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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28화 (129/1,336)

#128

쩡-

검이 허공을 꿰뚫는 순간.

일순 멈춰 파르르 진동하는 검!

천문석은 왼손으로 수인을 짚으며,

진동하는 검으로 다시 원을 그렸다!

파르르-

진동하는 검이 이미 수십 수백 번 그려진 원의 궤적을 지나가는 순간.

파르르르-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진동!

이 진동에 공명해 벽에 바짝 붙어선 흑사회, 흑기당 무사들의 몸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무공의 상리를 벗어나는 현상!

그러나 모두의 눈에는 의아함이 감돌았다.

특이한 진동만이 느껴질 뿐,

이 검에서는 냉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앞 이열의 극음도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모두의 눈에 의아함이 감도는 순간.

핑-

천문석은 원을 그리던 검을 멈추고,

돌연 검을 원 한가운데로 찔렀다.

파르르릉-

순간 호수에 커다란 돌을 던진 것처럼 원의 궤적이 폭발했다.

진동하는 원에서 시작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파동!

물결치는듯한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 물체와 접촉하는 순간.

파동이 닿는 모든 곳이 얼어붙었다!

쩌저저적-

천장이 얼어붙고,

바닥에 서리가 내려앉는다.

그리고 허공에서 생겨나는 새하얀 얼음 송이들!

허공에서 얼음 송이가 흩날리는 순간.

천장과 바닥에서 얼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고 몰아치는 엄청난 냉기!

순식간에 넓은 특실 전체가 한겨울 칼바람이 몰아치는 설원이 됐다.

천문석을 보는 모두는 경악해 입을 열지 못했다.

이열이 탁자 하나를 얼렸을 때,

이세기라는 이 사람은 특실 전체를 설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너무나 압도적인 광경에 이열을 데려온 흑기당주 당무마저 말을 잊었을 때.

쿵-

천문석은 검을 바닥에 박아넣고 흑사회주 여량위를 불렀다.

"여량위!"

순간 천문석의 의도를 깨달은 여량위는 탁자로 달려가 검은 두루마리를 챙겼다.

"당무. 이 멍청한 녀석!"

여량위는 속아서 가짜를 데려온 흑기당주 당무를 비웃으며,

검은 두루마리를 들고 와 천문석에게 공손히 바쳤다.

천문석은 당당히 두루마리를 들고 주위를 돌아봤다.

이의가 있으면 지금 말하라는 듯한 태도.

그러나 천문석이 만들어낸 압도적인 광경을 본 모두는 침묵했다.

기세등등한 흑사회와 여량위.

전전긍긍하는 흑기당.

그리고 진짜 극음도 이열마저 경악한 얼굴로 굳어진 채 천문석을 보고 있었다.

‘완전히 먹히고 있다!’

상황을 확인한 천문석은 장중한 움직임으로 검은 두루마리를 풀었다.

투둑-

넓게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마도 쟁투에서 승리한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의 사문은 '하늘에 묻는다.'이다.]

---

“...!”

천문석은 홍청방의 두루마리 속에 담긴 내용을 보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젊은 무사에게 향하는 시선!

'이거 헛소문이 아니었어?!'

천문석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홍청방의 사자에게 이 문장의 진위를 다시금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었다!

가면을 썼던 홍청방의 사자.

그리고 수십 명의 홍청방 무사들까지 모두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이때 여량위가 두루마리를 살피더니 깜짝 놀랐다.

"...홍청방 이 녀석들이 사기를!? 당무! 우리가 속았다!"

"뭐?"

당무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여량위는 두루마리를 펼쳐 당무에게 보였다.

단 한 줄만이 적혀 있는 두루마리.

게다가 이 한 줄의 내용은 여량위와 당무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홍청방 이 녀석들이! 헛소문을 정보로 팔았다고!?"

당무는 시선을 돌리는 순간 깨달았다.

어느새 탁자 위에 놓였던 은자 상자 두 개가 모두 없어졌고.

가면을 쓴 홍청방 사자와 수십 명의 홍청방 무사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

여량위와 당무.

