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천문석은 젊은 무사와 복잡하게 얽힌 도박선의 통로를 달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새끼야! 그 손 치워라!?"
"모두 갑판으로 모여라!"
"홍청방 놈들을 찾는게 먼저다!"
...
사방에서 들려오는 도박꾼들의 악다구니와 다급히 달리는 흑사회 무사들.
어느새 기울어졌던 도박선은 수평을 되찾았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다급한 비명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천문석은 좁고 복잡하게 얽힌 통로를 헤매고 있었다.
“통로를 뭐 이따위로 만들어 놨어!”
천문석이 분통을 터트릴 때.
앞을 지나가는 익숙한 체형이 보였다.
천문석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곰 같은 덩치의 사나이 왕웅이었다.
반색한 천문석은 바로 왕웅을 불렀다.
"왕웅!"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린 왕웅은 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극음도의 사자.
흑사회주마저 공손히 대하던 극음도의 사자가 눈앞에 있었다.
천문석은 굳어버린 왕웅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왕웅! 지금 무슨 일이냐?"
왕웅은 주위를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응룡채의 거선과 충돌했습니다."
"응룡채?"
천문석의 반문에 뒤를 따르던 젊은 무사가 재빨리 설명했다.
"응룡채는 이곳 청해 호수에 근거지를 둔 수부들입니다. 북쪽과 동쪽으로 이어지는···."
말이 수부(水夫)지 사실상 호수와 강을 이용하는 배에서 상납을 받는 수적들이란 이야기다.
"응룡채에서 공격했다고? 어떻게 된 거냐?"
천문석의 질문에,
왕웅이 큰 눈을 끔벅이며 말끝을 흐렸다.
"응룡채 놈들이랑은 부딪힐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천문석의 머리에 떠오르는 두 사건.
홍청방이 사라지고.
응룡채가 나타났다.
두 사건이 우연히 일어났을 리가 없었다.
홍청방과 응룡채.
둘이 연관이 있다는 직감이 왔다.
그러나 어차피 원하던 정보는 모두 얻었다.
홍청방이나 응룡채가 무슨 계획을 꾸몄든지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지금은 최대한 빠르게 탈출할 때!
천문석은 왕웅에게 명령했다.
"갑판으로 올라가겠다. 길을 열어라!"
"알겠습니다!"
왕웅은 바로 앞장서서 복잡하게 이어진 통로를 달렸다.
곰처럼 돌진하는 왕웅에게 사방으로 날아가는 도박꾼들.
왕웅은 흩어진 흑사회 무사들을 규합해서 순식간에 길을 열었다.
천문석과 젊은 무사는 왕웅의 뒤를 쫓아 계단을 연이어 올랐다.
그리고 갑판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순간.
대치 중인 세 집단이 보였다.
천문석은 한눈에 이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여량위의 흑사회.
당무의 흑기당.
그리고 도박선과 선체를 맞댄 거대한 배에 늘어선 무사들.
응룡채!
이 순간 응룡채의 무사들 사이에서 거구의 장한이 나타났다.
“응룡채주!”
“마일도···!”
사방에서 외침이 들려오는 순간.
응룡채주 마일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가 내 동생을 때렸냐!"
“...”
---
"뭐? 저게 무슨 소리야?"
"동생이라고?"
...
사방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
이때 흑사회주 여량위가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동생을 때렸다고? 마일도. 그게 무슨 병신같은 소리냐?!"
"마일도! 너한테 동생이 있었다고?"
뒤이어 흑기당주 당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응룡채주 마일도는 대답 없이 부하들에게 외쳤다.
"데려와라!"
순간 응룡채의 무사들이 좌우로 갈라지고,
눈이 붉게 충혈된, 얼굴에 멍이 들고 엉망이 된 옷을 입은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갑판 위 모두의 시선이 청년에게 모였다.
곰 같은 마일도와는 다르게 호리호리한 체형의 청년.
"네가 직접 지목해라! 너를 때린 녀석이 누구냐?"
마일도가 외치자,
청년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흑사회 무사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이 순간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응룡채주 마일도에게 동생이 있었어?"
"그런 이야기 못 들었는데?"
"우리 채주한테 동생이 있었다고?"
"이상하네? 얼굴이 전혀 안 닮았는데···."
...
