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106화 (107/1,336)

#106

장철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회한.

천문석이 장철을 볼 때,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타타타타타-

반사적으로 하늘을 보는 천문석과 장철.

헬기 한 대가 남한산을 지나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헬기 바닥에 그려진 헌터 특임 부대의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긴급 출동 중인 특임대의 타격대 헬기였다.

장철은 한동안 멀어지는 헬기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게이트 사태 때 저 한강 넘어가는 게 정말 힘들었다."

20년 전 최초의 게이트가 열렸을 때의 이야기였다.

장철은 회한에 잠긴 눈으로 한강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가족들과 장민이 그때 고생을 많이 했어."

"..."

"다리는 마수에게 점령당하고, 강은 폭풍이라도 온 듯 요동쳤다. 수영으로 한 명씩 데리고 강을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

"암담하던 그때 어렸던 장민이 오리 보트를 구해왔다. 이 녀석이 악다구니를 벌이는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서 오리 보트를 가져온 거야···."

하아-

장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장민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선지 장민은 마음을 잘 안 열어. 그러다가 가끔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짓궂게 군다. 네가 이해 좀 해줘."

"아닙니다. 장민 대표님에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장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아. 그리고 내가 해주겠다던 선물. 확정됐다."

아직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물.

그러나 장철의 마음을 알기에 천문석은 웃으며 대답했다.

"선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천문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철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내일 광화문에서 나랑 같이 내 후배를 만나야 할 것 같다."

"네?"

"후배 녀석이 끝까지 우겨서 직접 만나서 납득시켜 주기로 했거든. 괜찮겠냐?"

"네. 괜찮습니다."

천문석의 대답을 듣자 얼굴이 환해지는 장철.

"그럼 장소는 내가 문자로 넣어줄게."

장철은 문득 천문석을 다시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전에 봤을 때랑은 또 다르네? 각성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느낌이 묘한데? 무공 각성자랑 비슷하면서도 달라."

장철은 천문석의 변한 모습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 사실은···."

천문석은 무공을 익힌 것을 설명하려 할 때,

장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됐어. 설명할 필요 없다. 헌터들은 자기 능력에 대한 건 묻지 않는 게 불문율이야. 뭐 내 선물 받는 데 큰 문제가 없기도 하고."

장철은 몸을 돌려 천문석의 어깨를 툭 치며 갑자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보다 고맙다."

"네···?"

“우리 집 꼬맹이 목욕탕 데리고 갔었다며? 걔 어제 전화해서 한 시간 동안 자랑하더라. 목욕탕 엄청 재밌었다고.”

장철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자기는 동네 목욕탕 주인 겸 특급 헌터 되는 게 꿈이래. 하하하-”

천문석이 민망하게 웃을 때,

장철의 표정이 돌연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

"목욕 후에는 바나나 우유가 국룰이라고 했다며?"

"네. 제가 그랬는데요."

장철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목욕탕 국룰은 솔의 눈이지!"

---

“...”

이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외침.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목욕탕 국룰이 솔의 눈이라고?"

한 노신사가 난간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주름이 가득한 얼굴.

얼굴과 머리는 60대는 넘은 것 같은데,

육체에서는 단단함과 꼿꼿함이 느껴지는 노신사였다.

노신사는 장철 앞에 서서 두 번 선언했다.

"목욕탕 국룰은 당연히 식혜지! 식혜가 목욕탕 국룰인 건 자명한 사실이다!"

"...오래간만에 연락해서 보자고 하더니. 갑자기 뭔 소리야."

어이없어하는 장철.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노신사가 다시 한번 외치자,

장철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가 말이 안 돼? 땀 쫙 빼고 ‘솔의 눈’ 마시면 머리끝까지 시원해지면서! 캬-!”

“하. 이런 송충이 같은 녀석!”

어이없어하던 노신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식혜가 국룰인 이유를. 네 돌머리로도 이해할 수 있게 내가 설명을 해주지."

"한번 해봐라."

"찜질방 가서 불가마를 들어갔다가 나왔어."

"...?"

