지더니.
그 후에 사자련의 고수를 이겨서 위명을 떨쳤다.
그 사자련의 고수 이름이 뭐더라?
별호가 무슨 검에 이름이 외자였는데···.
간질간질한 뇌리.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커다란 의문이 해소될 것만 같은 직감!
“아, 그 고수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날락말락 하네······.”
천문석이 알 수 없는 직감에 오래전 기억을 되짚는 이때.
“은자! 은자 주고 가세요!”
왕웅의 애끓는 외침이 계속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