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천문석이 떠난 테라스에는,
장철과 박혁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박혁은 친구에게 맥주병을 건네며 말했다.
"너 저 녀석 정말 맘에 들었나 보다. 그렇게 상세한 설명까지 하고. 내가 아는 장철 같지가 않던데?"
"괜찮은 녀석이야."
장철은 맥주병을 받으며 짧게 대답했다.
"조카를 구해줘서?"
"그것도 있지만 단단한 녀석이다. 해야 하는 일에 망설이지 않아. 정말 괜찮은 헌터가 될 거다."
"그래?"
인물평이 짠 친구의 칭찬에 박혁은 천문석이 나간 문을 다시 살폈다.
이때 장철이 손가락으로 맥주병 뚜껑을 열며 말했다.
뻥-
"아는 형이랑 이쪽 업계일 시작했다던데. 네가 좀 도와줘."
"봐서."
"봐서는 무슨. 먼저 전화할 녀석 아니니까. 네가 먼저 도와줘. 일거리도 좀 몰아주고. 그보다 난 왜 보자고 한 거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장철.
박혁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W.S. 인더스트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장민이 그쪽이랑 친분이 깊으니까. 장강 유통에서 중간 조율 좀 해줘."
"어려운 일은 아닌데···. 거긴 왜? 너희가 거기랑 엮일 일이 있었나? 의도적으로 거리 두고 있었잖아?"
"아무래도 동대문 게이트 소멸 때문인 것 같다. 게이트 소멸은 처음 있는 일이잖아? 미국에서도 주시하는 것 같아."
"너희 쪽도 소멸 이유는 파악하지 못한 거 아냐? 만나봐야 헛일일 텐데."
장철의 질문에 고개를 젓는 박혁.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지. 게이트 관련 기술력은 우리가 세계 최고인데."
"세계 최고는 무슨. 너희 오너가 세계 최고겠지."
장철이 코웃음을 치자,
박혁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어쩔수 없어. '우리는 개뿔도 모릅니다. 사실은 오너가 혼자서 전부 한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
박혁은 자조적으로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오너···. 어디 있는지. 아직도 확인이 안 된 거냐?"
장철의 질문에,
박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회로 가끔 우편 지시가 내려오는데···. 전부 예약 발송이야. 전혀 소재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연락할 방법도 없고. 게다가 오너를 직접 본 사람은 이제 거의 없잖아? 슬슬 딴 생각하는 놈들도 나타나고 있어."
“딴생각?”
“오너를 경쟁업체의 견제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가상 인물로 생각하더라. 하!”
"멍청한 놈들이군."
"그렇지 멍청한 놈들이지."
장철과 박혁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는 하늘에는 작은 동전처럼 보이는 섬이 있었다.
조롱을 담아 전능 옥좌라 부르는,
재금 그룹 본사가 있는 부유섬이다.
개인의 힘은 단체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이 단체가 현대적인 회사조직을 가진 다국적 기업이라면,
그 역량은 어지간한 국가를 뛰어넘는다.
게이트 안정화 기술을 가진 재금 그룹이라면,
그 역량이 어지간한 중진국을 뛰어넘어 강대국에 미칠 정도다.
기업의 역량이 국가를 뛰어넘는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
재금 그룹은 마탄과 게이트 안정화 장치를 만들어내고,
거대한 섬마저 하늘로 띄워 올릴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마도 기술력을 가진 경외의 대상이었다.
전 세계 마도 공학을 선도하는 재금 그룹!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허상이었다.
마탄,
부유섬.
게이트 안정화 장치.
...
재금 그룹을 초거대기업의 위치에 올린 모든 기술은 단 한 명에게서 나왔다.
재금 공업사를 설립한 창업가.
마탄과 게이트 안정화 장치를 개발한 발명가.
그리고 저 거대한 섬을 하늘로 띄울 정도의 힘을 지닌 마력 각성자.
재금 그룹의 시작이자 끝.
개인으로 재금 그룹 전체를 압도하는 역량을 보인 사람.
경외와 조롱을 담아 던지는,
전능 옥좌의 마도 황제란 별명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람.
'오너.'
그가 모습을 감춘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박혁은 문득 고개를 돌려 장철을 봤다.
"너. 진짜로 우리 오너 소재 모르냐?"
"어이없는 녀석. 재금 그룹 사람이 외부 사람한테 자기 오너 소재를 묻냐?"