"지금 앞에 '맥반석 계란'이 있다. 그리고 살얼음에 밥알이 동동 띄워진 '식혜'랑 '솔의 눈'이 있어. 맥반석 계란이랑 뭐를 같이 먹을래?"

"솔의 눈!"

"...그건 송충이 같은 너나 그렇게 먹는 거고!"

버럭 소리친 노신사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향했다.

"잘생긴 젊은 청년. ‘맥반석 계란’을 ‘시원한 식혜’, ‘솔의 눈’ 어떤 음료하고 같이 먹을 거야?"

장철의 시선마저 천문석에게 향할 때,

천문석은 당당히 대답했다.

"저는 바나나 우유랑 같이 먹겠습니다!"

"..."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장철 - 솔의 눈.

노신사 – 시원한 식혜.

천문석 - 바나나 우유.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세 남자!

서로의 뜨거운 눈이 마주칠 때,

테라스 입구에서 다시 한번 들려오는 외침!

"야! 너 우리 속였지!?"

"맞아! 술을 마시면 좋은 생각이 날 거라고? 기분만 좋아지잖아!?"

쾅-

부서질 듯 테라스 문이 열리고,

조금 더 주정뱅이가 된 두 남녀가 나타났다.

방금 전에 사라졌던 구세경과 남자였다.

순간 장철이 반색해서 외쳤다.

"야! 구세경, 구세창! 잘 왔다. 너희들 이리 빨리 와봐!"

"...어? 저 사람 장철 삼촌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빌어먹을! 진짜 장철이잖아! 도망쳐!"

두 사람은 다급히 몸을 돌렸으나,

몇 걸음 떼지 못하고 장철에게 잡혔다.

"삼촌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너희들 솔직히 대답해라···."

이때 노신사가 이들 뒤로 재빨리 다가가며 다급히 외쳤다.

"너희들! 일화 그룹 구 회장 손자 손녀 맞지? 이 전화 받아라!"

"새끼가 치사하게 반칙을!"

장철은 노신사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뺏으려 했다.

40대로 보이는 장철과 60대로 보이는 노신사의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됐다.

눈치를 보던 구세경과 구세창이 재빨리 도망치려고 할 때,

두 사람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는 두 사람.

"어? 할아버지가 왜?"

"난 아빠한테 왔어!?"

구세창과 구세경은 재빨리 들고 있던 술병을 구석으로 밀어 버리고 옷매무시를 살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는 두 사람.

"네. 네? 그렇게 하면 된다고요? 아니 그래도···. 네. 알겠습니다."

"이상한 거를 시켜···. 알았어. 알았다니까!"

전화 통화가 끝났을 때,

구세창과 구세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동시에 말했다.

"식혜가 국룰입니다."

"식혜가 국룰입니다."

“어?”

어이없어하던 장철의 시선이 노신사가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향했다.

"...하- 그 휴대폰은 페이크였냐? 이런 치밀한 새끼."

장철이 어이없어할 때,

노신사는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패배자는 짜져 있어라."

노신사는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목욕탕 국룰 음료는······!"

"바나나 우유!"

"뭐···?"

노신사가 당황하는 순간,

어느새 테라스 안으로 들어온 꼬맹이들이 합창하듯 외쳤다.

"바나나 우유!"

"바나나 우유!"

....

장철과 노신사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모였다.

천문석은 자신이 부른 꼬맹이들에게 질문했다.

"목욕탕 국룰 음료수는?"

선두의 특급 헌터가 외쳤다.

"바나나 우유! 맛있어!"

순간 다시 한번 합창하듯 외치는 꼬맹이들.

"바나나 우유!"

"바나나 우유!"

....

"하하- 애들은 거짓말을 못 한다고 하죠?"

천문석이 겸연쩍게 웃을 때,

장철과 노신사는 멍한 눈으로 바나나 우유를 연신 외치는 꼬맹이들을 봤다.

"..."

"..."

---

아이들에게 바나나 우유를 안겨주도록 천문석이 직원에게 부탁한 후.

장철은 구세경과 구세창을 천문석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구세경, 구세창. 일화 그룹 3세들이다. 조만간 호적에서 파일 거니까. 이름만 기억하면 된다.”

