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키즈 카페에서 나오는 순간,
특급 헌터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바! 내 마음 알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천문석이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안절부절못하는 특급 헌터.
컥-
순간 천문석은 특급 헌터의 돌머리에 받힌 배를 잡고 몸을 숙였다.
"알바! 많이 아파? 제임스한테 포션 가져오라고 할까?!"
"아니···. 이건 포션으로 안돼···."
"왜?! 내 돌머리가 그렇게 강력했던 거야!? 힘 빼고 살살 뛰었는데···!"
"아니···. 이건 포션으로는 치료할 수 없는 ‘배신’의 고통이거든."
"..."
“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다니-”
“...”
“마음이 너무 아프다!”
"으아, 으아악!"
놀림당한 특급 헌터가 달려드는 순간,
천문석은 특급 헌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야. 장난이야. 장난!"
"으아, 으아악! 분노한다! 특급···. 우히히히힣-"
분노하다 말고 간지럼에 웃음을 터트리는 꼬맹이.
천문석은 웃고 있는 꼬맹이를 목말 태운 채 건물 밖으로 나왔다.
건물 앞 주차장.
천문석과 꼬맹이가 보이자,
장갑 SUV 문을 여는 제임스.
차 안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알바씨."
검은색 롱 드레스를 입은 장민 대표가 미소지으며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
"알바 후진! 빨리 도망쳐! 빨리!"
엄마가 나타나는 순간,
꼬맹이는 다급히 외쳤다.
천문석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려 할 때,
들려오는 장민의 엄한 목소리.
"너! 며칠째 집에도 안 들어오고!"
꼬맹이는 바로 반박했다.
"아냐! 매일 가서 옷 갈아입었어!"
"옷만 입고 바로 나갔다며? 야채 주스랑 샐러드 하나도 안 먹었다며?"
특급 헌터는 깜짝 놀랐다.
"앗! 내가 안 먹은 거 어떻게 알았지? 할아버지 가져다드렸는데···."
언제나 당당한 특급 헌터는 범죄 사실을 바로 자백했다.
"..."
장민은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특급 헌터를 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얼른 차 타. 오늘 모임 있어."
"모임!?"
특급 헌터는 다급히 말했다.
"장민. 혼자서 가면 안 될까? 나 오늘 되게 바쁜데."
대답 없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장민.
블랙 롱 드레스에 화려한 보석 장신구, 손에 들린 붉은색 클러치 백.
평소와 달리 완벽하게 차려입은 장민이 다가올수록 압박감이 점점 커졌다.
장민은 천문석 바로 앞에 우뚝 멈춰섰다.
꿀꺽-
꿀꺽-
천문석과 꼬맹이가 동시에 마른침을 삼킬 때.
장민은 미소지으며,
목말을 탄 꼬맹이를 올려다봤다.
"뭐가 그리 바쁠까?"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장민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카리스마에,
아찔한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당당히 외치는 꼬맹이!
"나 엄청 바빠!"
"고양이 먹이 주고."
"나무에 물도 줘야 하고!"
"사슴벌레도 잡아 와야 하고."
"자전거 경주 연습도 해야 하고!"
"그리고, 그리고···."
"앗! ‘러브 시그널’도 같이 보기로 약속했어!"
"오늘 엄청 중요해! 이시원이 누구한테 고백할지 결정하는 날이야!"
꼬맹이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거듭 강조했다.
"나 오늘 엄청 바빠!"
"알바 도와줘야 한다니까!"
"내가 없으면! 알바는 힘들어서 쓰러질지도 몰라!"
"..."
그러나 장민은 말없이 꼬맹이를 계속 봤고,
꼬맹이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진짜로 나 엄청 바쁜데···."
"..."
"알바! 나 바쁜 거 좀 말해주면 안 될까?"
장민의 시선이 천문석에게로 향했다.
순간 등 뒤를 타고 흐르는 전율!
뭐지?
쉬는 날 작업복을 입고 나타난 류세연을 보는듯한 이 기분은!?
그러나 특급 헌터와의 의리를 지켜야 했다!
천문석은 심호흡하고 당당히 대답했다.
"특급 헌터. 오늘 엄청 바쁩니다! 저를 도와주기로 했거든요!"
"그것 봐! 맞지? 나 오늘 엄청 바쁘다니까! 진짜인 거 봤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모임 못 가는 거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꼬맹이.
"그러니까 오늘은 장민 혼자서···."
