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서울 사태?!"
한 사람이 외치자,
뒤이어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확실히 동대문 게이트 소멸은 이상하긴 했어.”
“대응이 너무 빠른 것도 이상했고 말야.”
“맞아. 피해도 생각 이상으로 적었지.···.”
누군가 결론을 내리듯이 말했다.
“마치 게이트 소멸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게이트 관련 기술은 재금 그룹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다.
누군가 게이트 소멸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 누군가는 재금 그룹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지,
재금 그룹에 대한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광화문 게이트에서도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하던 재금 연구소에서 막았지."
"재금 그룹의 배송 경주 중에도 특이한 일들이 일어났다던데?"
"국민대 뽀미가 우승했다는 그 배송 경주?"
"그 배송 경주에 재금 연구소 수석 연구원 추이린이 나타났다. 확인한 사항이다."
"거기에 있던 헌터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소문?"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을 날았다는데···. 누군가 지운 것처럼 남아있는 영상 자료가 없어."
"재금 보안에서 청소 작업에 들어간 건가?"
십여 명의 남녀는 빠르게 말을 쏟아내며 서로의 정보를 확인했다.
재금 그룹과 W.S. 인더스트리.
두 초거대기업이 만나는 지금,
정확한 정보는 곧 막대한 돈과 연결된다.
유력가의 2세, 3세들은 단편적인 정보를 분석해 돈의 흐름을 파악하려 하고 있었다.
이때 대화에서 소외되었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내가 부탁한 거 어떻게 됐냐? 언제 자리 날 거 같아? 돈을 먹었으면 제대로 일을 해야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너 미쳤냐? 여기서 그런 이야기를···!”
“쫄기는···. 왜? 아빠한테 혼날까 봐 걱정이냐? 어차피 여기 애들은 다 알잖아? 각성 스팟···.”
순간 입을 막은 듯 뭉개지는 소리.
"..."
긴 침묵이 이어지고,
천문석의 등으로 날카로운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다.
그러나 이미 천문석은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말실수를 하고서야 주위를 살피는 2, 3세들.
이들은 이제야 천문석을 발견하고 노려보고 있었다.
천문석은 보지 않아도 상황이 그린 듯이 짐작했다.
시선에 담긴 망설임에서 느껴지는 고심.
'혹시 우리 이야기를 들은 거 아냐?'
내심 웃은 천문석은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직감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태연히 한강을 내려다봤다.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고,
망설이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가서 들었는지 확인해 볼까?"
"거리가 있는데. 이 거리에서 소리가 들렸을까?"
“각성 헌터라면···?”
"됐어. 확인하는 게 오히려 문제가 생겨."
"여기 있을 정도면 그냥 놔두는 게 낫다."
...
곧 날카로운 시선이 사라지고,
십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테라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탁-
천문석은 돌아보지 않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들려오는 소리.
탁-
슬쩍 시선을 두니 입을 막았던 남자가 테라스를 나가는 뒷모습이 보인다.
천문석은 피식 웃었다.
“허술한 녀석들.”
“그러게 말야. 뭐 저리 허술하냐?”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깜짝 놀란 천문석이 옆을 보자,
불쑥 튀어나오는 술병.
“한잔할래?”
타는듯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천문석에게 술병을 내밀고 있었다.
---
천문석은 이 여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장민 대표가 소개해주지 못해 아쉬워하던 일화 그룹의 두 남녀 중 여자.
천문석은 내민 술병을 정중히 밀어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래?"
여자는 술병을 기울여 단숨에 술을 마셨다.
"하아- 좋다."
독한 양주 향이 여자의 숨결에 실려 올 때,
천문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돌려 여자에게서 떠나려 했다.
"그럼 전 이만."
그러나 몸을 돌리는 순간,
팔을 잡는 여자.
“잠깐. 잠깐만!”
“네?”
여자는 술병을 흔들며 대뜸 자기소개를 했다.
"나, 구세경이다. 들어본 적 있어?"
"죄송합니다. 제가 견문이 짧아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천문석이 고개를 젓자,
구세경은 바로 다시 물었다.
"그래? 일화 그룹 구세경이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네. 들어본 적 없습니다."
"이상하네. 주정뱅이 구세경도 몰라? 나 유명한데···. 왜 모르지?"
구세경은 이상하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비틀비틀한 다리와 맛이 간 눈동자.
몸에서 확 올라오는 독한 술 냄새에 자신을 주정뱅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천문석은 직감했다.
구세경이란 이 여자 만취했다!
천문석은 자리를 피하고자 적당히 말했다.
"제가 원래 바쁘게 살아서 사람들을 잘 몰라요."
천문석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구세경은 한걸음 성큼 다가오며 다시 한번 물었다.
"야 잘 생각 봐. 구세경 진짜 못 들어봤어? 아 맞다. 넌 이름이 뭐야?"
천문석은 선선히 이름을 말했다.
"천문석이라고 합니다."
"천문석, 천문석? 나 천 씨 처음 봐! 신기하다."
구세경은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불꽃을 담은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
새하얀 피부에 올라온 붉은 홍조.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듯 가까워진 순간.
구세경의 입이 천문석의 귓가에 닿았다.
들릴 듯 말 듯 한 속삭임.
"각성 스팟. 들었지?"
"네···? 각성 스팟이 뭐죠?"
천문석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구세경은 또렷해진 눈동자로 천문석의 표정과 몸짓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천문석에게서는 의아함과 얕은 짜증 말고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닌가···. 아 미안. 술 취해서 말이 헛나왔나 봐."
