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흑사회 무사들은 천문석과 젊은 무사를 창 하나 없는 마차에 태웠다.
벽과 천장에 둘려진 두꺼운 철봉들,
마차 안 곳곳에 남은 검붉은 핏자국.
이 흔적들이 그동안 이 마차가 어떻게 쓰였을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 마차는 실상 흑사회의 죄수를 실어나르는 함거였다.
"...괜찮을까요?"
젊은 무사가 긴장한 얼굴로 사방의 핏자국을 살필 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이이잉-
말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일정한 진동이 느껴질 때.
퉁, 퉁, 퉁-
사방을 확인한 젊은 무사가 마차 바닥을 두들겨 보더니 반색했다.
"이 바닥에는 철봉이 없습니다! 뚫을 수 있겠는데요!"
"그러냐?"
탈출로를 찾았음에도 천문석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답했다.
젊은 문사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걱정도 안 되십니까? 지금 흑사회 회주한테로 끌려가고 있는데···. 그냥 흑도 조무래기가 아니라. 흑사회라니까요? 지금이라도 바닥을 뚫고 도망치죠?"
천문석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야. 걱정할 것 없어. 지금 다 내 계획대로 돼가는 거야."
"아니···. 그래도 상대가 흑사회 회주인데···."
천문석은 품 안에서 책을 꺼내 흔들었다.
“우리에겐 이게 있잖아! 걱정할 것 없다.”
“...”
젊은 무사는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천문석을 봤다.
자신이 안내하던 중 책방에 들러 사들인 빈 책.
이 손님분은 이 빈 책에 붓과 먹물을 빌려 일필휘지로 무언가를 적었다.
“...그게 뭔데. 걱정할 게 없어요? 무공 비급이라도 됩니까?”
천문석은 대답 없이 씨익 웃으며 검을 움직였다.
툭-
젊은 무사가 소중히 안고 있는 면포 주머니를 건드리는 천문석의 검!
"이 은자 누가 땄냐?"
순간 젊은 무사의 눈빛에 맺히는 뜨거운 존경심!
"하- 정말 기막힌 솜씨였습니다! 존경합니다! 부럽습니다! 마무리로 눈탱이를 친 것까지 완벽했습니다!"
젊은 무사는 연신 탄성을 터트리며 감탄했다.
천문석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대답했다.
"부러워할 것 없어."
"네?"
"그거 원래 누구 돈이냐?"
"도박꾼이요?"
천문석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도박장에서 고용한 바람잡이랑 사기 도박꾼도 많았잖아. 그거 반은 흑사회 돈일걸? 우린 흑사회주 돈을 털어먹은 거야."
순간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천문석을 보는 젊은 무사.
'뭐지, 이 사람은?'
흑사회 돈을 따고 바람잡이와 사기꾼들을 폭로해 도박장의 영업에 깽판을 쳤다.
그렇게 깽판을 치고도 흑사회 향주 앞에서 태연히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해결할 방법이 있나 싶었는데 마지막 순간 천검 이세기라고 구라를 쳤다.
그리고 이제는 빈 책을 흔들며 걱정할 게 없다고 말한다.
"..."
처음 유흥가에 갔을 때부터 정신없이 일어나는 사건들.
구라를 치고 흑사회 회주에게 끌려가는데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저 모습!
장가장에서 일한 지 일 년도 안 됐지만, 그동안 수많은 손님을 안내했다.
그러나 눈앞의 손님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빡빡 깎은 머리로 봐서는 사파의 사람 같기는 한데···.
혹시 사자련의 고수인가?
무림맹, 마도 18문과 함께 정사마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파 연합, 사자련.
이 손님이 사자련의 고수라면 저런 태연함이 이해가 갔다.
사자련 고수의 인맥이라면 흑사회주 정도 내리누르는 건 일도 아니니까.
젊은 무사는 정말 사자련 사람인지 질문하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말을 삼켰다.
“...”
자신은 장가장에 속한 호위 무사다.
손님께서 아무리 격의 없게 대하신다고 선을 넘어서는 안 됐다.
이때 번쩍 고개를 드는 천문석.
"다 왔군."
천문석이 말하는 순간 마차가 멈췄다.