이때 장민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잘됐네요. 그럼 알바씨도 같이 가죠."
"네? 같이요?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천문석이 당황하는 순간,
장민의 말이 이어졌다.
"알바씨도 모임에 같이 참여하시죠. 앞으로 헌터일을 하시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에요."
"아니, 저는 옷도······."
"제임스."
천문석이 말하는 순간,
장민은 제임스를 불렀다.
"네. 대표님."
"부티크에 옷 준비하라고 연락해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아니."
천문석이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딱-
장민 대표가 손가락을 튕겼다.
구으으응-
순간 다가오는 대형 리무진.
"어서 차에 타세요. 시간이 빠듯하네요. 부티크를 거쳐 모임 장소로 바로 이동할 거에요."
얼떨결에 타게 된 대형 리무진.
"저는 먼저 가 있을게요. 부티크에서 옷 갈아입고 바로 오시면 돼요."
리무진 창문 밖 장민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뒤이어 내리는 단호한 명령.
"중간에 도망칠 수 있으니 철저히 감시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위이잉-
열렸던 창이 올라가고,
천문석과 꼬맹이를 태운 리무진은 출발했다.
작은 소리와 진동조차 느껴지지 않는 대형 리무진 좌석.
꼬맹이가 천문석을 향해 밝은 얼굴로 외쳤다.
"알바! 같이 가서 다행이다? 그치!"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
검은색 정장에 붉은 넥타이.
하얀 실크 셔츠와 검은 가죽 구두.
브리오니, 구찌. 페라가모···.
하나하나가 명품 브랜드 제품이다.
게다가 손목에는 브랜드를 알 수 없지만,
엄청 비싸 보이는 시계까지.
대형 리무진을 타고 도착한 부티크.
부티크에서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들어가는 순간 직원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옷을 피팅하고 수선해서 입혔다.
순식간에 파티 복장이 입혀진 천문석.
“...”
한 시간 전에는 키즈 카페에서 꼬맹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지금은 명품 브랜드 옷을 입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 가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
천문석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을 봤다.
옆자리의 특급 헌터 꼬맹이.
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은 채,
좌석에 널브러져 있는 꼬맹이.
부티크에서 옷을 갈아입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엄마의 전화를 받은 후.
꼬맹이는 계속 저런 모습이었다.
"너 이 모임 무슨 모임인지 알아? 가본 적 있어?"
꼬맹이는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재미없는 모임. 맛없는 술 먹으면서 사람들이 계속 웃어. 이렇게."
하하하-
호호호-
"...재미없는 주식, 땅, 아파트 이야기만 해. 그래서 저번에는 사슴벌레 가져갔어."
"사슴벌레?"
천문석이 의아해하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이는 꼬맹이.
“사람들 등에다가 사슴벌레 붙여줬거든. 엄청 재밌었어!”
우히히히히-
신나게 웃는 꼬맹이.
“너 엄마한테 안 혼났냐?”
꼬맹이는 운전석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엉덩이 좀 맞았는데. 괜찮았어. 한동안 모임 안 가도 됐거든. 에휴-”
꼬맹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슴벌레도 없는데 어떡하지. 지렁이라도 찾아야 하나···."
꼬맹이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천문석은 조수석의 제임스에게 물었다.
"제임스. 이 모임 어떤 모임이죠?"
"헌터업 관계자 친목 모임."
제임스의 별 도움이 안 되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후 경사진 도로를 오르기 시작하는 리무진.
도로를 한참 동안 오르자,
길 오른쪽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리무진은 호텔 입구에서 멈췄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워커힐 호텔.
리무진에서 내리는 천문석과 꼬맹이를 향해,
먼저 도착한 장민 대표가 걸어왔다.
"아주 근사하시네요."
장민 대표는 미소지으며 천문석에게 말했다.
그리고 장민 대표의 엄격해진 얼굴이 꼬맹이에게 향했다.
"아까 통화로 약속했지?"
"네! 약속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대답하는 꼬맹이.
"오늘 사슴벌레 가져왔니?"
"안 가져 왔습니다!"
"지렁이 잡아서 던질 거야?"
"...안 던지겠습니다!"
“약속 안 지키면 어떻게 된다?”
꼬맹이는 두려운 얼굴로 대답했다.
“알바 집 놀러 가는 거 한 달 금지입니다!”
뭐지? 이 어이없는 조건은?
아니 우리 집 놀러 오는 게 무슨 조건이야···.
