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순간에도,
천문석의 표정은 한점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나 천문석의 머릿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치고 엄청난 속도로 생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극음도의 사자가 왜 여기서 나와?!’
‘뭐가 이렇게 공교로워!?’
그러나 의문을 품는 순간 답이 나왔다.
눈앞의 저 녀석.
진짜 극음도의 사자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갑자기 일어난 마도 쟁투.
마도 쟁투가 일어난 마도 18문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흑기방을 찾은 것이다.
자신이 흑사회를 찾았던 것처럼.
“...!”
어이없음을 넘어 기가 막힐지경이었다.
마도 18문의 18개 일파.
18개 중에 찍은 게 극음도인데,
하필 극음도의 사자가 여기에 나타났다!
1/18의 확률을 뚫고 당첨되다니!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갑판에 막혀 보일 리 없는 하늘.
그러나 가슴속에서 울분이 솟아올랐다.
이건 분명히 하늘의 저울이 수작을 부린 것이다!
천문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냉막한 인상의 청년을 다시금 확인했다.
몇몇 무공은 수련이 깊어질수록 특징적인 흔적이 신체에 남는 경우가 있었다.
피부가 단단해지는 철포삼,
손이 새하얗게 변하는 소수공.
...
상승의 무공은 그 정도가 심해서,
무공을 배운 사람의 성격과 체형마저 변화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무당 무공의 허허로움.
소림 무공의 용맹정진.
...
극음도를 익힌 사람도 마찬가지.
그 수준이 올라갈수록 신체와 기질에 뚜렷한 흔적이 남는다.
냉막한 인상,
전신에서 흐르는 한기.
뻣뻣한 관절과 하얗다 못해 창백한 낯빛.
손발도 엄청 찰 것이다.
젊은데도 극음도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는 육체.
육체에 새겨진 특징만 봐도 극음도를 하루 이틀 익힌 게 아니다.
은연중 밖으로 드러나는 기질을 보건데···.
최소 절정!
저 청년은 나이가 믿기지 않는 고수,
극음도를 수련한 진짜 극음도의 사자가 맞았다.
순간 천문석은 극음도를 익힌 청년과 자신을 견주어봤다.
100합!
검혼이 담긴 검강 롱소드를 쓰면 100합이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절정고수를 100합이면 이길 수 있다니!
천문석은 검강 롱소드에 새삼 감탄했다.
그러나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검강 롱소드를 써야만,
저 절정고수를 이길 수 있었다.
그냥 싸우면 진다.
“...”
천문석은 슬쩍 흑사회주 여량위의 눈치를 살폈다.
추호의 의심조차 없는 확신에 찬 여량위의 얼굴.
여량위는 천문석이 극음도의 진짜 사자라고 철석같이 믿은 채,
지금 당장이라도 공격 명령을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여량위 앞에서 '삑삑이 검강 롱소드'로 진짜 극음도와 싸우면?
퐁, 퐁, 퐁-
즐거운 소리와 진동을 듣는 순간.
여량위는 당연히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여량위뿐만이 아니다.
천문석은 슬쩍 주위를 훑었다.
자신을 주시하는 백여 명의 흑사회, 흑기당, 홍청당 무사들···.
대체로 수준이 낮으나 사이사이 실력자들이 있다.
게다가 흑사회주 여량위와 흑기당주 당무는 자신도 제법 신경을 써야 하는 고수다.
“...”
검강 롱소드를 쓰지 않으면 진짜 극음도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검강 롱소드를 사용하는 순간 파멸적인 결과가 기다린다.
[극음도 + 흑기당 + 흑사회]
VS.
[천문석]
백 명의 넘는 적들과 혼자서 싸워야 하는것이다.
위기였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위기!
---
'아. 시바···.'
그지 같이 돌아가는 상황.
하지만 욕하는 건 언제든지 할수 있었다.
지금 필요한 건 이 그지 같은 상황을 돌파할 계획이다!
천문석은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정체가 들키는 순간 극음도, 흑기당, 흑사회가 전부 달려든다.
