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98화 (99/1,336)

#098

순식간에 조용해진 공간,

추이린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향했다.

몸 안을 꿰뚫어 보는듯한 마력 각성자의 강렬한 시선!

천문석이 바짝 긴장할 때,

추이린이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가야 하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리 좀 비켜줘."

추이린은 방 한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보안관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보안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천문석과 김철수를 봤다.

"그럼 몸조심하고. 떠나기 전에 꼭 나한테 들려서 '헌터 포인트' 확인서 받아가라."

보안관이 나가자,

추이린은 품 안에서 30cm 정도 되는 하얀 막대기를 꺼냈다.

하얀 막대기가 가볍게 허공을 찌르는 순간,

허공에서 퍼져나오는 마력장!

마력장이 천문석과 김철수, 추이린을 둘러쌌다.

생경한 감각에,

깜짝 놀라 주위를 살피는 김철수.

"추이린 연구원님. 이건?"

"잠시 소리 차단한 거다."

김철수에게 대답한 추이린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향했다.

"이번 배송 경주. 결과 들었지?"

"네···. 저희가 3등 했다고."

"맞아. 그룹 본사 미친놈들이 1등은 국민대 뽀미로 발표했다. 이런 또라이 녀석들···."

'뭐지?'

재금 연구소 사람이 재금 그룹을 미친놈이라고 하는 걸 듣고 있으니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하여튼 너희들이 배송 경주 참가한 목적은 재금 그룹 협력업체 선정 때문이지?"

순간 천문석과 김철수의 눈이 마주쳤다.

추이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협력업체에 선정되려는 건. 재금 그룹의 마력 물품 유통에 한발 걸치고 싶어서고?"

"네. 맞습니다."

"그렇죠."

천문석과 김철수가 대답하자,

추이린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거 내가 처리해주지."

"네?"

"...?"

천문석은 의아했다.

하얀 번개, 추이린이라면 마력 각성자 랭커로 엄청난 실력과 유명세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연구원이 그룹의 마력 물품 유통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건가?

고개를 돌려 철수형을 보니 철수형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이때 추이린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탁-

테이블 위에 놓이는 한 뼘이 좀 넘는 길이의 네모난 상자.

"조건은 간단해. 너희는 내가 의뢰하는 일을 몇 개 하고, 그 대가로 이걸 유통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공급해 줄게."

추이린은 어쩐지 눈에 익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투명한 빛을 뿜어내는 육각 기둥 모양의 수정이 들어있었다.

"...이건?"

김철수가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

천문석은 이불을 손에 감고 조심스럽게 육각 기둥 수정을 들어 올렸다.

수정을 기울이자,

육각 기둥 안의 공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점성 있는 액체.

천문석은 이 수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액화 정제 마석!?"

육각 기둥 형태의 수정 기둥은 균열 사태 때 봤던 물건이었다.

이사장이 낼름 했다가 노역형을 받은 고순도 정제 마석!

이건 재금 그룹의 액화 정제 기술로 정제한 고순도의 정제 마석이었다.

천문석의 경악한 순간,

추이린의 자신만만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거 시가 5억원 어치다."

"5억원!?"

이번에는 김철수가 깜짝 놀랐다.

추이린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유통 수수료 1%만 붙여도 500만원이겠지? 이 정제 마석 한 달에 하나씩 넘겨줄 테니 알아서 '처리하고', 나한테는 원가만 넘겨주면 된다."

천문석은 정제 마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재금 그룹, 정제 마석 부정 유통은 중죄인데···."

추이린이 손을 들어 천문석의 말을 막고 상자 속 정제 마석, 수정 기둥을 들어 올렸다.

하얀 막대가 톡- 수정 기둥을 건드리자, 표면에 드러나는 빛나는 글자.

[추이린 제작. 일련번호. 20080756414010]

"이거 내가 직접 정제한 마석이다. 세금, 라이센스 비용 모두 내고 정제한 마석이니까 정상 유통할 수 있다."

추이린은 상자 뚜껑에 고정된 종이를 꺼내 천문석에게 건넸다.

이 종이에는 정상 유통 제품임을 증면하는 세금, 라이센스 관련 일련번호가 기재되어 있었다.

천문석은 김철수를 봤다.

김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천문석을 가리켰다.

협상의 전권을 맡기겠다는 의미.

천문석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재금 보안을 통하시는 게···."

"내 개인적인 일들이다."

"혹시 어떤 일을 맡기실지 들을 수 있을까요?"

