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여량위가 외치는 순간.
재빨리 검혼에 둔 마음을 거두고 내공을 천천히 갈무리하는 천문석.
천문석은 여량위를 봤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여량위.
"..."
뒷골목 고아에서 마도 지존 천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온갖 간난신고를 겪은 천문석.
천문석은 눈물을 흘리는 여량위의 마음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다.
'무인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이 말대로 흑사회주 여량위는 완전히 자신에게 경도됐다.
"..."
자신의 말이 완전히 먹혔음에도 천문석은 양심이 아려옴을 느꼈다.
'...아니 쟤는 부담스럽게. 왜 울기까지 하냐···.'
이때 무언가를 들은 듯 고개를 갸웃하는 여량위!
천문석은 직감했다.
퐁, 퐁, 퐁-
뒤늦게 전해진 하늘 고래의 소리와 진동을 여량위가 느꼈다!
'아슬아슬했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천문석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주위를 훑는 천문석의 시선!
십여 척의 쾌속선과 전문 수적, 응룡채의 거선이 다가오고 있다.
이 선두에 있는 건 극음도 이열!
시시각각 위험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천문석은 바로 외쳤다.
"여량위! 우선 역도에게서 몸을 피해야 한다!"
"네?!"
천문석의 외침에 당혹스러워하는 여량위.
'초절정의 고수가 몸을 피한다고?'
"여기서 싸우시는 게···?"
여량위가 말끝을 흐리자,
천문석은 재빨리 설명을 이었다.
"이열은 혼자가 아니다! 뒤로 본가의 역도들이 따라붙었을 거다!"
"제가 여기서 뒤를 막겠습니다! 몸을 피하십시오!"
여량위가 비장하게 외친 순간,
천문석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흑사회가 뒤를 막으면 응룡채, 흑기당과 싸워 엄청난 피가 흐를 것이다.
게다가 진짜 극음도 이열과 부딪히면 흑사회와 여량위에게는 파멸만이 남는다.
계략에도 금도(禁道)가 있는 법!
진심을 다하는 여량위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다.
천문석은 머릿속에서 기존의 계획을 재빨리 수정했다.
흑사회가 같은 편이 된 이상,
북쪽으로 청해 호수를 가로지를 필요가 없다.
포위될 걱정이 사라졌으니,
가장 가까운 육지를 통해서 도망치면 된다.
천문석은 여량위에게 지시했다.
"역도만 처리하면 끝날일! 무고한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 가장 가까운 육지로 빠져나간다!"
"존명! 길을 열겠습니다!"
여량위는 허리를 숙여 외치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길을 연다! 전서구를 날려라! 청해 호수에 띄워진 모든 배를 모으고! 부두로 마차와 말, 무사들을 모아라! 서쪽! 가장 가까운 부두로 이동한다!"
흑사회 무사들이 다급하게 사방으로 흩어지고,
도박선 갑판에서 전서구가 어지럽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때 전서구를 향해 날아드는 흑기당의 매 들!
휘유우우우-
"매를 잡아라!"
여량위가 외치자,
활잡이들이 갑판에 늘어서 활을 쏘기 시작했다.
엄청난 수의 화살에 깜짝 놀란 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천문석은 깜짝 놀랐다.
'아니, 대포에 화살까지···. 뭐 이리 막 나가!?'
흑사회 녀석들 관아에서 금지한 군사 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었다.
이때 도박선의 돛이 펼쳐지고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올랐다.
천천히 속도를 올리는 도박선.
천문석은 키를 잡은 젊은 무사와 활대 줄을 잡은 왕웅에게 지시했다.
"바짝 붙여라! 바로 빠져나간다!"
"알겠습니다!"
"바로 붙이겠습니다!"
검강이라는 천외천의 경지에 넋을 놓고 있던 두 사람이 재빨리 움직였다.
촤아아아-
천문석이 탄 쾌속선은 도박선을 따라서 북쪽 물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쾌속선이 도박선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변을 깨달은 흑기당의 쾌속선들이 속도를 올렸다.
이때 도박선의 선미 대포가 불을 뿜었다.
파아아앙-
쾌속선 앞에서 치솟는 물기둥!
"...여량위! 무슨 짓이냐!"
물기둥을 뒤집어쓴 당무의 분노한 고함이 하늘을 울릴 때.
여량위는 외쳤다.
"당무! 이 멍청한 녀석! 속아 넘어가다니!"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여량위는 대답 없이 냉정히 명령했다.
"따라붙지 못하도록 섬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 사격해라!"
파아앙-
파아아앙
계속 이어지는 포격에 흑기당의 쾌속선은 따라붙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흑기당의 쾌속선이 멈춘 사이,
흑사회의 도박선과 천문석의 쾌속선은 북쪽 물길을 지나 섬을 타고 서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
천문석이 탄 쾌속선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응룡채의 거선 갑판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극음도 이열의 억눌린 헛웃음.