천문석이 어이없어할 때,
장민 대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요."
장민 대표는 천문석의 팔과 꼬맹이의 손을 잡고 호텔로 들어갔다.
---
호텔 컨벤션 홀,
많은 사람이 곳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홀 한쪽, 장민 대표는 천문석을 한 남자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위원님. 이쪽은 천문석이라고 새로 헌터 업계에 들어온 유망한 청년입니다."
"천문석님. 이분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이태영 의원님이세요."
"안녕하십니까. 천문석이라고 합니다."
천문석은 장민 대표가 소개한 이태영 의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장민 대표가 소개하다니···. 어디 대형 길드 2세라도 되나?"
이태영 의원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천문석을 봤다.
“글쎄요. 한 5년쯤 후에는 대형 길드를 만들지도 모르겠네요.”
장민이 미소를 띤 채 대답하자.
이태영 의원은 보좌관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런 유망한 청년과의 교분은 언제나 환영이지. 언제 식사라도 한번 하자고."
"네. 감사합니다."
천문석은 보좌관이 전하는 명함을 받으며 인사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의원님. 바쁘신 분의 시간을 많이 뺏을 수는 없으니···.”
“무슨! 장민 대표라면 없는 시간도 내야지.”
장민은 이태영 의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천문석을 인도해 홀 안을 이동했다.
컨벤션 홀을 가로지르는 장민.
장민 대표가 지나가자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말을 붙여볼까 주저하는 모습.
그러나 장민 대표는 주위에는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작게 속삭이는 장민 대표의 목소리.
"인맥은 양방향이에요. 너무 많은 사람을 아는것도 좋지 않아요."
“...”
천문석은 장민의 의도를 이해했다.
너저분한 인맥에 홀려 집중력을 잃지 말라는 뜻.
홀 안을 가로질러 잇달아 천문석을 소개하는 장민 대표.
그러나 장민 대표가 소개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5명.
이태영, 법사위 위원장.
허창범, 금성 길드 이사.
박석렬, 재금 그룹 차장.
카리나 히메네스, 주한미국대사관 차석.
...
하나하나가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천문석이 이미 아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다시 뵙게 되네요."
"...어? 자네!"
뻘쭘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천문석을 반가운 얼굴로 맞이하는 사람.
양복을 입고 있는 박찬석.
균열사태 때 만났던,
서울 헌터 부대의 박찬석 준장이었다.
"두 분 아시는 사이신가요?"
장민 대표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박찬석 준장과 천문석을 살폈다.
박찬석 준장이 웃는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 제자입니다."
박찬석은 천문석과 악수하며 물었다.
"선생님은 잘 계시고?"
"네. 요새는 유유자적 지내신다고 하시네요."
천문석은 류세연에게 들은 이세영 선생님의 근황을 전했다.
박찬석 준장은 이세영 선생님의 근황을 듣고 반색했다.
"그래? 그거 마침 잘됐네!"
"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난 이만. 장민 대표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천문석 군도 만나서 반가웠네."
박찬석 준장은 급히 몸을 돌려 컨벤션 홀 입구로 움직였다.
장민 대표는 멀어지는 박찬석 준장을 보다가 천문석에게 물었다.
"서울 헌터 부대 박찬석 준장님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현장으로만 도시는 분이라 만나기 쉽지 않은 분인데?"
"서울 사태. 병원에서 강화 전투복 빌려주셨던 그때 알게 됐습니다."
천문석이 간략하게 박찬석 준장과 만났던 상황을 설명했다.
"아- 세연이 학교에 균열이 생겼던 그때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장민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이 참 묘하네요."
“그렇네요···.”
천문석은 장민의 말에 공감했다.
처음 키즈 카페에서 말썽꾸러기 특급 헌터를 만났을 때는 이런 미래는 생각도 못 했다.
문득 장민 대표를 본다.
꼬맹이의 돌머리에 배에 검은 멍이 들었을 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해하던 꼬맹이 엄마 장민.
보통의 엄마들과 달리 아이의 잘못을 엄하게 혼내면서 사과하는 모습에 이채를 띄었었다.
진심 어린 사과에 악연은 선연이 되고.
선연은 또 다른 선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특급 헌터, 꼬맹이.
엄마, 장민 대표.
삼촌, 장철 헌터.
키즈 카페의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는 순간.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스승님의 이야기.
하늘의 인과에는 선악이 없으니,
악연과 선연은 자신의 행동에 따르는 결과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