순간 또렷해진 눈동자가 다시 흐릿해지고,
구세경은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이때 들려오는 목소리.
"야! 너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어떡해? 그걸 직접 말하면 어떡하냐! 그럼 알아보는 의미가 없잖아!"
어느새 한 남자가 나타나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에서 구세경이란 여자와 술을 마시던 남자였다.
“벌써 왔어? 일 처리는 했고?”
“당연하지. 난 깔끔하게 처리했다. 알아보랬더니 말하는 멍청한 너랑 달리 말야.”
"어? 내가 말했다고 뭐를? 난 말 안 했어!"
"방금 말했잖아! 멍청아!"
"그러니까 뭐를 말했다는 건데? 완전 멍청아!"
"말 안 했다는 걸 말했다고! 이 멍청멍청아!"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완전완전 멍청아!"
...
갑자기 싸우기 시작하는 남녀.
천문석은 두 남녀를 보면서 깨달았다.
'둘 다 술주정뱅이다!'
술 취한 사람과의 대화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었다.
천문석은 두 사람을 피해서 테라스에서 나가려 했다.
이때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야! 네가 말해봐! 내가 말했어. 안 했어!?"
구세경이란 여자가 성큼 다가와 천문석 앞을 막았다.
"그래 네가 말해봐. 쟤가 말했어. 안 했어?"
남자도 성큼 다가와 구세경 옆에 나란히 섰다.
멀쩡해 보였던 남자에게서도 술 냄새가 확 올라오고 있었다.
본인들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술에 취해 이미 사고가 무뎌진 두 사람.
천문석은 슬쩍 낚시질을 해봤다.
"그러니까 뭐를 말했다는 건가요?"
"..."
"..."
순간 말문이 막혀 서로를 보는 남녀.
"어,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아까 걔들은 그냥 쥐어박으면 됐는데···."
"얘는 그러면 안 되지. 그냥 여기에 서 있었던 것뿐인데···."
"말하면 안 되겠지?"
“그렇지 비밀이니까.”
"그런데 말 안 하면 어떻게 말했는지 안 했는지 알아?"
...
주정뱅이 화법으로 서로에게 횡설수설하는 두 남녀.
전혀 대화가 진전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술에 취해 이성이 무뎌졌음에도 완력을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천문석은 내심 미소지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대로는 결론이 안 날 것 같으니.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방법이 있어?”
“좋은 생각이 있는 거야?”
두 사람의 시선이 모일 때.
천문석은 주정뱅이가 좋아할 만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생각이 날 때까지 한 잔 더 하시고. 좋은 생각이 나면 저를 찾아오시는 겁니다."
"생각 날 때까지 한잔 더 하라고?"
"음···. 일리가 있어."
천문석은 앞장서 걸어가 테라스 문을 열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럼 가서 한잔 더하고 오세요.
"알았어. 좋은 생각 고마워!"
"너 완전 똑똑한데! 머리 엄청 좋은 것 같아!"
천문석을 칭찬한 구세경과 남자는 원래 목적을 잊고 바를 향해 걸어갔다.
탁-
순식간에 두 주정뱅이를 처리한 천문석이 테라스 문을 닫고 웃을 때.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 일화 그룹 구 씨 남매를 그렇게 얼렁뚱땅 처리하냐?"
귀에 익은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언제 나타났는지 한 남자가 테라스 난간에 서 있었다.
장철.
항상 입던 작업복이 아닌 정장을 차려입고 선글라스까지 낀 장철이었다.
---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파티에 초대받은 건가?"
장철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묻는 순간,
테라스 문 너머, 커튼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알바! 어디에 숨었지?!"
"특급 헌터! 여기엔 없어!"
“다시 복도를 살피자!”
“알았어! 모두 달리자!”
와아아아-
...
특급 헌터의 외침 뒤로 꼬맹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조카의 외침을 듣고 상황을 짐작한 장철은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 집 꼬맹이 때문에 같이 끌려왔나 보네. 미안하다."
"아닙니다. 장민 대표께서 좋은 분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큰 도움이 됐습니다."
"장민이 인맥을 이어줬나 보군. 사실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인맥은 별 의미가 없는데. 귀찮게 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네?"
의아해하는 천문석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는 장철.
"눈앞의 몬스터 머리통을 박살 내는데, 인맥은 필요 없잖아? 중요한 건 자신의 힘이지!"
장철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도 장민이 왜 저러는지는 이해가 간다."
장철은 어쩐지 씁쓸한 기색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고 몸을 돌려 한강을 내려다봤다.
천문석은 장철 옆으로 걸어가 같은 곳을 봤다.
오후의 한강.
햇살에 반짝이는 한강과 그 너머 강동구의 시가지.
그리고 시가지 뒤로 넓게 펼쳐진 남한산이 한눈에 보였다.
저기 남한산까지가 서울 안정화 권역이었다.
한강을 지나가는 유람선.
도로에 가득한 차량 행렬.
한강에 접한 광장 느긋한 사람들.
안정화 권역의 평화로운 모습.
이 평화로운 모습만 봐서는 게이트와 몬스터, 마수 같은 것들은 소설 속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그러나 저 남한산 너머 안정화 권역 바깥쪽.
경기도권에서는 던전과 균열이 무작위로 나타난다.
군과 경찰의 신속 타격대.
여러 길드의 헌터들이 24시간 대응태세를 유지 중이지만, 한 달에 한두 번은 긴급 대피를 한다고 했다.
안정화 권역과는 달리 경기도권에서는 여전히 몬스터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장철이 문득 입을 열었다.
“가끔 이 평화로운 모습이 모두 꿈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