흑사회와 흑기당뿐만 아니라,
응룡채의 무사들마저 고개를 갸웃할 때.
천문석은 이 청년을 알아봤다.
도박장이 난장판이 될 때 사기도박을 당했다고 길길이 날뛰던 청년.
‘강남 7우’라고 외치다가 왕웅에게 맞고 끌려나간 그 청년이다!
쟤가 응룡채주 동생이라고?
전혀 닮지 않은 얼굴과 체형을 보는 순간.
천문석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명분!
전혀 닮지 않은 외모.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건 결국 보여주기 위한 명분이다.
응룡채가 흑사회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명분!
'동생이 맞았으니 형이 보복한다.'
강호의 누구라도 이해하기 쉬운 명분이다.
상황을 파악한 천문석은 재빨리 젊은 무사의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차피 얻을 건 다 얻었다.
지금은 흑도 방파의 모략이 이뤄지는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할 때다.
이때 청년의 몸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렸다.
“저기, 저기···! 저놈!”
강남 7우의 손가락이 왕웅을 가리켰다.
"저기 저놈이 나를 때렸다!"
순간 응룡채주 마일도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흑사회 놈이 내 동생을 때리다니! 당장 저놈을 내주지 않으면 끝장을 보겠다!"
여량위는 강남 7우가 지목한 사람이 왕웅이란 걸 확인한 순간.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밑바닥부터 흑사회주까지 올라온 여량위.
여량위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눈에 파악했다.
전혀 닮지 않은 응룡채주 마일도와 강남 7우라는 청년!
'이 수적 놈이 평소에도 내 도박선을 노리더니 잔꾀를 부리는구나!'
여량위는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마일도! 강남 7우, 저 청년이 네 동생이라고?!
"맞다!"
"마일도! 너 한 번이라 강남에 내려간 적이 있냐?! ‘강남’ 7우가 어떻게 네 동생이냐?!"
순간 당황하는 응룡채의 수적들.
“어? 그러고 보니. 우리 채주가 강남을 간 적이 있었나?”
“...친척이 강남에 사는 거 아닐까?”
“무슨 소리야? 우리 채주 가문 여기 토박이잖아. 십 대가 넘게 황원현에서 살았는데.”
마일도가 당황해 말을 버벅댔다.
“어, 그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이때 한 남자가 나타나 마일도의 귀에 속삭였다.
"...!"
확 펴지는 마일도의 얼굴.
마일도는 바로 여량위에게 외쳤다.
"강남 7우는 내 의형제다! 원래 강호의 남자들은 하룻밤 술자리에···."
갑자기 말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니 다시 나타나 마일도의 귀에 속삭이는 남자.
마일도는 강남 7우라는 청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시 외쳤다.
"...하룻밤 술자리에 '평생의 교분'을 나누고 친해져서 의형제 맺고 그러는 거다! 아- 넌 여자라 모르겠구나!?"
으하하하-
마일도가 웃음을 터트리며 비웃자,
응룡채의 수적들이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하-
여량위에게 쏟아지는 커다란 비웃음 소리.
마일도에게 명분과 주도권이 넘어간 것처럼 보일 때.
여량위는 내공을 담은 목소리로 번개같이 질문했다.
"의형제라고! 그럼 네 의형제인 강남 7우! 저 녀석 이름이 뭐냐!?"
"뭐···?"
순간 마일도는 눈을 껌벅이며 멍한 얼굴로 강남 7우라는 청년을 봤다.
"..."
대답 없이 청년만 바라보는 마일도.
마일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자리의 모두는 깨달았다.
'이름을 모르는구나!'
하룻밤 술자리에 의기투합해서 의형제가 되는 건 강호에서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의형제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이 순간 응룡채주 마일도의 주변에서 한숨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아-
...
한숨 뒤로 이어지는 응룡채 수적들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
"아니···. 일을 처리할 거면 좀 꼼꼼히 해야지!"
"그러게 말야. 뭔 의형제 이름도 몰라?"
"젠장! 쪽팔리게시리. 하아-"
“역시 우리채주 ....라니까.”
"쯧쯧쯧···."
...
마일도는 부하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혀 차는 소리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위기 때마다 마일도에게 속삭이던 남자가 상황을 수습하려 할 때.
마일도는 당혹과 부끄러움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됐어! 닥쳐! 빨리 저놈 내놔! 안 내놓으면! 너희 도박선 침몰시킨다!"
