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옥탑방 거실.
천문석은 류세연과 저녁을 먹던 중에 생소한 감각을 느꼈다.
허전함.
십 년 넘게 이 거실에서 류세연과 같이 밥을 먹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거실이 휑하게 느껴졌다.
"오늘 좀 허전하지 않냐?"
천문석이 문득 말하자,
류세연이 아쉽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네. 꼬맹이가 없으니까. 좀 허전하네."
"...!"
이제야 천문석은 왜 거실이 휑하게 느껴지는지 깨달았다.
요리와 반찬을 먹을 때마다,
리액션을 하던 특급 헌터 꼬맹이.
특급 헌터 꼬맹이가 오늘은 없었다!
"하- 이런 MSG 같은 녀석!"
풋-
류세연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특급 헌터 있다가 없으니까. MSG가 없는 것처럼 엄청 허전하네."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류세연에게 말했다.
"나 던전 갔을 때. 꼬맹이 놀러 오면 여기 방에서 놀게 해라. 걔 옥상에서 너무 놀아서 얼굴에 팔다리가 다 탔더라."
"특급 헌터는 탄 게 좋다던데?"
"...탄 게 좋다고?"
"약간 타야 좀 무섭고 강하게 보여서 좋데. 특급 헌터는 언제나 무섭고! 강하고! 고독해! 보여야 한다던데?"
류세연은 웃으며 특급 헌터의 말투를 흉내 냈다.
"고독은 또 뭐야? ...다음에 그렇게 말하면, 앙꼬는 하얀 피부를 좋아한다고 말해줘. 바로 먹힐 테니까."
앙꼬라는 단어를 들은 류세연이 솔깃한 표정으로 천문석을 봤다.
"앙꼬면 꼬맹이가 좋아하는 아이? 걔 어떤 아이야? 꼬맹이 말을 들으니까 완전 천사던데?"
"..."
순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앙꼬와의 기억.
먹던 사탕을 강제로 먹인 후 그지라고 놀렸다.
그리고 광란의 원시 부족 축제의 희생양으로 삼았었지···.
신발, 탄성볼, 장난감···. 먹던 과자와 어린이 젤리를 강제로 먹이려던 광기 어린 꼬맹이들이 지금도 꿈에 나왔다.
지옥의 악마 같은 꼬맹이 놈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키즈카페에 갔을 때도 앙꼬의 명령에 악마 꼬맹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
천문석은 이 순간 깨달았다!
키즈카페의 권력 구조를!
[앙꼬 > 특급 헌터 > 악마 꼬맹이들]
앙꼬가 숨겨진 흑막이었다!
천문석은 깨달음을 담아 류세연에게 말했다.
"앙꼬 얼굴은 천사인데, 사실은 악마 꼬맹이들의 우두머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천사인데 악마라고? 악마 꼬맹이들? 키즈카페 알바했다고 너무 편파적인 거 아냐? 흐흐흣-"
농담인 줄 알고 웃으며 대답하는 류세연.
"야! 네가 직접 안 겪어서 그래. 걔 장난 아냐! 엄청 무서운 아이라니까!"
천문석은 진실을 말했으나,
류세연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 그렇다고 해. 그런데 이번 던전은 준비할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장민 언니에게 듣기는 했는데···. 정말로 짐 하나도 안 가져가는 거야? 상비약도 필요 없어?"
세연에게는 일주일 정도 던전에 간다고만 말하고 각성 던전의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는 않았다.
장민 대표와 이야기를 했으니,
혹시 일정이 지연되면 장민 대표가 세연에게 말할 것이다.
"맞아. 이번에 가는 던전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더라. 저것만 빼고 말이지."
천문석은 음악 예능이 나오는 텔레비전 옆,
무장 박스에서 꺼내 세워둔 롱소드를 가리켰다.
"총 없이 괜찮을까?"
류세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거 보통 롱소드가 아니다. 천하십절중에 검절로 이름 높은 천검의 검혼이···."
"하여간에 허풍은!"
류세연은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이번 던전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고?"