“삼촌!”

“장철 삼촌!”

구세경과 구세창이 소리를 질렀지만,

장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거 너희 할아버지한테 직접 들은 거다. 한 번만 더 술주정 부리면, 호적에서 파고 일본으로 파견 근무 보낸다더라.”

두 사람은 못 들은 척 천문석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구세경입니다. 제가 누나입니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구세창입니다. 제가 오빠입니다. 장철 삼촌 아는 분인지 모르고 죄송합니다."

"...누나, 오빠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천문석이 뭐지 하는 시선으로 둘을 보자,

장철은 바로 설명했다.

"쟤네 쌍둥이다. 너희들 요새도 그걸로 싸우냐?"

장철은 어이없어하며 이번에는 천문석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천문석. 새로 헌터 업계에···."

"특급 헌터랑 아주 친해!"

꼬맹이는 바나나 우유를 쪽쪽 빨아 먹다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악마 꼬맹이랑 친하다고?"

"...괴롭히는 대상인 건가?"

구세경과 구세창의 안쓰러운 눈이 천문석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천문석입니다."

천문석은 못 들은 척 짧게 인사하고 두 사람과 악수를 했다.

인사를 나누자, 구세경과 구세창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특급 헌터 뒤에 서 있는 노신사에게 향했다.

일화 그룹 전 회장과 현 회장을 동시에 움직일 정도의 영향력 있는 사람.

분위기를 봐서는 장철의 지인 같은데,

이 노신사가 누구인지 감도 안 왔다.

"삼촌 저분은?"

구세경이 물었으나,

장철은 테라스 밖을 가리켰다.

"너희들은 나가서 세수하고 정신부터 차려라. 술은 그만 먹고."

"뭐?! 나 멀쩡해!"

"맞아 나도 멀쩡하다니까!"

깜짝 놀라서 강하게 주장하는 두 사람.

그러나 장철은 두 사람을 번쩍 들어 테라스 밖에 내려놓고 엄격하게 말했다.

"들어오지 마라. 몰래 엿듣지도 말고."

“잠깐만···.”

탁-

구세경이 다급히 외쳤으나 바로 앞에서 닫히는 문.

문을 닫은 장철은 천문석을 봤다.

"잠깐 이야기 나눌 시간 있을까?"

"네. 괜찮습니다."

장철의 시선이 노신사에게 향했다.

"넌 어때? 소개 좀 해주려는데? 괜찮냐?"

노신사는 특급 헌터에게 물었다.

"너랑 친하냐?"

"당연하지! 알바는 나랑 엄청 친해!"

"엄청 친하단 말이지···?"

순간 노신사의 입가에 걸리는 장난스러운 미소.

"특급 헌터. 너 삼촌이 좋냐 알바가 좋냐?"

"너 무슨 그런 걸 묻냐? 당연히 내가···."

장철이 어이없어할 때 특급 헌터의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알바가 더 좋은 것 같아!"

"...이런 배신자 녀석!"

삼촌이 분노했으나,

특급 헌터는 당당히 주머니에서 지퍼백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봐! 오늘 알바 덕분에 받은 거야! 알바는 역시 대단해!"

지퍼백에는 반쯤 녹은 막대 사탕이 담겨 있었다.

"그게 뭔데? 먹던 사탕?"

장철이 의아해할 때,

들려오는 의기양양한 목소리.

"이거 앙꼬가 나한테 준 사탕이야!"

특급 헌터가 자랑스럽게 외칠 때,

장철과 노신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꼬맹이를 봤다.

"...먹던 사탕을 줬다고?"

"...얘 원래도 이상했는데. 오늘은 더 이상한데. 얘 괜찮은 거 맞냐?"

천문석은 이 모습을 보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앙꼬가 준 사탕이 아니었다.

앙꼬가 던진 걸 특급 헌터가 잽싸게 공중에서 낚아채 보관 중인 사탕이었다.

특급 헌터는 천문석을 잡고 앙꼬의 영웅이 됐지만 그건 잠시뿐.

새침데기 앙꼬는 곧 원래대로 돌아갔고,

특급 헌터의 짝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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