밑바닥에서 시작해 흑사회주, 흑기당주에 오른 두 사람은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홍청방에 당했다!’

순간 여량위와 당무의 명령이 빠르게 떨어졌다.

"흑사회! 홍청방을 쫓는다! 모두 당장 움직여라!"

"흑기당! 홍청방 놈들을 잡는다! 매를 날려 쾌속선에 연락해라!"

서로 대치 중에 떨어진 명령에 의아한 얼굴이 된 흑사회와 흑기당 무사들.

"빨리 움직여라!"

"새끼들아 당장 움직여!"

당무와 여량위가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란 무사들은 우르르 선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여량위는 재빨리 천문석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은밀히 말했다.

"저 가짜 놈은 어떻게 할까요?"

천문석은 고개를 돌려 이열을 봤다.

여전히 우뚝 굳은 채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이열.

어느새 이열 옆에 있던 당무도 여량위 옆에 서서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진짜 극음도의 사자 이열은 완전히 가짜로 찍힌 상황.

그러나 진짜로 싸우기 시작하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삑삑이 검강 롱소드를 쓰지 않으면,

절정고수 이열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천문석은 재빨리 명령했다.

"저 녀석은 내가 처리하겠다. 당장 홍청방 사자를 잡아 와라! 산채로!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말고! 내가 확인할 게 있다."

"존명!"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량위와 당무는 깊게 고개를 숙이고 바로 특실에서 뛰어나갔다.

이제 특실에는 천문석과 이열, 젊은 무사만 남았다.

천문석이 진짜 극음도의 사자 이열을 처리하려 할 때, 젊은 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적힌 게 더 있는데요?"

"뭐?"

문득 고개를 내리자 땅에 떨어진 두루마리를 끝까지 펼친 젊은 무사가 보였다.

젊은 무사는 두루마리 끝을 천문석에게 내밀었다.

두루마리의 끝부분.

낙서처럼 작게 적힌 내용이 보였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소문인데. 천마의 이름이 '돌멩이'라는 소문이 있다. 마도 지존 천마의 이름이 '돌멩이'라니···. 이건 아무래도 헛소문···.]

"...!"

이 순간 천문석은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늘에 묻는다',

천문사(天問寺).

그리고 돌멩이(石)라는 이름.

천문석은 천문사를 물려받고,

어린 시절의 이름 '돌멩이'를 버리고 새롭게 이름을 만들었다.

천문사의 천문(天問)과 돌멩이의 석(石)을 합쳐,

스스로 지은 자신의 이름.

천문석(天問石).

마도 쟁투에서 승리한 천마는.

천문석.

전생의 자신이다!

---

천문사의 돌멩이.

천문석(天問石).

천하에 천문석이 둘이 있을 리가 없다.

천문석은 이 순간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

마도 18문의 정보를 얻기 위해,

도박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흑사회의 도박선 까지 왔는데.

어이없게도 마도 쟁투를 거치고 마도 18문의 지존,

천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전생의 천문석 자신이었다.

“...!”

천문석은 지금 마도 18문의 상황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지금 마도 18문은 마도 쟁투에서 승리하고,

천마의 자리에 오른 천문석에게 경악하고 있을 것이다.

우승 후보는커녕 마도 18문에 있는 줄조차 몰랐던 천문사.

천문사에서 갑자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녀석이 튀어나와서,

쟁쟁한 우승 후보가 양패구상한 틈에 천마의 자리에 올랐다.

"..."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

그러나 지금 가장 황당해하는 건 천마에 오른 전생의 천문석 자신이었다.

천문석은 전생의 이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속아서 들어간 마도 18문의 일문 천문사.

천문석은 마도 18문에서 빠져나오려 마도 쟁투에 참여했다.

마도 쟁투의 혼란 중에 은근슬쩍 강호로 도망쳐 바로 잠적할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 알뜰히 은자를 모으고, 여행준비에도 만전을 가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천문석이 마도 쟁투에서 승리하면서 모든 계획은 무산됐다.

수많은 우연과 어이없게도 양패구상한 멍청한 우승 후보 두 놈 때문에!

극음도와 화염도의 가주 두 사람!