"아마도? 장민 대표님이 자세한 건 알고 있으니까. 혹시 길어지거나 하면 장민 대표님이 말해줄 거야."
류세연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삼촌 괜찮은 거 맞아?"
"뭐?"
류세연은 작게 말했다.
"계좌 잔액···."
"계좌 잔액? 그게 왜?"
"...요새는 알바를 안 하잖아? 전에는 쉴 새 없이 알바하더니···. 그래서 혹시 힘든가 해서."
생각해보니 그랬다.
밤과 새벽에는 치열하게 수련했지만,
낮에는 집에서 빈둥거리는 모습만 보였다.
낮에 집에서 빈둥거리다니!
매일매일 치열하게 알바하던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빡센 이세계 배송 경주에서 입은 몸과 마음의 타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휴식이었다.
이때 류세연이 천문석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혹시 힘들면 말해···."
"응?"
문득 고개를 드니,
류세연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감이 왔다!
'이 녀석 생활비가 떨어졌을까 봐 걱정하는구나!'
순간 가슴속에서 차오르는 웃음.
오늘 계좌 잔액 최대치를 갱신한 나를 걱정한다고?!
"글쎄 요새 좀 힘들긴 하다."
천문석은 툭 던지듯이 말하고, 휴대폰을 꺼내 은행 앱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인증 후 류세연에게 밀어줬다.
"내 계좌 잔액 한번 봐줄래?"
"많이 힘든 거야? ...빌려줄까? 나 여유 있는데."
류세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휴대폰을 봤다.
그리고 굳어졌다.
"어, 어? 어!"
당황한 얼굴로 계좌 잔액과 천문석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류세연.
류세연은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이게 뭐야!?”
“이거 진짜야?!”
“이거 '0' 이 도대체 몇 개야?”
“오빠 완전 부자잖아!”
“이게 웬일이야?!”
“오빠, 헌터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
깜짝 놀란 류세연의 외침이 이어질수록,
어깨가 으쓱하고 콧대가 높아지는 것만 같았다.
천문석은 내심을 숨기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시크하게 대답했다.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고. 뭐 적당히 일하니까 계좌가 그렇게 됐네."
사실 개고생을 하며 번 돈이지만,
천문석은 별것아니었다는듯 허세를 부렸다.
류세연의 탄성이 담긴 목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우와-"
"완전 부럽다!"
"오빠! 금방 부자 되겠어!?"
"이러다가 곧 건물주도 되는 거 아냐?!"
...
이것이 인정받는 쾌감인가?
류세연의 놀람과 탄성이 너무나 달콤하게 들려왔다.
계좌 잔액에 찍힌 숫자는,
자신의 노력이 계량화되어 찍힌 지표였다.
류세연의 찬탄에 그동안의 노력이 인정받는 느낌이 들어,
천문석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때 문득 머리에 박히는 단어가 있었다.
'건물주!'
천문석은 바로 류세연에게 말했다.
"내 휴대폰. 네이버 부동산 들어가서 즐겨찾기 건물 가격 좀 봐주라. 제일 위에 있는 건물."
익숙하게 휴대폰을 조작해 네이버 부동산에 들어가는 류세연.
류세연은 말없이 휴대폰을 천문석에게 돌려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100억을 향해가던 건물 가격이 120억이 되어있었다.
"...괜찮아?"
세연의 조심스러운 질문.
그러나 천문석은 웃었다.
통장 잔고가 1억을 넘기는 동안,
건물 가격은 20억이 넘게 뛰었다.
예전이라면 실망해서 크게 낙담하고.
부동산 가격 상승이 너무나 빠르단 것에 분통을 터트렸을 거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이미 '당첨된 로또'가 있었다.
천문석의 시선이 당첨된 로또, 롱소드로 향했다.
천하십절중 검절.
천검 이세기의 검혼을 담은 검!
저 검의 검혼을 완전히 깨우기만 하면,
120억의 건물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문석은 참을 수 없는 희열에 류세연에게 휴대폰 화면 속 건물을 보여주며 말했다.