끼이익-
그리고 거칠게 문이 열리며 왕웅의 모습이 보였다.
"나와라."
---
마차가 멈춘 곳은 부둣가였다.
왕웅은 천문석과 젊은 무사 두 사람을 배에 태웠고,
두 명이 탄 배는 청해(靑海) 호수 안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천문석은 배에 가득한 흑사회 무사들을 슬쩍 보고 주위를 살폈다.
어제와 달리 맑은 겨울 밤하늘,
보름달로 환한 호수 위에는 불을 밝힌 놀잇배들이 띄워져 있었다.
한겨울의 뱃놀이라니,
얼어 죽기 딱 좋았다.
그러나 호수에 띄워진 놀잇배의 수는 백여 척을 훌쩍 넘었다.
이때 한 척의 놀잇배가 천문석이 탄 배를 스쳐 지나갔다.
이 순간 즐거운 웃음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불티를 날리는 커다란 화로가 있는 놀잇배 위에는,
값비싼 털가죽 옷을 입은 한량과 기녀들이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즐겁게 웃고 노래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멀어지는 놀잇배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오늘 하루 몇 번이나 생각하게 된다.
이곳이 진짜 던전인가?
화내고, 싸우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이곳이 던전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전생의 무림으로 돌아온 듯한 감각에 천문석은 쓰게 웃었다.
이때 들려오는 목소리.
"실컷 웃어 둬라. 이제 곧 영원히 웃지 못할 테니까."
천문석 바로 앞에 앉은 흑사회 향주, 왕웅.
왕웅이 천문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이 분이 누구신 줄 알고!"
젊은 무사가 발끈해서 나서는 순간.
왕웅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이분이 누구신데?"
“...”
젊은 무사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장가장, 철권 대협이란 말은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은 상황.
사자련이라는 이름도 자신의 추측일뿐이니 언급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손님 진짜 이름도 모르고 있다.
"..."
젊은 무사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왕웅의 입가에 걸리는 비웃음.
이때 천문석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그래서 내가 누군데?"
‘아니···. 이 손님까지 왜 이래?’
젊은 무사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은자를 엄청 많이 따신 도박의 신성이십니다."
"그거 맘에 드네. 도박의 신성. 도신!"
"네? 도신(賭新)이요? 그게 무슨."
천문석은 어이없어하는 젊은 무사에게 한 움큼의 은자를 건넸다.
"받아라. 도신의 선물이다."
"...!"
"뭐···? 너 뭐 하는 짓이냐?"
깜짝 놀라는 젊은 무사와 왕웅.
천문석은 놀라는 왕웅을 보며 사방으로 은자를 던졌다.
툭, 툭, 툭-
배 곳곳에 서 있는 흑사회 무사들 앞에 떨어지는 은자들.
"넣어둬라. 말단 무사로 얼마나 벌겠냐? 날도 추운데 그걸로 뜨끈한 국밥이라도 사 먹어라."
"야! 줍지 마라! 도박장 돈이다! 그대로 가져와라!"
왕웅이 사방으로 눈을 부라리며 외쳤지만, 어차피 뒷골목 인생들이다.
게다가 이런 흑사회 같은 흑도 방파는,
이익 대부분을 상층부에서 독식한다.
흑사회 소속 무사라고 도박장이나 유흥가에서 거들먹거리고 다니겠지만, 실상은 삼류 무인.
저 녀석들의 주머니는 빈 깡통일 가능성이 컸다.
천문석의 예상대로였다.
흑사회 무사들이 자기 앞에 떨어진 은자를 주워 향주인 왕웅에게 가져 왔으나.
돌아온 은자는 천문석이 던진 은자의 반도 안 됐다.
"아니. 은자 아깝게 시리. 왜 쟤네들한테도 줘요."
젊은 무사가 투덜거렸지만,
천문석은 은자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은자는 이 안에서만 쓸 수 있는 게임머니나 마찬가지.
이 은자로 흑사회 녀석들의 조직력을 확인했으면 남는 장사였다.
천문석이 내심 음흉한 웃음을 흘릴 때.
눈앞에 화려한 등으로 밝혀진 거대한 배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흥겨운 환호성 소리!
흑사회의 도박선 이다!