콰지지직-
이열의 두 손에 잡힌 두꺼운 나무 난간이 단숨에 얼어붙어 바스러지고, 차가운 시선이 갑판 위를 훑었다.
응룡채의 거선은 출발 이후 단 한 번도 이세기가 탄 배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렇게 무능하다니!
분노가 이열의 시선이 닿는 순간 수적들은 전신을 덜덜 떨며 몸을 웅크렸다.
"속도를 더 높일 수 없나!"
이열의 외침에 응룡채주 마일도는 앞으로 나서 고개를 숙였다.
"...이게 배의 크기가 크기라···. 호수의 물살로는 속도를 높이는 게 힘듭니다. 그리고 바람도 좋지 못해서···."
마일도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끝을 흐렸다.
순간 이열의 위압감이 마일도에게 쏟아졌다.
"...!"
절정고수의 위압감에,
마일도는 몸을 덜덜 떨며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이때 흑기당의 쾌속선 한 척이 이열이 탄 거선으로 다가왔다.
흑기당의 대장선 선수에 선 당무가 거선 갑판의 이열을 향해 외쳤다.
"흑사회 놈들이 배신했습니다! 이놈들 가짜와 함께 서쪽 부두로 도망쳤습니다!"
"뒤를 잡을 수 있겠나!?"
이열의 외침에 당무는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이 지역을 벗어나면, 수군 때문에 대포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부두에 닿기 전에 반드시 따라잡겠습니다!"
당무의 외침을 듣는 순간,
이열은 거선의 난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휘이이, 탁-
10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높이를 가볍게 뛰어내려 쾌속선에 내려서는 이열.
이열은 바로 명령했다.
"바로 달려라! 이세기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존명!"
명을 받은 당무는 바로 움직였다.
쾌속선의 돛이 일제히 펼쳐지고.
휘유우우우-
날카로운 매 울음소리를 따라서 흑기당의 쾌속선들이 호수 위로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쏴아아아악-
극음도 이열과 당무가 탄 쾌속선은 순식간에 서쪽 물길을 달려 흑사회를 쫓아 사라졌다.
---
모두가 사라진 섬으로 둘러싸인 호수.
이곳에는 응룡채의 거선만이 남겨졌다.
흑기당의 쾌속선이 사라지고 한참 후.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응룡채주 마일도의 입이 살짝 열렸다.
"갔냐···?"
"뭐···?"
홍청방 사자가 의아해하는 순간.
사방의 응룡채 수적들이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긴 했는데···."
"진짜 이래도 되는 겁니까? 채주···?"
"시킨 대로 하긴 했는데···."
"혹시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
부하들의 불안한 대답이 들려오자,
마일도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공포에 벌벌 떨며 비 오듯 땀 흘리던 마일도.
그러나 마일도의 얼굴은 어느새 태연하게 변해 있었다.
"당연히 되지! 그리고 설마 저 정도 고수가 우리 같은 하수를 기억이나 하겠냐? 지금쯤 내 이름도 잊었을걸."
"아니,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부하들의 얼굴에,
마일도는 다시금 외쳤다.
"야, 우리 같은 놈들이 마도 18문. 극음도 같은 높은 분 일에 끼어들면 좆되는거야! 원래 동네 건달은 대처에 나가면 쥐어 터지는 법이다!"
하아-
하아아-
...
순간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
이때 젊은 여자 수적 한 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건달이 뭡니까? 건달이! 없어 보이게 시리!"
마일도는 버럭 소리를 지르는 여자 수적의 목에 팔을 감아 조였다.
컥, 커컥-
"이 녀석이! 감히! 채주님 말씀에 토를 달아!"
딱, 따다다닥-
으악, 으아악-
마일도는 커다란 주먹으로 여자 수적의 머리를 연신 쥐어박으며 재빨리 명령했다.
"시끄럽고! 빨리 돛부터 제대로 돌려라! 얼른 튀자!"
응룡채의 수적들은 대답 없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돛대에 걸린 돛의 방향이 변하고 거선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채주님! 어디로 갈까요?!"
조타수의 외침에 마일도는 동쪽을 가리켰다.
"무서운 사람들이 간 곳 반대쪽! 동쪽으로 도망치자! 다른 배에도 빨리 신호하고!"
부우우우웅-
곧 망루에서 뿔피리 신호가 울리고, 퇴각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동쪽과 남쪽에 있던 거선의 기수가 동쪽으로 움직였다.
바람 방향은 측풍.
그러나 응룡채의 거선은 극음도 이열이 탔을 때보다 몇 배는 빠르게 가속했다!
쏴아아아-
고요한 호수의 수면을 가르는 응룡채의 거선!
거선은 순식간에 속도를 올려 이열과 당무가 간 반대 방향, 동쪽으로 질주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홍청방 사자는 내심 탄성을 터트렸다.