"건물주 '대리'. 이 건물 잘 봐라."
"...?"
"조만간 나는 이 건물을 사서 '완전한' 건물주가 될 것이다! 카카카-"
류세연은 의아해하는 눈으로 휴대폰 속 건물을 봤다.
"그 건물을 산다고?"
"그래! 내 오랜 꿈이 이제 곧 이뤄진다! 난 '건물주', 넌 건물주 '대리'! 이제 급이 달라지는 거지! 카캬카- "
"..."
천문석이 웃음을 터트릴 때,
류세연은 말없이 휴대폰 속 120억짜리 건물을 살폈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작게 속삭였다.
"이 건물이 오빠 꿈이란 말이지?"
"...너 뭐라고 했냐?"
"아냐 아무것도."
류세연은 시침을 뚝 뗐고,
천문석은 의아한 눈으로 이런 세연을 봤다.
"너, 수상한데···?"
“뭐가 수상해? 얼른 밥 먹자!”
평소처럼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다음 날 새벽.
천문석은 무림 던전 행 장갑 버스를 타기 위해 새벽 04:50분 첫차를 탔다.
자주 타 이제는 익숙한 273번 버스.
목적지는 광화문 재금 빌딩 지하 주차장이다.
그곳이 무림 던전 행 장갑 버스가 출발하는 장소였다.
---
천문석이 나간 후 텅 빈 옥탑방.
킥, 키킥-
신발장 안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오래된 운동화 속에 불쑥 고개를 내미는 새끼 다람쥐.
새끼 다람쥐는 조심스레 신발장 틈으로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신발장 밖으로 완전히 나와 방 안 곳곳을 살피는 새끼 다람쥐.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새끼 다람쥐는 벽을 타고 펄쩍 뛰어올라 빛의 날개막을 펼쳤다.
휘이잉-
새끼 다람쥐는 허공을 활강해서 싱크대 위 찬장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능숙하게 찬장을 열고 자신의 보물들을 확인한다.
천상의 맛을 주는 갈색의 길쭉한 덩어리.
단단한 통속에 담긴 짭조름한 분홍색 덩어리.
바스락거리는 포장 속 꽈득꽈득 부셔 먹을 수 있는 새하얀 식품까지.
찬장 속 보물들을 확인한 새끼 다람쥐는 이번에는 냉장고로 날아가 능숙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갑자기 겨울 된 듯한 차가운 냉기가 쏟아지고,
냉기 상자 안에 가득 들어있는 음식들이 보인다.
달콤 시원한 빨간 과일,
녹색의 달달하고 상큼한 과일.
...
식량은 충분했다!
킥, 키킥-
식량 확인을 끝낸 새끼 다람쥐는 안도했다.
힘 대부분을 잃고, 도토리 숲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식량은 아주 중요했다!
다행히 자신이 잠시 신세 지는 이곳의 인간들은 엄청난 부자인지,
매일매일 집 안에 식량을 가득 채워 놓고 있었다.
'이 인간들을 부하로 삼아줄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
그러나 고귀한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 일족이 아무나 부하로 삼을 수는 없었다.
킥, 키킥-
새끼 다람쥐는 좀 더 심사숙고하기로 하고,
벽을 타고 뛰어올라 다시금 빛의 날개를 펼쳤다.
파슥-
빛에 번뜩인 순간, 현관문 밖으로 도약한 새끼 다람쥐.
며칠 동안 몰래 주위를 살핀 것처럼.
오늘도 도토리 숲을 찾아 주위를 확인해야 했다.
단거리 도약만 가능한 지금은,
직접 하늘을 날아서 도토리 숲을 찾아야 했다.
새끼 다람쥐는 오늘은 좀 더 멀리까지 돌아보겠다고 다짐하고 날개막을 넓게 펼쳤다.
휘이이잉-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오를 때.
생경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냐아아아-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끼 다람쥐 앞.
작은 새끼 고양이가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깜짝 놀란 새끼 다람쥐가 도약하려는 순간.
냐아아-
새끼 다람쥐를 꽉 무는 작은 고양이!