"...그럼 이름이라도 말해줘."
"뭔 헛소리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장철은 고개를 저었지만,
박혁의 예리한 시선은 여전히 장철에게 박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재금 그룹 오너를 직접 만났다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교차 검증하면 대부분 허풍이거나 의도적인 거짓말이다.
오너와 처음 그리고 가장 많이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어이없게도 그룹 외부 사람인 장철이었다.
게이트 전쟁 초기.
장철은 몬스터가 쏟아지는 서울을 제집처럼 헤집었고,
어느 순간부터 미친듯이 던전을 클리어하고 다녔다.
이때 장철과 함께 다니던 사람이 있었다.
박혁은 장철과 다녔던 이 사람이 오너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오너의 행적과 장철의 행적이 겹치는 부분이 그만큼 많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룹과는 별 관계 없는 장민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명령이 말이 되지 않았다.
박혁은 예전처럼 친구에게 다시 한번 으름장을 놨다.
"너 나중에 구라친 거 밝혀지면. 나 가만 안 있을 거다."
"왜? 때리기라도 하게?"
장철이 박혁의 몸을 보며 피식 웃자,
박혁은 주머니 안에서 짧은 막대기를 꺼냈다.
"아니 이걸 특급 헌터에게 넘길 거다."
20cm 정도 되는 짧은 막대기.
"그 막대기가 뭔데, 우리 집 꼬맹이한테 넘겨?"
박혁은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벌레 모으는 마법 도구!”
“뭐?”
“특급 헌터가 좋아하는 사슴벌레, 지렁이를 순식간에 수십 마리나 모을 수 있는 마법 도구다! 흐흐흐-”
"미친놈아! 그런 걸 왜 만들어!?"
“왜 만들긴? 특급 헌터가 좋아하고, 네가 싫어하니까 만들지! 흐흐흐흐-”
---
집으로 돌아가는 대형 리무진 안.
천문석은 복잡하게 일어나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무림 던전, 마도 18문.’
장철에게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
천문석은 홀린 듯이 장철의 선물,
무림 던전 행을 받아들였다.
이때 꼬맹이가 맞은편 태블릿을 살피는 장민을 슬쩍 보더니 천문석에게 물었다.
"알바. 지금 몇 시야?"
"오후 4시 30분."
천문석은 시계를 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꼬맹이는 2분에 한 번씩 10번째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뒤이은 질문이 들려오기 전에 먼저 대답했다.
"러브 시그널 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집에 가면 씻고 밥 먹고, 후식으로 수박 먹으면서 보면 되겠다."
"휴- 다행이야."
꼬맹이는 안심한 표정이 되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때 태블릿을 보던 장민이 고개를 들어 꼬맹이를 봤다.
"러브 시그널이 그렇게 재밌어?"
"장민은 러브 시그널 안 봐? 안 보면 인생 절반 손해 본 거라니까! 오늘 꼭 봐! 이시원이 누구한테 고백할지 오늘 나오는데! 엄청 두근두근해!"
신나서 대답하는 꼬맹이.
장민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엄마랑 러브 시그널 같이 볼까?"
"..."
꼬맹이는 순간 말이 없어졌다.
고개를 돌려 천문석을 보고,
다시 장민을 살피는 꼬맹이.
"... 나 알바 집에서 봐야 하는데···."
"엄마랑 보는 건 별로야?"
장민이 짐짓 실망한 투로 말하자,
꼬맹이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건 아닌데. 같이 보기로 약속했거든."
"누구랑 약속했는데?"
"세연이 누나랑 같이 보기로 했어. 내기도 했어."
"세연이랑? 무슨 내기를 했는데?"
꼬맹이는 천문석을 슬쩍 보더니 맞은편 좌석 장민의 귀에 입을 가져가 작게 속삭였다.
"..."
"...?!"
이야기를 듣는 순간 크게 휘어지는 장민의 눈썹.
장민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돌린 채 어깨를 들썩였다.
후흐흐흡-
"어때?! 엄청 재밌겠지!? 우히히히히-"
신나게 웃는 꼬맹이와 어깨를 들썩이는 장민.
장민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천문석을 힐끔거렸다.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좀 전 호텔 테라스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사실이 잊혀질 정도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나 촉이 왔어! 너 꾸미는 음모 사실대로 말해라!"
천문석은 특급 헌터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했다.
"앗! 어떻게 알았지? 사실은···. 읍읍읍-"
깜짝 놀라는 특급 헌터 꼬맹이.