천문석 앞에 서 있던 왕웅이 몸을 일으키며 으르렁거리는 어조로 경고했다.
"이곳에 회주님이 계시다. 회주님 앞에서는 입을 조심해라."
천문석은 말없이 화려한 도박선을 훑어봤다.
자신이 도박장에 난장판을 만들었던 이유가 눈앞에 있었다.
지금의 마도 18문에 대해서 누구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을 '사람'.
흑사회주가 저 배 안에 있는 것이다!
---
흑사회, 삼합회, 흑기당···.
도시의 밤과 뒷골목을 지배하는 수많은 흑도 방파들.
얼핏 들으면 멋있고 엄청 세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강호의 먹이사슬에서 아래에 있었다.
정사마의 세 축.
무림맹으로 대표되는 정파.
사파 연합체, 사자련.
마도 18문, 마도.
그리고 각 지역의 명문 세가와 관청까지.
흑도 방파는 이들 모두의 눈치를 보고,
정사마, 세가, 관청 모든 곳에 유무형의 대가를 상납해야 했다.
돈과 정보.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까지.
즉 마도 쟁투가 벌어지고,
마도 18문에 새로운 천마가 들어선 지금.
마도 18문의 소식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흑도 방파의 회주, 방주들이었다.
상납 대상의 우두머리 천마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상납 대상의 취향과 기호를 파악하고,
기존의 기득권을 인정받을 최고의 선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천문석이 이곳까지 온 것이다.
눈앞의 '흑사회주'를 만나,
마도 18문의 정확한 소식을 들으러!
...
천문석은 자신의 의도를 적당히 요약해서 설명했다.
천문석의 설명이 끝나자,
화려한 선실 안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호피가 깔린 긴 의자에 옆으로 늘어지게 앉은 젊은 여자가 담뱃대를 털었다.
순간 담뱃대 밑으로 받쳐지는 은접시.
톡, 톡-
여자는 은접시에 재를 털어내고 길게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뿜어냈다.
후우우-
푸르스름한 연기가 허공으로 뿜어지는 순간.
선실 벽에 늘어선 흑사회의 향주들과 무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검은 무복 위에 아무렇게나 비단 장포를 걸치고,
대충 묶어 올린 머리카락에 비도를 꽂아 고정한 젊은 여자.
이 젊은 여자가 흑사회주, 여량위였다.
일개 도박사로 시작해 흑사회주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여량위.
흑사회주 여량위는 부하들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도시에서 가장 큰 도박장이 날아갔다.
흑사회주 여량위의 손짓 한 번이면,
당장 이곳은 피바다가 된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천천히 흩어질 때.
흑사회주 여량위가 입을 열었다.
"너 재밌는 녀석이구나?"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가.
"흑사회 회주한테. 뭐? 정보를 얻으러 왔다고? 하하하-"
여량위는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순간 천문석은 같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에 잡혀 온 거라고?"
"맞다."
“도박장에서 깽판 친 것도 그것 때문이고?”
“그렇지.”
“그래서 이제 흑사회주인 내가. 마도 18문의 사정을 너한테 말해줘야 하고?”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다.”
천문석이 대답하는 순간.
여량위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이거 미친 새끼 아냐?”
여량위의 웃는 얼굴이 선실 벽에 죽 늘어선 향주들과 부하들을 향했다.
동의를 구하는 눈빛.
그러나 흑사회의 무사들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회주의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하- 이런 눈치 없는 새끼들···."
흑사회주 여량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부하들을 보다가 짧게 명령했다.
“웃어.”
여량위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사방에서 웃음소리와 험악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저런 미친 새끼.”
“하- 저런 상등신을 봤나!?”
“회주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저놈 머리를 뽑아 버리겠습니다!"
"저는 허리를 뒤로 접겠습니다!"
"왕웅. 멍청한 곰 새끼를 당장 처벌해야 합니다!"
...
여량위는 느긋하게 호피 의자에 기대앉은 채,
한동안 부하들의 험악한 외침을 듣다가 문득 손을 저었다.
순간 웃음이 뚝 그치고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량위는 다시금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 천문석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무거워지는 공기.
흑사회의 향주와 무사들이 바짝 긴장해 여량위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때.
여량위는 미소지은 채 물었다.
“그럼 이제.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