"뭐? 도박선을 침몰시킨다고···? 이런 미친놈이!"
여량위는 순간 마일도가 미쳤나 싶었다.
이 도박선에서 나오는 돈을 상납받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도박선이 침몰하면 일차적인 책임은 흑사회에서 지겠지만, 그 후폭풍은 응룡채에도 닿는다.
사자련. 마도 18문. 관청.
상납을 받던 윗분들의 분노가 응룡채에 쏟아지면 뒷감당이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온다고!?
여량위가 어이없어하는 순간,
마일도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면 도박선 지분을 넘겨줘도 괜찮고. '일할'이면 내 의형제의 상처받은 마음이 위로되겠다."
"...!"
여량위는 이제야 응룡채주 마일도의 진짜 속셈을 깨달았다.
평소에도 흑사회의 도박선을 탐내던 응룡채.
이놈들은 그동안 몇 번이나 도박선을 만들었으나 번번이 실패하기만 했다.
당연했다.
수적 놈들이 협박이나 할 줄 알지, 도박장 운영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응룡채 놈들은 번번이 실패하더니,
이제는 명분을 만들어 도박선 지분을 노리고 있었다!
강호의 명분을 앞세워서,
윗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노련한 심계!
순간 당무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여량위에게 향했다.
당무도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여량위가 어떻게 대처할지 살피는 것이다.
하-
여량위는 코웃음을 터트렸다.
평소라면 명분에 밀려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뒤에는 마도 18문에서 오신 극음도의 사자가 계시다!
이 사실만 밝히면 응룡채주 마일도는 당장 무릎을 꿇을 것이다.
그러나 의문이 하나 있었다.
멍청한 수적 마일도의 머리에서 이런 계획이 나왔을 리 없었다.
누군가 마일도에게 계획을 넘겼다!
'누구지?!'
여량위가 마일도와 응룡채 수적들을 살필 때,
흑사회 무사들이 갑판으로 뛰어 올라와 외쳤다.
"배 안에는 홍청방 놈들이 없습니다!"
뒤이어 사방에서 들려오는 보고들.
"...접근한 다른 배도 없습니다!"
"흑기당, 응룡채의 배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흑기당주 당무에게도 보고가 들어왔다.
"빠져나간 배는 없습니다!"
"모든 배의 수색이 끝났습니다!"
홍청방 사자와 수십 명의 무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여량위와 당무의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홍청방의 무사들이 사라지고 일다경이 지났을 뿐.'
'사라진 배는 없다.'
'한겨울의 호수에 맨몸으로 들어갔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순간 여량위와 당무의 시선이 마일도에게 향했다.
"결정했냐!?"
마일도가 외치는 순간,
아래로 움직이는 시선.
두 사람의 시선은 마일도가 타고있는 응룡채의 배에 닿았다!
여량위는 직감했다.
'홍청방 놈들! 저 배에 숨었구나!'
그리고 여량위는 깨달았다.
마일도 답지 않은 명분을 앞세운 치밀한 계획!
도망칠 곳 없는 도박선에서 대담하게 흑사회와 흑기당을 속였던 홍청방!
응룡채와 홍청방.
둘이 손을 잡았다.
아니, 홍청방 놈들이 뒤에서 모든 걸 조종했겠지!
모든 걸 깨달은 여량위는 내력을 끌어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빳빳하게 일어서는 장포!
거칠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
쿵, 쿵, 쿵-
두꺼운 갑판이 북처럼 울리는 순간,
여량위는 내공을 담아 벼락같이 외쳤다.
"마일도! 숨겨둔 홍청방 놈들을 내놔라!"
"...!"
귀신이라도 본듯한 얼굴이 된 마일도.
마일도는 깜짝 놀라 주위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뭐!? 어떻게 홍청방이 우리 배에 있는걸 알지!? 누가 누설했냐?! 누가 배신자냐!?"
순간 응룡채 수적들의 어이없어하는 시선이 마일도에게 모이고.
하아-
하아아-
...
깊은 한숨이 사방에서 터져 나올 때.
마일도에게 속삭이던 남자.
가면을 벗은 채 숨어있던 홍청방 사자가 벌떡 일어나 분통을 터트렸다.
"야, 이! 빡대가리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