언제나 당당한 특급 헌터가 자백하는 순간,
장민의 손이 꼬맹이의 입을 살짝 가렸다.
특급 헌터의 자백을 막은 장민이 아직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말했다.
"러브 시그널···."
"...?"
"저도 같이 봐도 될까요?"
"네···?"
---
"그럼. 이따가 러브 시그널 시작할 때쯤에 가도록 할게요.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리무진에서 내린 장민이 빙그레 미소지은 채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저의 집이 정말 작은데···."
천문석이 대답하는 순간,
불쑥 튀어나와 신나게 외치는 꼬맹이.
"장민. 올 때 선물사와야 해!"
꼬맹이는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당당히 선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걱정마. 엄청 좋은 선물 사갈게. 알바 씨에게 뭐가 필요하지?"
꼬맹이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자동차! 류세연도 있으니까. 세 대가 필요해!"
장민은 대답 없이 천문석을 봤다.
"혹시 필요하신 거 없으신가요? 부담 없이 말씀하셔도 돼요."
"자동차!"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오시면 돼요."
"자동차!!"
"그럼 이따가 봐요."
웃으며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려 장갑 SUV를 향해 걸어가는 장민.
멀어지는 장민을 향한 꼬맹이의 애타는 외침이 이어졌다.
"자동차!!!"
그러나 장민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 차에 탔다.
구으으응-
장민이 탄 장갑 SUV가 떠나가고,
천문석과 꼬맹이가 탄 리무진이 출발하는 순간.
간절히 자동차를 외치던 꼬맹이는 픽- 좌석 위로 널브러졌다.
"...너 괜찮냐?"
"안 괜찮아."
의기소침해진 특급 헌터.
천문석은 슬쩍 물어봤다.
"너 자동차 삼촌한테 사달라면 안 돼? 저번에도 삼촌이 사준 거라면서."
"삼촌, 장민한테 엄청 혼났어."
고개를 휙휙 저으며 대답하는 꼬맹이.
"장철 헌터가 혼났다고···? 아!"
순간 짐작 가는 게 있었다.
꼬맹이는 서울 사태 때 어린이 자동차로 랩터 무리 사이를 달렸다.
아이들을 구하기 위한 용감한 행동이었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었을 거다.
그 불똥이 어린이 자동차를 사준 장철 헌터에게 튀었던 거다.
“...”
그때 일을 기억하는 장민이 꼬맹이에게 어린이 자동차를 사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포기해라. 엄마가 절대 안 사줄 것 같다."
"안돼. 앙꼬 대장 이기려면 자동차가 필요하단 말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앙꼬 대장이 여기서 왜 나와?"
"앙꼬 대장은 진짜! 엄청! 아주! 최고로! 좋은 게 있단 말야! 세발자전거로는 절대 못 이겨!"
주먹을 꼭 쥐고 열렬히 외치는 꼬맹이.
“내가 앙꼬 대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세히 설명해줄게! 우선 부하가 많아! 그중에는···.”
이때 문자가 왔다.
띠링-
띠링-
두 번 울리는 수신음.
첫 번째 문자는 장철 헌터가 보낸 약도가 포함된 문자였다.
[광화문 까페 달콩, 오후 1시. 내 이름으로 예약했다.]
두 번째 문자는 오리온 길드의 한경석이 보낸 짧은 문자였다.
[검 완성됐어!]
순간 불끈 주먹을 움켜쥐는 천문석.
기다리던 소식이 마침내 도착했다!
이 순간 천문석은 운명의 이끌림을 느꼈다.
천검 이세기의 검혼을 담은 검이 완성되는 날,
마도 18문이 존재하는 던전의 소식을 들었다.
전생을 깨달은 후 계속 가졌던 의문,
자신의 비밀을 밝힐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쿠팡맨에서 얻은 기연.
천검 이세기의 검혼이 담긴 검.
그리고 무림 던전!
조각난 퍼즐 조각이 맞물려,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어내는 이 느낌!
전생의 비밀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기연으로 검혼을 깨워 강기공을 얻는다.
그리고 무림 던전 안에서 진실을 찾으리라!
천문석이 다짐하는 이 순간,
특급 헌터의 열렬한 외침이 들려왔다.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지?! 앙꼬 대장 장난 아냐! 자동차가 있어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니까!"
전혀 듣지 못했지만,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이야! 엄청 대단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