'마일도 이 녀석! 일부러 천천히 배를 움직였구나!'
뛰어난 위기 감지 능력!
응룡채주 마일도는 제대로 상황을 파악했다.
마도 18문의 극음도는 벽력탄이나 마찬가지다.
괜히 극음도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벽력탄이 터지면!
흑사회, 흑기당, 응룡채, 홍청방 같은 조무래기들은.
다 죽는 거다!
오랫동안 봐 왔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마일도의 모습.
'이 녀석 빡대가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모습이 있었다니!"
홍청방 사자는 이채를 띤 얼굴로 마일도에게 물었다.
"마일도. 아깝지 않나?"
"아까워? 뭐가?"
"마도 18문, 극음도의 후계자에게 잘 보일 기회인데 탐나지 않나? 상으로 엄청난 무공이 뚝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하-
마일도는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 잘 보여 봤자. 죽을 확률만 더 올라가지. 엄청난 무공? 어차피 엄청난 무공 없어도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제일 쎄다."
순간 마일도에게 목을 잡힌 채 연신 머리를 쥐어박혔던 여자 수적이 분한 듯이 외쳤다.
"...내가 채주보다 강해져서! 꼭! 채주 머리를 쥐어박을 겁니다!"
"뭐···? 내 머리를 쥐어박어?"
어이없어하는 마일도.
"하, 이 새끼! 사촌이란 놈이! 야! 나야말로 이모만 아니었으면! 너를 하루에 열 번은 쥐어박았어! 넌 진짜 너희 엄마한테 하루에 열 번은 감사해야 한다!"
“큰이모도! 오빠 엄청 걱정합니다! 빡대가리라고요!”
순간 분노한 마일도가 외쳤다.
“야, 이 새끼야! 그 말 하지 말랬지!”
순간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하하하-
하하하하-
...
사방의 부하들이 모두 웃자,
마일도는 발로 갑판을 때리며 버럭 소리 질렀다.
쿠우웅-
"허탕 쳤는데! 뭘 웃어 새끼들아!"
"..."
순간 침묵이 내려앉는 갑판 위.
마일도는 주위를 노려보며 외쳤다.
"이번일 허탕 쳤으니! 얼른 돌아가서! 슬픔의 술을 먹자!"
우와아아아-
순간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지고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들.
"하-. 우리 채주가 하루종일 ...같은 명령만 하더니."
"드디어 제대로 된 명령을 하네."
"그러게 말야. 하아-"
하아-
하아아-
순간 사방에서 이어지는 깊은 한숨 소리!
마일도는 벌게진 얼굴로 버럭 소리 질렀다!
"뭐!? 빡대가리? 누가 빡대가리라고 했어!?"
"아무도 그런 말 안 했습니다."
"지금 채주가 하고 있잖습니까?"
...
다시 한번 왁자하게 터지는 수적들의 웃음.
이 순간 홍청방 사자는 빡대가리 마일도가 응룡채주가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흑도 방파의 우두머리답지 않은 저 성품.
욕심을 자제할 줄 알고 부하들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다.
수적들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오히려 군문의 장수에게 맞는 성품!
홍청방 사자는 마일도의 평가를 수정하며, 문득 고개를 돌려 서쪽을 봤다.
정체불명의 이세기.
흑사회주 여량위.
극음도의 후계자 이열,
흑기당주 당무.
이들 네 명이 이제 곧 승부를 가릴 것이다.
순간 홍청방 사자의 눈이 빛났다.
몇 가지 계획이 일그러졌지만 많은 정보를 얻었다!
홍청방에 있어서 정보는 힘!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 극음도 이열에게서도 무사히 도망쳤다.
아주 운이 좋은 하루였다!
홍청방 사자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얻은 정보를 머릿속에서 정리할 때.
응룡채의 거선들은 청해 호수를 가로질러 계속 동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청해 호수의 무인도에서 한 남자를 태웠다.
찢어진 무복에 맨발로 검 한 자루만 들고 있는 거지꼴의 남자.
그러나 이 남자에게서 풍기는 느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허름한 옷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맨 발로 선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위엄!
바라보면 고고한 산악 같으나,
문득 고개를 돌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바람처럼 허허롭다.
거친 수적들마저 생전 처음 느끼는 생경함에 긴장한 이때.
"...더럽게 잘 생겼네···."
문득 한 여자 수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빙그레 웃으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순간 붉게 얼굴이 달아오른 여자 수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일도는 처음 보는 사촌 여동생의 모습에 어이없어했다.
"야, 너 뭐야? 첫눈에 반했냐?"
"채주님!!"
"왜 소리는 질러?!"
마일도는 소리 지르는 동생에 어이없어하며,
남자에게 화주가 담긴 수통을 건넸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길이었다고?"
남자는 단숨에 화주를 들이키고 대답했다.
"철검장. 단혈철검, 주 대협께 비무를 청하러 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