"간단한 배송이나 심부름 정도? 이번에 했던 일만큼 빡센 의뢰는 없을 거다. 그건 내가 약속하지."

추이린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천문석과 김철수를 응시했다.

지금 말하는 모든 게 진실이다. 거리낄 것은 없었다.

천문석과 김철수 둘은 미끼일 뿐이다.

중요한 건 이 미끼를 흔들었을 때 나타날 줄.

그리고 이 줄을 타고 올라가면 나올 '그 사람'이다.

재금 그룹, ‘오너!’

추이린은 망설이는 천문석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언제든 계약 파기도 가능하고. 나중에 의뢰 내용을 듣고 거부해도 된다. 당분간은 의뢰가 없으니 천천히 생각해도 되고 말야."

추이린은 미소 지으며 정제 마석이 담긴 상자를 천문석에게 밀어줬다.

"이건 우선 선금. 아니 선금이 아니라 선물로 하지."

손해 볼일 없는 너무나 좋은 조건.

그래서 오히려 망설여진다.

이성은 당장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본능은 굉장히 이상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탈 때처럼,

아찔하면서도 기대되는 이중적인 감각.

천문석은 김철수를 봤다.

"철수형?"

김철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정제 마석을 보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형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

김철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대로 하자. 이번 일도 그렇고. 너 감이 아주 좋은 것 같아."

복권을 사야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이 생기는 법!

천문석은 결정했고,

세 사람은 악수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거리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두 달은 맡길 일 없으니까. 몸부터 회복해라.”

재금 그룹 협력업체를 노리고 시작한 이세계 쿠팡맨은 한 명의 고객을 확보하며 끝나게 됐다.

'하얀 번개, 추이린.'

천문석과 김철수는 매달 한 개의 고순도 정제 마석 유통 권한을 얻었고.

추이린은 재금 그룹의 ‘오너’에게로 이어지는 흔적과 관계를 맺었다.

각자가 원하는 것을 얻은 만족스러운 거래.

천문석과 김철수, 추이린 세 사람은 서로를 향해 웃었다.

---

구으으으응-

사방에서 울리는 육중한 마력 엔진음.

대형 트레일러와 장갑 버스, 장갑 SUV 여러 대가 신서울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 차들은 고산 마을을 출발해 신서울로 돌아가는 재금 보안의 대열이었다.

이 차량 대열 한가운데를 달리는 대형 트레일러 위에는 처참하게 부서진 화물차가 한 대 실려 있었다.

천문석과 김철수 두 사람이 탄 화물차였다.

김철수는 운전석에서 연신 시동을 걸고 있었다.

쿠흐흐-

쿠흐흐-

쿠르르릉-

마침내 시동이 걸리자 환하게 웃는 김철수.

"다행히 엔진은 살아있다!"

"...화물차 통째로 수리 들어가야겠는데요?"

"어차피 새 의뢰인도 당분간 의뢰는 없을 거라니까. 수리할 시간은 충분할 거야. 그리고 이거 만든 사람이 A/S 책임지기로 했어. 그거 해주고 수익 배분받기로 한 거거든."

탁, 탁-

핸들을 두들기며 웃는 김철수.

천문석은 웃고 있는 김철수를 보며 새삼 감탄했다.

화물차는 아작났고,

지난 며칠 동안 죽을뻔한 위기를 한두 번 넘긴 게 아니다.

이렇게 엄청 빡센 이세계 쿠팡맨을 겪고도 웃다니!

역시 철수형!

전에도 느꼈지만, 멘탈이 아주 그냥 강철이다!

"배송 의뢰 달성 보수는 예전 계좌로 넣어줄까? 이거 오리온 길드에서 빌린 장비 파손된 거 보상하면 거의 남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김철수는 종이를 꺼내 숫자를 적으며 말했다.

천문석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이번 일의 수익은.

1. 배송 달성 보수 3천만원.

2. 오크 마석 1개.

3. 온전한 뼈 도끼 1개.

4. 타들어 간 뼈 도끼 1개.

이번 일의 손실은.

1. 박살 난 창 1자루.

2. 두 조각난 방패 1개.

3. 게이트를 넘어가 사라진 방패 1개

4. 거의 걸레짝이 된 방검방탄복과 강화 전투복.

5. 리볼버 마탄 200발.

천문석은 적자 날지 모르겠다고 얼굴이 어두워진 김철수를 봤다.