일대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의 일기일원공으로는 이들을 모두 이길 때까지 검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있는 곳은 거대한 겨울 호수에 띄워진 흑사회의 도박선 위!
도망칠 곳은 없고 혹시라도 도망치다가 겨울 호수에 빠지면.
아무리 고수라도 육지에 도착하기 전에 저체온증으로 죽을 것이다.
천하십절급의 고수를 만나지만 않으면 위기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진짜 극음도의 사자가 나타나고.
우연이 겹치고 겹쳐 위기 상황에 빠졌다!
'어떻게 하지?'
이때 말없이 천문석의 전신을 훑어보던 냉막한 청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네가 극음도를 익혔다고? 그 몸이 극음도를 익힌 육체라고?"
청년도 천문석처럼 신체에 드러난 특징을 확인한 것이다.
"이런 가짜 놈이 감히!"
여량위가 발끈해 앞으로 나서는 순간,
흑기당주 당무도 기세를 끌어올리며 나섰다!
"여량위! 말을 조심해라!"
천문석과 여량위.
진짜 극음도와 당무.
흑사회와 흑기당,
두 세력이 대치하는 순간.
"...!"
천문석은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눈앞의 냉막한 청년.
진짜 극음도의 사자와 직접 싸워서 이길 필요는 없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흑사회와 흑기당이다!
흑사회와 흑기당에게 한 가지만 확신시키면,
자신이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확신!
가짜인 천문석이 '진짜 극음도의 사자'라고 믿게만 하면 된다!
그리고 보여주는 것만이라면,
자신은 극음도의 후계자보다 더 '완벽한 극음도'를 펼칠 수 있었다!
그 전에 확인할 것이 있었다.
천문석은 재빨리 표정을 근엄하게 바꾸고,
낮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극음도의 청년에게 물었다.
"난 이세기다. 넌 이름이 뭐냐?"
"이열!"
진짜 극음도의 사자 이열이 답하는 순간,
천문석은 이열의 얼굴을 주시하며 질문했다.
"넌 '관음'을 봤냐?"
"...?"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이열.
이열의 표정을 본 순간,
천문석은 답을 얻었다.
'이 녀석들! 아직 모르는구나!'
마도 18문의 일문 극음도(極陰刀).
극음도는 무공의 이름이며 일파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극음도(極陰刀)는 관음사의 무공이었다.
극음도의 원래 명칭은 관음천수도(觀音千手刀).
그러나 관음(觀音)과 극음(極陰)으로 한자가 다른 것처럼.
이 멍청한 녀석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사문이 ‘관음사’란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천문석은 완벽한 자신감으로 외쳤다.
"내가 진짜 극음도의 사자다! 이 가짜 놈아!"
---
천문석이 외치는 순간, 선실 안의 모두는 충격에 빠졌다.
극음도의 사자 두 명이 나타나,
서로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상황!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괴사가 벌어졌다.
천문석은 당당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 고개를 빳빳이 든 여량위와 안절부절못하는 젊은 무사.
이런 자리에서는 분위기가 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법!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을 펼치며, 전법륜인의 수인을 짚었다.
지금 전법륜인에 담을 것은 위엄!
전생 천마, 절대자의 위엄을 전법륜인에 담아 퍼트린다!
쿵, 쿵, 쿵-
무공을 모르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거침없이 걷는 천문석.
천문석의 얼굴에 권태와 귀찮음, 짜증과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권력자의 표정과 전법륜인으로 전해지는 전생 천마의 위엄이 어우러지는 순간.
서로 대립하던 흑기당과 흑사회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흑기당의 무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위축될 때.
흑사회의 무사들은 허리가 펴지고 가슴속에서 맹렬한 불이 타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어느새 기세를 탄 흑사회 무사들은,
천문석을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일제히 한 발 내디뎠다.
쿵-
이들이 일제히 한걸음 내딛는 순간,
위축된 흑기당의 무사들은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섰다.
‘기세에서 밀리다니!’
대경한 흑기당주 당무가 버럭 소리치려 할 때.
"검."
천문석이 어느새 멈춰선 채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량위는 다급히 향주에게서 검을 넘겨받아 천문석에게 바쳤다.