키이익-
다음 순간 새끼 다람쥐와 작은 고양이가 동시에 사라졌다.
파슥, 파슥, 파슥-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하늘에서 섬광이 연속으로 번뜩였고.
냐, 냐, 냐아-
킥, 키킥, 키키킥-
섬광이 번뜩일 때마다 작은 고양이와 새끼 다람쥐의 울음이 연속으로 터졌다.
새끼 다람쥐가 엄청 아프게 물 때마다,
쉴 새 없이 앞발을 휘두르는 작은 고양이.
엄청난 속도로 새끼 다람쥐와 작은 고양이는 서로를 공격했다.
치열한 격전이 이어지다가 해가 완전히 떴을 때,
힘이 빠진 작은 고양이와 새끼 다람쥐가 동시에 옥상에 뚝 떨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옥상에 울려 퍼지는 씩씩한 외침.
"특급 헌터가 왔···. 아, 들을 사람이 없구나. 그래도 특급 헌터가 왔다!"
신나게 외친 특급 헌터가 씩씩하게 옥탑방으로 걸어가다가 바닥에 쓰러진 고양이와 다람쥐를 발견했다.
"앗! 냠냠이가!? 엇! 이 다람쥐는 뭐지?!"
자신이 칼로리 바를 챙겨주던 고양이와 처음 보는 다람쥐가 같이 쓰러져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란 특급 헌터.
특급 헌터는 재빨리 고양이와 다람쥐를 조심스레 손에 올리고 능숙하게 옥탑방 번호키를 누르고 외쳤다.
"실례하겠습니다!"
다다닥-
특급 헌터는 다급히 달려 거실에 상을 펴고 고양이와 다람쥐를 올렸다.
"냠냠아! 다람쥐야! 정신 차려!"
냐아-
키이익-
힘겹게 우는 고양이와 다람쥐!
둘 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특급 헌터는 재빨리 메고 있던 가방을 뒤집어 쏟았다.
우르르 쏟아지는 물건들 사이 건강해지는 샐러드와 야채 주스 그리고 작은 물병이 보였다.
먹다 남은 포션을 담아둔 물병!
특급 헌터는 재빨리 냠냠이에게 포션을 먹였다.
그리고 다람쥐에게 포션을 먹이려는데!
상 위의 다람쥐가 사라졌다!
"앗! 어디 간 거지!?"
깜짝 놀라 주위를 살피니 어느새 현관까지 기어간 다람쥐가 보였다.
"어디 가는 거야! 약 먹어야 해!"
다급히 달려가는 특급 헌터.
그러나 다람쥐는 어느새 신발장 문틈으로 쏙 사라졌다.
그러나 특급 헌터는 포기를 모르는 아이였다.
재빨리 신발장 문을 열고 안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오래된 운동화 속에서 기절한 새끼 다람쥐를 발견했다.
특급 헌터는 조심스레 운동화를 들고 상으로 달려와 새끼 다람쥐에게 포션을 먹였다.
작은 고양이와 새끼 다람쥐는 포션을 먹고 픽- 상 위에서 기절하듯 쓰러졌다.
특급 헌터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제야 의문을 가졌다.
"이 다람쥐는 뭐지?"
작은 고양이 냠냠이는 매일 찾아와서 칼로리 바를 먹고 가던 고양이었다.
그러나 새끼 다람쥐는 오늘 처음 봤다.
고개를 갸웃하던 특급 헌터의 시선이 새끼 다람쥐가 숨어있던 운동화를 향했다.
순간 눈에 확 들어오는 오래된 운동화에 적힌 글자.
"n..i. k..e?"
특급 헌터는 떠듬떠듬 영어를 읽고 새끼 다람쥐를 봤다.
"너 이름이 니케야?"
이 순간 새끼 다람쥐는 대답이라도 하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렇구나!”
특급 헌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문석이 무림 던전으로 떠난 옥탑방.
특급 헌터와 작은 고양이 냠냠이, 니케가 된 새끼 다람쥐 셋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