화물차는 거의 박살 났고,

인맥을 통해 오리온 길드에서 빌린 장비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매달 한 개의 정제 마석 유통권을 받기로 했지만,

그걸로 제대로 된 이익을 만들어내려면 시간이 걸렸다.

비용은 바로 나가는데,

수익은 들어오는데 시간이 걸리는 상황.

문득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된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이 마스터 오크에게 쫓길 때,

주저 없이 화물차를 돌리던 철수형.

천문석은 피식 웃었다.

필요 없는 걸 주는 것조차 아까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득을 넘어선 교분을 나누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헌터에게 배분은 민감한 문제,

수십 마리 랩터를 잡은 장철도 자신이 잡은 랩터 두 마리를 정확히 챙겨줬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도 그렇게 해야 했다.

천문석은 오크 마석과 뼈 도끼가 들어있는 자루를 툭 치며 냉철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수형. 이것도 계산에 넣어야죠. 5:5로 나누기로 약속했는데."

"뭐···? 야! 내가 도둑놈이냐? 네가 목숨 걸고 잡은 걸 왜 나눠?!"

어이없어하는 김철수에게,

여전히 냉철한 목소리로 답하는 천문석.

"헌터에게 배분과 계약은 신성한 겁니다! 우리 5:5 약속했잖아요?"

천문석의 손가락이 자신과 김철수를 번갈아 가리켰다.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철수형이 알아서 처리하고 연락해줘요. 아!"

천문석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헌터 업계 인맥이 없는 철수형이 오크 마석과 뼈 도끼, 정제 마석을 처분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걸 간단히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

천문석은 휴대폰을 켜 전화번호를 종이에 옮겨 적은 후 김철수에게 넘겼다.

"철수형. 마석이랑 뼈 도끼 처분할 때 이곳에 전화하세요. 헌터 업계에서 영향력이 대단한 회사니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김철수는 메모를 읽으며 의아해했다.

"장강 유통, 장민 대표?"

의아해하는 김철수.

“여기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아니 왜?”

키즈 카페의 돌머리 꼬맹이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너무 길었다.

천문석은 적당히 요약했다.

"장민 대표님이 그 장철 헌터님 동생이에요. 서울 사태 때 병원에서 봤던."

"아···."

김철수는 기억이 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미리 연락해둘 테니까. 게이트 넘어가고 다음 날 연락하시면 됩니다."

천문석은 말을 끝내자마자 창문 밖으로 몸을 뺐다.

"야. 잠깐만! 배분 이야기···."

철수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못 들은 척 단숨에 창문을 밟고 화물차 지붕으로 올라가는 천문석.

천문석은 구멍이 곳곳에 뚫린 화물차 지붕 위에 누웠다.

허리, 어깨, 무릎, 목···.

전신이 뻐근하게 저렸으나.

이 또한 살아있기에 느낄수 있는 사치!

천문석은 팔베개를 한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이 내리쬐는 선명한 푸른 하늘을 새하얀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몸을 훑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

두드드드드-

등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을 정도의 진동.

재금 보안의 차량 대열은 빠르고 안전하게 신서울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세계 쿠팡맨이라는 하나의 일이 끝났다.

정산을 해봐야 정확하겠지만 건물주 게이지는 대폭 상승할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의뢰인을 만났고,

2성을 넘어선 일기일원공이라는 기연까지 얻었다.

수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끝나고 돌이켜보니 이번 쿠팡맨 일은 상당히 괜찮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며칠 쉬다가 오리온 길드와 장철 헌터를 만나게 된다.

오리온 길드의 제안을 듣고,

이세기의 검혼이 담긴 검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장철 헌터가 주겠다던 선물을 받으러 가야 한다.

이번처럼 빡세지는 않아도,

하나하나가 굵직한 일들이다.

그러나 천문석은 이 순간 다음 일 생각은 머리에서 지웠다.

삶의 긴 여정은 돌아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찰나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

좋은 바람.

따뜻한 햇볕.

기분 좋은 진동.

그리고 가벼운 마음.

휘이, 휘이이-

천문석은 화물차 지붕에 누운 채 휘파람을 불었다.

천천히 눈이 감길 때,

문득 하늘 고래를 닮은 구름이 나타났다.

퐁, 퐁, 퐁-

물방울을 흩날리며 열심히 하늘을 날던 작은 하늘 고래.

천문석은 천천히 하늘을 지나가는 고래 구름에 손을 흔들고.

"고맙다. 하늘 고래···."

미끄러지듯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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