천문석은 가볍게 검을 쥔 채 이열에게 선언했다.
"누가 진정한 극음도의 사자인지는 그 검을 펼쳐 보면 드러날 일! 어떤가?"
"지금 나 이열하고, 극음도로 겨루자고? 게다가 검을 들고? 하-"
이열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손을 휘젓는 순간.
휘잉-
이미 이열의 손에는 날렵한 칼이 들려 있었다.
다급히 사방으로 물러나는 사람들.
어느새 이열과 천문석 주위에는 넓은 공간이 생겨 있었다.
그리고 백여 명의 무인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진짜 극음도 이열의 극음도가 펼쳐졌다.
휘이잉-
한겨울 서릿발을 휘감은 도격!
극음도의 사자, 이열의 날렵한 도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새하얀 서릿발이 뻗어 나가고 섬뜩한 냉기가 퍼져 나갔다.
섬뜩한 냉기를 머금은 날카로운 도격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는 사람들.
어느새 천장과 바닥에는 서리가 내려앉았고,
흑사회와 흑기당의 무사들은 벽으로 바짝 붙어있었다.
이들 모두는 거대한 화로가 몇 개나 있음에도,
극음도의 도격에서 전해지는 냉기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 도.
이열의 칼이 중앙의 탁자를 꿰뚫는 순간.
쩌저적-
한순간 탁자 위에 내리는 두꺼운 서리!
탁자는 순식간에 서리에 뒤덮여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극음도!
강호에서 풍문으로 듣던 그대로의 극음도!
흑기당의 무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아-
쿵, 쿵, 쿵, 쿵-
엄청난 환호성과 발 구름 소리.
위축됐던 흑기당 무사들은 투지를 되찾고 미친 듯이 환호했다.
이 순간 불안해하는 흑사회 무사들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모였다.
천문석은 말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가짜 극음도 천문석의 진짜 극음도가 펼쳐졌다.
---
부드럽게 원을 그리는 천문석의 검.
검이 원을 그리는 순간,
천문석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전생의 천문석은 천마 신공의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마도 18문이 기원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미 끊긴 마도 18문의 전통을 되살렸다.
오래전 천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도 18문의 본산 아래,
마굴로 홀로 들어간 것이다.
불타는 하늘과 달아오른 대지.
지옥 같은 마굴 속에 들끓는 수천수만의 요마괴이(妖魔怪異)!
천문석은 마귀와 마졸들을 쳐 죽이며,
무한히 넓은 마굴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길을 열었다.
천문석은 이 마굴 속에서 마도 18문에서는 잊혀진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가 마도 18문을 구성하는 18 일파의 기원이다.
사찰.
어이없게도 마도의 하늘,
마도 18문의 일파는 상당수가 그 근원을 사찰에 두고 있었다.
자신의 사문 천문사가 생뚱맞게 마도 18문에 들어있었던 게 아니었다.
원래 마도 18문에 소속된 일파들의 기원 대부분이 사찰이었다.
마도 18문의 기원을 찾았으나,
의문이 풀리긴커녕 더 많은 질문이 생겨났다.
사찰이 어째서 마도 18문이 되었던가?
불가의 무공이 어째서 마공이 되었는가?
천문석은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마도 18문의 기원인 사찰들의 무공을 직접 조사하고 익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극음도의 원형을 복원해 냈다.
관음천수도(觀音千手刀).
그러나 관음천수도로도 천마 신공의 부작용을 해결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니 실패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상황이 악화했다.
관음천수도를 익히는 순간,
벽에 막혔던 천마 신공의 경지가 더 높아진 것!
불문의 무공을 익혔는데,
마공의 경지가 오르다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다.
과거를 회상하던 천문석은 내심 웃음을 삼키며 원을 그리던 검에 일기일원공을 실었다.
지금의 경지로는 완전한 관음천수도를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관음천수도에 닿기 위한 과정,
보여줄 뿐인 극음도를 펼치는 거라면 지금의 경지면 충분했다.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으나,
거기에 담긴 무리만은 아득히 높은 진정한 극음도!
이 순간 일기일원공이 실린 검이 허공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