생각해보면 전생의 인생 계획이 꼬이기 시작한 게 모두 그 두 놈 때문이었다.

이 순간 천문석은 지금껏 애써 신경 쓰지 않았던 의문 떠올랐다.

‘그런데 이게 지금 말이 되는 건가?’

자신은 '던전'에 들어와 있었다.

각성 스팟, 무림 던전.

그런데 이 던전 안의 세계는 과거 자신이 천마가 된 시대를 재현하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말이다!

평행 세계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의문을 가지는 순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던전은 일종의 포켓 디멘션, 주머니 차원이라고 한다.

이세계로의 통로, 게이트.

이세계의 환경을 투사하는 균열.

인간형 지적생명체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둘과는 달리,

던전은 다양한 시간대의 공간, 다양한 문명을 보여준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한가지 이론이 있었다.

던전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모사하는 일종의 스크린이라는 이론.

즉 이 무림 던전은 전생의 자신이 살았던 세상을 모사하는 일종의 주머니 차원이다.

천문석은 문득 머리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경악한 표정인 진짜 극음도 이열.

걱정스레 자신을 힐끔거리는 젊은 무사.

이들이 모두 주머니 차원 속 허상일 뿐이라고?

천문석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어이없어하는 순간.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파가 벽에서 쏟아졌다.

---

구으으응-

거대한 나무가 비틀리는 굉음이 터지는 순간.

바닥이 기울어졌다!

쓰으으윽-

쿵, 쿵, 쿵-

부서진 얼음 덩어리가 쏟아지고.

특실 안에 있던 탁자와 의자, 집기가 기울어진 바닥을 타고 미끄러진다!

으아악!

이 순간 천문석은 비명을 지르는 젊은 무사를 낚아챘다.

천문석은 미끄러지는 의자와 탁자를 피해 경사진 바닥을 달렸다.

천문석은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무언가가 도박선에 충돌했다!'

이 거대한 도박선이 기울 정도면 비슷한 규모의 배.

게다가 흑사회의 도박선을 들이박을 정도면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다는 것.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생각은 나중에 할 때.

지금은 최대한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천문석은 순식간에 바닥을 밟고 뛰어 선실 문으로 달려나갔다.

---

천문석이 사라지고 한참 후 경악한 채 굳어있던 이열이 고개를 들었다.

이열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불타는 이열의 눈에 담긴 것은,

가짜에게 농락당한 분노가 아니었다.

희열!

이열은 지금 이 순간 엄청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세기라는 가짜가 펼치는 극음도를 보는 순간 이열은 깨달았다.

가짜의 극음도는 자신의 극음도와 완전히 달랐다.

흑사회와 흑기당의 무사들이 가짜의 극음도에 담긴 엄청난 냉기에 경악할 때,

절정에 달한 이열은 극음도의 냉기 안에 담긴 본질을 느낄수 있었다.

말 그대로 극음(極陰).

냉기를 넘어선 헤아릴 수 없이 높은 무리!

놀랍게도 이세기,

저 가짜는 본가의 그 누구보다도 높은 수준.

아니, 차원이 다른 수준의 극음도를 펼쳤다.

극음도의 직계 이열은 직감했다.

이세기 저 가짜에게는,

본가에서 잃어버린 극음도의 정수가 있었다!

잃어버린 극음도의 정수를 찾기 위해서 강호를 떠돌던 수많은 선조.

극음도의 정수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열은 이세기가 했던 말과 행동,

펼쳤던 무공을 하나하나 곱씹었다.

극음도에 담긴 무리는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높지만, 본신의 내력은 이상할 정도로 낮았다.

기연을 만나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 무공을 익히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만약 직접 대결을 벌인다면···.

100이면 100!

자신이 이긴다!

이열의 머릿속에서 처음 흑기당을 찾았던 목적, 마도 18문의 정보획득은 잊혔다.

지금 이 순간 새로운 목표가 정해졌다.

이세기!

저 가짜를 잡아 잃어버린 극음도의 정수를 되찾는다!

이열은 섬뜩한 냉기를 흩날리며 천문석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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